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의 측근인 일한의원연맹의 가와무라 다케오 간사장(왼쪽)이 18일 오후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비공개 만남을 갖기 위해 한일의원연맹 회장인 김진표 의원의 안내를 받으며 국회 본청 민주당 당 대표실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생전 처음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얼굴을 마주한 것은 2004년 말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뒤 2005년 1월2일치 기사에서 중국 남단 하이난다오(해남도)에 끌려가 “개처럼 일만 하다 돌아왔다”고 눈물 짓던 고복남(당시 88) 할아버지의 증언을 실었다. 이미, 70~80대에 이른 노인들의 기억은 위태롭고, 간간이 튀어나오는 일본어 단어는 생경해 20대 후반의 한국 젊은이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부끄럽게도 증언의 30% 정도였다.
세월이 흐르고 철이 들면서, 그나마 내 또래가 피해 당사자들로부터 직접 얘기를 들을 수 있는 ‘마지막 세대’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로 큰 고통을 받았다고 신고한 할머니는 240여분에 이르지만 이제 모두 숨져 여남은 명이 남았고, 한-일 갈등의 핵심 현안인 강제동원 재판에서도 이춘식(96) 할아버지, 양금덕(90) 할머니가 남아 있을 뿐이다. 역사의 진실 추구에 시효란 없는 것이지만, 피해자가 살아 있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난 2018년 10월 대법원의 판결과 이듬해 7월 일본의 수출 보복 조처로 한-일 관계는 험악해졌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는 지난달 24일 문재인 대통령과 전화 회담에서 “양국 관계를 그대로 방치해선 안 된다”는 말로 한국 정부의 ‘선 대응’을 요구했다. 외무성 관계자는 며칠 뒤 일본 언론과 인터뷰에서 ‘선 대응’의 구체 내용을 ‘현금화를 않겠다’는 한국 정부의 확약이라 정의했다.
가와무라 다케오 일한의원연맹 간사장이 18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과 만나 ‘서로 지혜를 짜내자’고 의견을 모았다지만, 일본 분위기는 험악하기만 하다. 일부 자민당 인사들이 ‘주일대사관과 삼성지사를 압류하자’는 아무말 대잔치를 벌였다는 보도까지 나온다. 청구권 문제를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하기로 한 1965년의 한-일 청구권 협정을 어긴 것은 한국이니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안을 제시하라’는 논리다. 하지만, 외교가 어느 정도 국내 정치에 발목 잡혀 있기는 한일 양국이 마찬가지다. 문 대통령이 수 차례 불가 입장을 밝힌 ‘정부 개입’을 일본 정부가 거듭 요구한다면, 결국 문제를 풀지 말자는 것과 같다.
그래서 제안해 본다. 문제 해결을 위한 ‘입구’로 일본 기업이 원고들에게 허심탄회한 사과를 하면 어떨까. 일본제철 재판을 대리하고 있는 임재성 변호사는 8월 초 <한겨레> 기고에서 일본 기업들에게 “먼저 사과해 달라”고 요청했다. “100살을 바라보는 노인에게, 당신의 젊은 날 고통을 잊지 않고 있다고 진심으로 말씀해주십시오. ‘사과’만으로 판결 이행이 완료되었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과’라는 행위 이후, 우리는 분명 다른 관계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한국에서 현금화 절차를 잠시라도 멈추는 결단이 가능한 유일한 주체는 바로 ‘원고’들이다.
일본이 진심으로 한-일 관계의 앞날을 걱정한다면, 먼저 고령의 원고들에게 인간적 도리를 다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외교가 작동할 공간이 열린다. 청구권 협정을 아무리 눈 씻고 뒤져봐도 일본 기업의 사과의 책임까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했다는 구절을 찾을 순 없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