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주석의 생일인 태양절을 하루 앞둔 지난 14일 한 북한 여성이 평양 만수대에서 열린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면서 스마트폰을 살펴보고 있다. 평양/타스 연합뉴스
북한 여성들이 ‘깨어나고’ 있다.
‘시장 나가 돌멩이 뿌리면 맞는 게 다 여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북한 장마당 경제의 주축은 여성이다. 가장·세대주로서 군이나 조직에 매여 있는 남성들보다 상대적으로 조직의 통제를 덜 받는 여성들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장사에 나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탈북민 출신 연구자인 엄현숙 북한대학원대학교 연구교수는 “여성들이 시장을 통해 선택의 경험을 많이 해보고 활동 폭을 넓히면서 ‘현실에 어떻게 더 잘 부딪칠까’ 고민하며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배급제가 붕괴된 뒤 남성 세대주들이 여성들의 생활력에 기대어 살아가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개척해가는 여성들의 의식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돈주’로 불리는 북한 신흥 부유층, 환전상, 도매상의 상당수가 여성이다. 이들은 장사를 위해 외부 세계의 동향과 시장의 정보에 민감해진다. <북한 녀자>를 쓴 박영자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한 여성들이 장마당 등에서 활동하면서 네트워크가 넓어지고, 특히 젊은 여성들은 스마트폰 등을 통해 외부 세계의 사정, 중국이나 남한 여성의 생활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면서 여성 인권이나 평등권에 대한 인식도 높아졌다”고 짚었다. 북한 외교의 ‘투톱’으로 떠오른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이나 현송월 선전선동부 부부장,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등 능력을 보이며 활약하는 여성 간부들도 젊은 여성들에겐 ‘역할 모델’이다. 여성들이 생계와 양육 등 ‘이중의 부담’을 지고 변화를 희망하지만, 북한 사회의 남성중심 문화는 여전하다. 결혼하면 뼈 빠지게 고생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결혼이나 출산을 거부하는 여성이 늘고 있다.
변화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지표가 ‘저출산’이다. ‘고난의 행군’ 시기가 끝난 뒤 정부가 출산 장려 정책을 본격화했는데도, 북한 기혼여성(15~49살)의 1인당 합계출산율은 1993년 2.13명, 2008년 2.01명, 2014년 1.89명으로 계속 낮아지고 있다.(1993·2008년 북한 인구총조사, 2014년 유엔인구기금과 북한중앙통계국 공동조사) 박영자 연구위원은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먹고사는 문제가 저출산의 원인이었지만, 2010년대 들어서는 여성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한 출산 기피’에 나서고 있다”며 “‘내 삶을 잘 챙기고 아이를 적게 낳아 남부럽지 않게 잘 키워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도시 거주 고학력 여성의 저출산이 뚜렷하다”고 설명한다.
결혼·이혼 풍속도도 바뀌고 있다. 남성들도 이제는 돈이 많거나 장사 능력이 있는 여성을 배우자 1순위로 여긴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의 가정 내 발언권이 커지고 남편의 주도권도 조금씩 약해지고 있다. 이혼 판결을 받기 어려운 북한의 ‘재판 이혼제’에서 웬만하면 참고 살던 여성들의 의식이 달라지면서 이혼율도 높아지는 추세다. 결혼 신고를 하지 않고 동거하다가 안 맞으면 헤어진다는 의식도 확산되고, 공원 등에서 연인들의 과감한 연애 모습도 자주 볼 수 있게 됐다. 김정일 시대의 풍기문란 단속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 여성들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단단한 ‘유리 천장’이 버티고 있다. 여성들이 큰 장사나 사업을 하려면 남편의 권력이 있거나, 보위부 등 힘있는 기관의 남성 당 간부와의 연줄이 있어야 한다. 엄현숙 연구교수는 “여성이 큰 장사를 움직이려면 남편이나 남성 간부의 권력에 의지하거나 후원을 받아야 한다. 남편이 일반 노동자이면 작은 장사밖에 못 한다”며 “북한 여성들이 변화하고 있지만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지, 북한 체제에 도전하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최근 탈북민의 약 70%가 여성인 점도 북한 여성들의 변화 욕구를 보여주는 간접 지표로 꼽힌다. 2018년 6월 기준 20~30대 탈북 여성이 탈북민 전체의 43.01%, 여성 탈북민 가운데는 60.22%인데, 2010년 이후 이들의 탈북 동기는 과거와 같은 생계형이 아니라 더 나은 삶에 대한 동경과 욕구가 대부분이다.
박영자 연구위원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또래 세대인 청년, 여성들의 변화 열망을 잘 이해하고 있다”며 “장마당 경제의 중심인 여성들에게는 시장 규제 완화, 소비 촉진 정책 등으로 호응을 얻었지만, 젊은 여성들이 원하는 대로 국가·사회의 가부장성과 군사주의적 성격이 변화하려면 장기간 개혁·개방이 지속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참고자료: 통일연구원 ‘김정은 시대 북한 경제사회 8대 변화’, 박영자 <북한 녀자>(앨피·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