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외교부 장관이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해법을 발표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정부가 6일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해법으로 국내 재단을 통해 배상금(판결금)을 지급하는 ‘제3자 변제’ 방안을 공식 발표했다. 강제동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가해 전범기업의 배상 참여 등 정부가 일본 쪽에 요구해온 ‘성의 있는 호응 조처’는 끝내 무산됐다. 오랜 세월 법정 투쟁으로 이뤄낸 피해자들의 법적 권리를 짓밟은 ‘최악의 굴욕 외교’란 비판이 제기된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이날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지원재단)이 강제동원 피해자·유족 지원과 피해구제의 일환으로 2018년 대법원 확정판결 3건의 원고들께 판결금 및 지연이자를 지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박 장관은 “재원은 민간의 자발적 기여 등을 통해 마련하고, 향후 재단의 목적사업과 관련한 가용 재원을 더욱 확충해나갈 것”이라며 “현재 계류 중인 강제동원 관련 여타 소송이 원고 승소로 확정될 경우, 역시 재단이 판결금 및 지연이자를 지급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포스코와 한국도로공사, 케이티(KT) 등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혜택을 본 16개 한국 기업이 재원 마련에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해법에 일본 정부의 사과나 전범기업의 배상 참여는 담기지 않았다. 박 장관은 “일본 쪽이 일본 정부의 포괄적인 사죄, 일본 기업의 자발적인 기여로 호응해오기를 기대한다”고 말하는 데 그쳤다. 정부는 지난 1월 말 한-일 국장급 협의 직후까지 “일본 쪽의 성의 있는 호응 조치가 나와야 피해자를 만나 설명할 수 있고, 최종 해법도 발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왔다. 특히, 외교부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을 지원재단 주도의 제3자 변제 방식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구상권 행사에 대해 “현재로서는 구상권 행사를 상정하지 않고 있다”며 사실상 포기 의사를 밝혔다.
이날 정부가 발표한 해법은 일본 쪽 주장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것이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은 없었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과거사 배상 문제는 끝났다”며 “따라서 2018년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은 국제법 위반이니 한국이 해법을 마련해 오라”는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한덕수 총리와의 주례 회동 자리에서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결단”이라며 “한-일 관계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기 위해서는 미래세대 중심으로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양국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장관도 “높아진 국격과 국력에 걸맞은 대승적 결단으로서, 우리 주도의 해결책”이라고 자평했다.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를 이렇게 매듭짓고,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해제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정상화 등 한-일 관계 개선에 속도를 낸다는 방침이다. 이를 통해 경제·안보 등에서 한·미·일 3각 협력 강화에도 날개를 달겠다는 구상이다. 대통령실 주변에서는 3월 중 윤 대통령 방일 전망이 나온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양국이 정상회담을 위해 서로 오가는 게 중단된 지 12년째”라며 “이 문제를 양국 정부가 직시하고 있고, 필요하다면 논의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말했다.
‘대승적 결단’을 강조한 한국 정부의 태도와 견줘 일본 쪽은 덤덤한 반응이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이날 오전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의원의 질의에 답하는 형식을 통해 “역사인식에 대해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해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강제동원’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상도 공식 회견 없이 기자들과 만나 “한국 정부가 발표한 조치를 2018년 대법원 판결로 인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일-한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려놓기 위한 조치로 평가한다”며 “일본 정부는 1998년 10월에 발표된 일-한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포함한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에 관한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음을 확인한다”는 정도로 발언했다. 과거사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를 담은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한다는 말로, ‘포괄적 사과’를 되풀이한 것이다.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의 가해 전범기업들도 “이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의해 해결이 끝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며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들 기업은 “한국 정부가 해결책을 발표한 것은 알고 있지만, 이는 한국 정부의 국내 조치여서 언급할 입장이 없다”고 밝혔다고 <아사히신문>이 전했다.
이날 정부 발표를 두고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은 “굴욕 외교로 꼽히는 2015년 위안부 합의만 해도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라며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했다”며 “강제동원이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일본 쪽 입장이 완벽하게 관철된 최악의 굴욕 외교”라고 말했다.
강제동원 판결 피해자 지원단체와 대리인단은 “한국 행정부가 일본 강제동원 가해 기업의 사법적 책임을 면책시켜주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이들은 대법원 확정판결 3건의 원고 15명 가운데 생존 피해자 3명 등 정부 해법에 동의하지 않는 피해자들과 일본 기업 국내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 절차를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쪽 사죄와 배상 참여 없이 지원재단을 통한 배상금 수령은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강제동원에 아무런 법적 책임이 없는 포스코 등 국내 기업들이 지원재단에 기금을 내는 것은 ‘배임’에 해당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어, 국내에서 법적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신형철 기자
newiron@hani.co.kr 도쿄/김소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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