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21일 정부의 코로나19 관련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란 대통령실 웹사이트 사진. 테헤란/로이터 연합뉴스
이란 정부가 미국의 제재로 한국 은행들에 이란의 자금이 묶여 있어 코로나19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의약품과 의료 장비 등 인도적 물품을 구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미국의 제재를 비판하고 제재 해제를 촉구했다.
주한이란대사관은 24일 오후 이례적으로 한국 언론에 보낸 보도자료를 통해 “유감스럽게도 미국 정권은 이란을 포함한 세계 모든 국가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으로 인한 전인류적 위험과 위협에 당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란인들에 대한 경제적 제재 압박을 강화하고,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한 사태를 이란에 대한 정치적 수단으로 악용하여 이란인들에 대한 의약품과 의료품의 공급을 차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미국은 국제사회와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승인한 이란 핵합의를 불법적으로 탈퇴하였으며, 이란에 대한 ‘최대 압박’ 명분으로 일방적이고 비인도적인 제재를 이행하여 세계 보건에 위협이 되고, 이란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과의 싸움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했다.
이란대사관은 특히 “인도적 물품의 제재와 관련한 미국 책임자들의 거짓 주장으로 인해 이란 국민들은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조차 한국 은행에 묶여 있는 자산(제재 이전 가스와 액화 가스 판매액)을 사용하지 못한다”며 “비제재 품목과 필수품 중 특히 생명을 지키는 데 필수적인 의약품과 의료 장비 등의 인도적 물품을 구입할 수 없고, 한국이나 외국 기업으로부터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하는 데에도 이 재정을 사용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한국 금융기관에는 한국이 이란에서 수입한 가스·원유 등에 대해 지불해야 할 대금 약 7조원이 묶여 있는데, 미국의 금융 제재 때문에 이를 이란에 전달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란에 의약품과 의료장비 등 인도적 물품을 수출하는 대금으로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언급한 것이다. 이란 정부는 이란이 마땅히 받아야할 이 돈을 한국이 어서 지급해야 한다고 거듭 요구해왔지만, 한국 정부와 은행은 미국의 제재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인도적 교역 형식의 거래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의약품과 식료품은 제재 대상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란과 거래를 하면 미국과의 거래가 전면 중단되는 ‘세컨더리 보이콧’을 우려하는 기업들과 은행들이 이란과 거래를 중단한 상황이다. 이란 정부는 한국에 대한 에너지 수출 대금이 이자도 붙지 않는 계좌에 계속 묶인 채 받지 못하는 상황을 한국 정부에 계속 항의하고 있다. 한-이란 관계도 이로 인해 계속 악화하고 있다.
코로나19의 급격한 확산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란의 하산 로하니 대통령은 최근 문재인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진단키트 등의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한국 정부도 이란 지원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23일 “스위스 방식을 참고해 유사한 제도를 확립해 인도적 지원을 하는 방향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스위스 방식’은 미국 재무부가 이란과의 거래가 제재 위반이 아님을 보장하는 대신 은행과 기업은 상세한 거래 정보를 제공하는 형식인데, 한국도 이런 방식으로 이란과 인도적 물품 거래를 재개하기 위해 미국 정부와 협의 중이다.
21일 테헤란의 대형 쇼핑몰인 이란몰에 설치된 코로나 19 진료를 위한 응급 병동을 의료진이 살펴보고 있다. 테헤란/EPA 연합뉴스
미국의 경제·금융 제재에 맞서 ‘저항 경제’를 강조해온 이란 정부는 코로나 상황이 악화하는 가운데 최근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아울러 많은 이란인들이 코로나19로 희생되는 상황에서, 의약품과 의료 장비의 공급마저 막고 있는 미국 제재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적극 알리려는 외교를 펼치고 있는데, 이번 이란대사관의 입장 표명도 그 일환으로 보인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과 국제사회가 맺은 핵합의를 일방적으로 탈퇴하고 제재를 강화한 결과 코로나19 확산 속에서 이란의 인도적 위기가 더욱 악화됐음을 강조해 제재의 부당성을 알리고 제재 완화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주한이란대사관은 이번 자료에서 “우리 시민들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목숨을 잃는 상황 속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사악하게도 이 위험한 바이러스와 싸우기 위해 이란에 필요한 물품 공급의 차단을 목표로 불법적인 제재를 강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각국이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한 위험을 마주한 현재와 같은 상황 속에서 보건권 및 의약품과 의료 장비의 공급과 관련한 어떤 종류의 제한도 생존권의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므로, 사람의 목숨을 노리는 미국 정부의 일방적이고 불법적이며 비인간적인 제재를 비판하는 동시에 제재 해제를 강력하게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이란의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24일까지 2만4811명이며, 사망자도 1934명이다.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 22일 코로나19 위기와 관련해 북한과 이란 등을 도울 수 있다는 뜻을 밝힌데 대해서는,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와 하산 로하니 대통령이 공식 거부 의사를 밝혔다.
박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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