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1월15일 청와대 본관에서 화상회의로 열린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정상회의 및 협정 서명식에 참석해 일본의 서명식을 본 후 박수를 치고 있다. 문 대통령 뒤 화면에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보인다. 문 대통령은 아직 스가 총리와 대면 정상회담을 하지 못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해 9월 스가 요시히데 총리 취임 이후 계속돼 온 우리 정부의 관계 개선 노력에도 한국을 향한 일본의 냉담한 자세는 변하지 않고 있다. 한국이 화해를 위해 ‘나름의 성의’를 보이는데도, 일본의 요구 수준이 너무 높아 새해 들어서도 관계 개선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8일 취임한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취임 나흘째부터 주변국과 활발한 의사 소통을 시작했다. 설날 당일이던 12일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과 전화회담을 마쳤고, 16일엔 왕이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장관과 첫 통화를 했다. 하지만 한반도 주변 주요국 가운데 일본의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과만 통화 일정이 잡히지 않고 있다. 일본의 차가운 태도 때문이다.
일본은 곳곳에서 한국에 대한 불만 표출을 노골화하고 있다. 도미타 고지 전임 주한 일본대사가 지난달 27일 새 임지인 미국으로 떠났지만, 후임인 아이보시 고이치 대사의 부임은 20일 넘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강창일 주일 한국대사는 지난달 22일 도쿄에 도착했지만, 일본의 차가운 응대 탓에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커녕 모테기 외무상과도 면담하지 못했다. 2019년 5월 부임한 남관표 대사 때도 한-일 관계가 최악이었지만, 고노 다로 외무상과는 부임 4일째, 아베 신조 전 총리와는 부임 12일 만에 면담했다.
강 대사의 신임장 접수를 위해 지난 12일 오후 면담에 응한 것은 일본 외무성의 ‘2인자’인 아키바 다케오 외무성 사무차관이었다. 하지만 아키바 차관은 강 대사와 면담을 불과 10분 만에 잘랐다. <교도통신>은 지난 15일 이런 일본 정부의 태도에 대해 “한국이 역사 문제를 다시 꺼내드는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한국을 대화 상대로 보지 않겠다는 메시지다. 스가 정권 내에서 혐한 무드가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통신은 이어 “문재인 정권으로부터 (한-일) 관계 개선을 향한 의욕을 느낄 수 없다. 서둘러 만날 필요가 있는가”란 총리관저 내 분위기와 정 장관과 모테기 외무상이 만나도 “날씨가 춥네요”정도밖에 할 얘기가 없을 것이란 정부 고위 당국자의 냉소적 반응도 소개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지난해 9월 스가 총리 취임 이후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나름 다양한 노력을 해왔다. 특히 지난달 18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전과는 다른 파격 발언을 내놓았다. 회견 열흘 전인 8일 서울지방법원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판결에 대해 “솔직히 조금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고, 일본이 우려하는 일본 기업 자산의 현금화 문제에 대해서도 “강제집행의 방식으로 현금화된다든지, 판결이 실현되는 방식은 한-일 양국 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고 밝혔다. 2019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사법 판단에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고 말했을 때와 달리 일본 쪽을 배려한 발언이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싸늘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모테기 외무상은 이튿날인 19일 문 대통령 발언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지난 수년 동안 한국이 국제 약속을 어기고, 양국 간 합의를 실행하지 않는 상황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자세를 표명한 것만으로 (발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현안 해결을 위한 한국의 구체적 제안을 보고 평가하겠다”고 말했다. 말이 아닌 ‘구체적 행동’을 요구한 셈이다.
지금까지 스가 총리 등 일본 주요 당국자들이 쏟아낸 말을 모아 보면, 일본이 원하는 ‘구체적 행동’이란 2018년 10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 핵심을 한국 정부 스스로 무너뜨리는 내용인 것으로 추정된다. ‘외교적 타협’이 아닌 ‘일방적 양보’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기대를 맞추려면, ‘대법 판결의 이행’이나 ‘원고들이 동의할 수 있는 외교적 해법’ 등 정부가 유지해 온 핵심 원칙을 무너뜨려야 한다. 일본이 지금처럼 냉담한 태도를 유지하는 한 한국 정부 운신의 폭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새해 들어서도 한-일 관계 개선이 쉽지 않은 이유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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