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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방·북한

김정은 집권 첫날…아버지 교시 폐기하고 “경제 살리라”

등록 2019-02-12 09:08수정 2019-04-30 10:51

#연재_우리가 몰랐던 북한
#연재_우리가 몰랐던 북한

우리가 몰랐던 북한 ⑤ 정부가 견인하는 시장화

김정일 영결식 날 12·28 담화
“시장은 자본주의 온상”이라는
아버지의 교시 전격 폐기하고
“우리식 경제관리법 창조” 지시
2018년 6월13일 북한 사리원에서 한 농부가 논에 비료를 뿌리고 있다. 사리원/AP 연합뉴스
2018년 6월13일 북한 사리원에서 한 농부가 논에 비료를 뿌리고 있다. 사리원/AP 연합뉴스
“시장은 자본주의적 요소의 본거지이며 온상이다.”

2008년 6월18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당·국가 경제기관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의 핵심 메시지다. 김정일 위원장의 이 ‘6·18 담화’로 7·1경제관리개선조처(2002년)와 종합시장 공인(2003년)에 힘입어 확산하던 ‘시장화’에 급제동이 걸렸다. 이는 ‘시장화’ 정책 입안자인 박봉주 총리 해임(2007년 4월)과 시장 통제(2007년 10월 이후) 등 ‘역개혁 조처’를 최고지도자의 발언으로 공식화한 것이다.

“경제관리방법을 우리식으로 개선해 나가기 위한 연구사업을 진행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2011년 12월28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영결식을 마치자마자 김정은 국무위원장(당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을 불러모아 놓고 한 말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아버지 장례를 치르자마자 꺼내든 화두가 ‘경제’다. ‘12·28 담화’라 불리는데, 발언에 거침이 없다. “무엇을 좀 어떻게 해보자고 의견을 제기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며 자본주의적 경제관리방법을 끌어들인다고 걸각질을 하고 있습니다…자꾸 걸각질을 하니 경제사업에서 아무런 대책도 세워지는 것이 없고….” ‘걸각질’은 ‘말썽 부리는 짓’을 뜻하는 함경북도 토속어다. 김 위원장은 “세상에 제일 좋은 것이라고 소문을 내고 있는 경제관리방법들을 다 참고해 우리식의 경제관리방법을 창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국 사례’에서 배우라는 주문이다. 그러고는 “우리식의 독특한 경제관리방법을 창조해 적용하면 다른 나라들에서 하는 개혁이라는 말 자체를 할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은 “시장=자본주의 온상”이라던 아버지의 ‘교시’를 아버지 영결식 날에 사실상 폐기했다. 그러곤 ‘세상에 좋은 건 다 가져다 쓰라’고 독려했다. 덩샤오핑의 ‘흑묘백묘’(검든 희든 쥐 잘 잡는 고양이가 최고)론을 연상케 한다.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을 전면적으로 확립해야 합니다.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를 바로 실시해야 합니다.”

2016년 5월6~7일 조선노동당 7차 당대회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한 ‘사업총화 보고’의 한 대목이다. 김 위원장이 아버지 영결식 당일 연구를 지시한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이 4년4개월여 만에 최고 권위를 지닌 정책으로 공식 선포된 것이다.

박봉주 북한 내각총리가 2018년 4월25일 농업연구원을 방문해 시설을 둘러보는 모습을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박봉주 북한 내각총리가 2018년 4월25일 농업연구원을 방문해 시설을 둘러보는 모습을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4년4개월 동안, 당과 내각에 연구·실행 조직이 꾸려지고 기업소법·농장법·무역법 등 다수의 법이 개정되는 등 많은 것이 바뀌었다. 무엇보다 ‘시장’이 ‘제도·계획 안’으로 들어왔다. ‘농장지표’와 ‘기업소지표 확대’가 대표적이다. 협동농장은 상부에서 내린 ‘생산계획’만 채우면 자체적으로 골라 키운 작물(농장지표)을 시장에 내다팔 수 있다. 각 기업소도 국가 하달 생산계획만 채우면 수요에 맞춰 상품을 만들어(기업소지표) 시장에 내다팔 수 있다. 시장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주체경제’의 근간인 농장·공장·기업소의 임금·실적·평가가 좌우된다.

‘더 많은 생산’을 자극하려고 농업부문에선 최소 생산단위인 분조를 사실상 가족 단위로 줄인 ‘포전담당제’를 도입했다. 노동 대가도 쓸모없는 북한 돈 대신 작물로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농민은 그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판다. 올해 신년사 중 “다수확 농장원”이란 표현은 김 위원장이 이런 변화를 ‘지지’한다는 명백한 정치적 신호다. 공장·기업소엔 “실제적 경영권”이 부여됐고, “제한 없는 보수 지불”을 허용해 임금 상한이 사실상 철폐됐다.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은 “주체사상을 구현한”이라는 수식어가 상징하듯, 공식적으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지향하지 않는다. 예컨대 (일반 농산물과 달리) 식량을 시장에서 사고파는 행위는 여전히 불법이고, 공장·기업소 단위에선 수요에 맞춰 (시장)가격을 정해 팔 수 있게 했지만 “국가적 가격 자유화(는) 철저히 배격”한다.

그럼에도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의 핵심 목표인 ‘생산 활성화’와 ‘재정 확충’을 염두에 둔 정책은 시장화를 추동한다. 양문수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를 포함한 다수의 북한 경제 전문가들은 “현 단계 북한 시장화의 가장 큰 동력은 정부 정책”이며 “정부가 시장화를 주도·견인”한다고 짚었다. 장마당을 중심으로 한 중하층 인민의 자구적·자생적 성격이 강한 ‘아래로부터의 시장화’에 ‘위로부터의 시장화’가 가세한 형국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시장화의 최대 수혜층이 최고지도자와 권력층”이라고도 한다. 예컨대 홍민 통일연구원 통일연구실장 등의 조사·분석에 따르면, 404개 종합시장(2016년 12월 기준)에서 북한 당국이 거둬들이는 ‘장세’(시장사용료)만 한해 7천만달러에 이른다. 시장 장사를 해본 탈북민들은 “장세는 (자전거·짐) 보관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한다. 장세는 하루 한번, 자전거·짐 보관료는 시간 단위로 (지역 인민위원회 산하) 시장관리소에서 징수한다. 자전거·짐 보관료와 장세를 더하면 한해 수억달러에 이르는 ‘재정 수입’이 발생한다. 종합시장뿐만 아니라 공장·기업소의 거래 수익금, 국가기업 이득금, 식당·상점 등 서비스업체의 국가납부금, 무역회사의 관세·국가납부금 등이 당국이 ‘시장’에서 거둬들이는 ‘(준)조세’다. 고려카드·나래카드 등 전자화폐의 사용에 따른 수수료(2~3%)도 국가 재정으로 들어간다. 특히 국가가 독점 창출한 이동전화 시장에서 얻는 재정이 엄청나다. 북한의 이동전화 보급대수는 2008년 1600대에서 10년 새 600만대 안팎으로 폭증했다. 각종 ‘시장 경제 활동’은 북한 재정의 새로운 화수분이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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