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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방·북한

호화아파트 살며 사치…“돈주, 혼사 때 당 간부보다 인기”

등록 2019-04-01 05:00수정 2019-04-30 10:53

우리가 몰랐던 북한 ⑨
‘부 축적한 돈주 부상’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 등장
중국에서 물건 들여다팔아 돈 벌어
유통·운수·무역·사채업자로 진화
당·군 간부들에 뇌물 상납하고
사업·허가 등 든든한 뒷배로 삼아
힘 커지며 북한 미래에 영향력
지난해 6월 평양에서 인기 있는 식당의 테이블 위에 햄버거와 감자튀김 세트가 놓여 있다. 평양의 부유층 사이에 햄버거나 커피 등은 인기가 높다. 평양/AP 연합뉴스
지난해 6월 평양에서 인기 있는 식당의 테이블 위에 햄버거와 감자튀김 세트가 놓여 있다. 평양의 부유층 사이에 햄버거나 커피 등은 인기가 높다. 평양/AP 연합뉴스
“중국돈 2200원짜리 드럼세탁기를 샀어요. 그때 혜산에는 드럼세탁기가 3대 밖에 없었어요. 중국 제품이었는데 2번이나 썼나? 티비는 평면티비, 중국돈 3000원 주고 샀죠. 냉동기도 3000원짜리 샀는데, 전기가 잘 안 와서 속상했죠.” (2014년 1월 남으로 온 40대 여성)

“기타를 9대 갖고 있었어요. 일본 야마하… 미국 기타는 이름은 생각이 안 나는데 3대 있었어요. 야마하는 중국돈 7000원에서 1만원 해요. 평양에서 최고급 기타 ‘은방울’이 중국돈으로 500원 정도 했거든요. 전 비싼 것으로만 9대…” (2010년 5월 남으로 온 30대 남성)

북한에서 살 때 이른바 ‘돈주’라고 불렸던 이들의 증언이다. 전력 사정이 좋지 않은데도 값비싼 전자제품을 쓰고, 취미생활로 치기엔 과하게 고급 악기를 사들이는 모습이 드라마 속 ‘졸부’를 연상시킨다. 2010년 이후 탈북한 돈주들을 심층면접한 한 북한 연구자는 이들의 이런 소비행태를 ‘과시’라고 분석했다. 사치를 통해 다른 사람과 스스로를 구분짓는 유별난 부유층이 북한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돈주는 말 그대로 ‘돈의 주인’을 뜻한다. 손전화를 서너대씩 들고 다니며, 호텔에서 커피를 즐기고, 외국산 화장품을 애용하고, 호화로운 아파트에 사는 이들은 북한의 시장화가 부유층을 낳을만큼 도도했음을 보여주는 징표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이들의 삶을 소개하는 기사(2016년 5월)에서 “북한에는 상위 1%의 부자가 있으며, 이들은 ‘평해튼’이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고 썼다. 평해튼은 ‘평양’과 뉴욕의 ‘맨해튼’을 합친 신조어다.

“저는 옷 만드는 일을 하다가 중국에서 옷을 들여와 팔았는데, 장사를 하다보니 옷보다는 원단을 파는 게 이윤이 더 남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국에서 원단을 들여와 상인들한테 도매를 했죠.” (2011년 1월 남으로 온 60대 여성)

돈주는 1990년대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에 등장했다. 배급이 끊기고 국영상점마저 문을 닫자 북한 주민들은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장마당으로 몰려들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남들보다 재빨리 시장의 논리에 적응한 이들이 나타났다. 중국에서 들여온 원단이나 공산품을 팔아 돈주머니를 채운 이들이 대표적이다. 개중에는 남쪽이나 일본에 사는 가족들이 보내준 돈을 밑천 삼아 수완을 발휘한 이들도 적지 않다.

시장이 커지면서 돈주들의 역할도 다양해졌다. 평양과 지방을 잇는 유통업자가 등장하고, 버스 구실을 하는 ‘써비차’를 굴리거나 자가용 택시를 모는 운수업자도 생겨났다. 외화벌이 사업에 뛰어드는 무역업자나 돈을 굴리는 사채업자까지 등장했다. 최근엔 사람들을 고용하고, 새끼 돈주들을 거느리는 기업형 돈주도 출현했다. 생산, 유통, 소비, 무역, 고용, 금융 등 시장이 굴러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기능들이 돈주들의 역할로 분화한 셈이다.

“오토바이를 달라고 하면 그냥 줬어요. 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보위부나 이런 데 다니는 사람들이죠. 나중에 잘 봐달란 거죠. 일종의 뇌물이죠.” (2010년 4월 남으로 넘어온 30대 남성)

북한에선 외국과 무역을 하거나 사업을 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한다. 개인들 사이의 금융거래는 법으로 금지돼 있다. 이 때문에 돈주들은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권력층과 특수한 관계를 맺는다. 당이나 군의 간부들이 돈주들의 뒷배를 봐주고, 돈주들은 이익의 일부를 상납하는 공생관계가 똬리를 트는 것이다. 양문수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이를 “돈주들이 권력이라는 보호막을 사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2012년 여름 평양 중심부 창전거리에 건설중이던 새 아파트 단지 공개 행사에 주민들이 몰려 있다. 2013년 완공된 창전거리는 평양의 첫 ‘뉴타운’으로 아파트 단지 안에 극장과 백화점 등 편의시설들도 들어서 있다. 평양/AP 연합뉴스
2012년 여름 평양 중심부 창전거리에 건설중이던 새 아파트 단지 공개 행사에 주민들이 몰려 있다. 2013년 완공된 창전거리는 평양의 첫 ‘뉴타운’으로 아파트 단지 안에 극장과 백화점 등 편의시설들도 들어서 있다. 평양/AP 연합뉴스
“부동산으로 돈을 벌었어요. 북한에서는 아파트를 세우면 뼈다구만 있어요. 그걸 10채 정도 구입해요. 1채당 중국돈 2만원에 구입해서 인테리어 업자를 붙여서 최상급으로 꾸미면 1만원쯤 들어요. 이걸 1채당 10만원에 파는 거예요.” (2010년 5월 남으로 온 30대 남성)

돈주와 권력의 공생관계는 아파트 신축과 분양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국가권력은 아파트 신축계획 작성, 토지 제공, 설계 승인 등을 통해 돈주들이 관여할 길을 열어준다. 돈주들은 아파트 신축에 필요한 자재와 인건비를 댄다. 국가권력은 손쉽게 자금과 자재를 조달함으로써 정책을 달성하고, 돈주들은 그렇게 지은 아파트를 거래함으로써 배를 불리는 것이다. 평양의 경우 교통보다는 난방이 중요해 화력발전소 옆에 지은 아파트가 인기를 끈다고 한다. 아파트 거래가 불법이다보니 돈주들 주변엔 입주허가증(입사증) 발급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해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전문 거간꾼이 붙는다.

국가권력은 정권 차원에서 사업을 진행할 때 부족한 재원을 벌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종 돈주들의 자금력을 동원하기도 한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돈주 80여명을 인터뷰한 뒤 발표한 논문에서 평양의 대형 워터파크인 문수물놀이장 건설에 돈주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11만㎡에 가까운 면적에 27개의 미끄럼틀을 갖춘 문수물놀이장은 2013년 준공되기 전까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3차례나 방문했던 곳이다. 비슷한 시기에 완공된 릉라인민유원지, 미림승마구락부와 함께 사회주의 문명국 건설의 상징으로 꼽힌다.

돈주들이 단속에 걸려 한 방에 훅 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국가권력은 이런 식으로 돈주들에게 무력을 보여줌으로써 시장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한다. 그러나 국가권력이라고 해서 단속을 남용하긴 힘들다. 돈주를 마구 처벌하면 시장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주민들에게 불편함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돈주에 고용된 이들은 일자리를 잃게 된다. 돈주의 힘이 점점 커지면서 돈주와 국가권력 사이에 복잡한 역학이 형성되고 있다고 북한 연구자들은 지적한다.

“옛날에는 당간부 자녀가 좋은 신랑신부감이었지만, 지금은 돈주의 자녀들이죠.” (2010년 4월 남으로 넘어온 50대 여성)

돈주의 성장은 북한에서 경제력이 선망받는 가치로 자리잡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돈이 신분이나 계층 상승의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돈주들은 위로는 권력과 결탁하고, 아래로는 시장을 장악하면서 세력을 키우고 있다. 양문수 교수는 “돈주의 성장은 북한에서 중산층이 형성되는 과정과 닿아 있다”며 “이들의 집단적 선택이 북한의 미래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강문 선임기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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