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18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팔꿈치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마지막으로 정 장관님, 미국 대표들은 북한의 비핵화-특히 한반도가 아닌 북한을요-라는 표현을 쓰는데 한국 정부도 한반도 비핵화가 아닌 이 호칭으로 돌아온 건가요?”
지난 3월18일 오전 한-미 외교·국방장관 회의(2+2)가 마무리된 뒤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마지막 질문자로 나선 미 <폴리티코> 기자는 비핵화 문제를 둘러싼 한-미의 이견을 헤집듯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의 지적대로 발언 기회마다 꼬박꼬박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정의용 외교장관과 달리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전날부터 ‘북한 비핵화’란 표현을 고집했고, 이날 회견에서도 “우리는 북한 비핵화에 전념하고 있다”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런 ‘이견’ 때문이었을까. 회견 직후 공개된 공동문서엔 “양국 장관들은 북한 핵·탄도미사일 문제가 동맹의 우선 관심사임을 강조”한다는 표현이 포함됐을 뿐 한-미가 추구하는 달성하려는 최종 목표가 ‘한반도 비핵화’인지 ‘북한 비핵화’인지 명시되지 않았다. 이를 확인한 보수 언론들은 16일 미-일의 공동문서엔 ‘북한 비핵화’라는 표현이 사용됐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문 정권이 공동성명에 ‘북 비핵화’ 못 넣게 막은 것이다”(19일치 <조선일보> 사설), “2+2회의서 드러난 미국 기조 변화, 직시해야”(같은 날 <중앙일보> 사설)라는 말로 정부를 호되게 비판했다.
그로부터 한달 반이 지났다. 보수 언론들의 우려와 달리 미국의 최종 선택은 북한과 새로 대화의 문을 열기 위한 현실적인 길이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지난달 30일 조 바이든 행정부가 ‘대북 정책 재검토’를 끝냈다는 사실을 알리며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어, 미 외교안보정책의 사령탑인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2일 <에이비시>(ABC) 방송에서 미국의 대북 정책이 “북한을 적대하기 위함이 아니다”는 사실을 밝히며 자신들의 최종 목표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고 못 박았고, 3월 중순 서울에서 한국 정부의 애를 태웠던 블링컨 장관도 3일 런던에선 ‘북한 비핵화’란 표현을 버리고 자신의 목표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임을 분명히 했다. 미국이 한국 정부의 집요한 설득을 받아들여 실용적인 방향으로 대북 정책의 방향을 잡은 것이다.
한-미의 목표가 ‘북한 비핵화’가 아닌 ‘한반도 비핵화’라는 사실은 왜 중요할까. 남북이 1991년 12월 합의한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공동선언’에서부터 2018년 6월 북-미가 서명한 ‘싱가포르 공동선언’에 이르기까지 이 용어가 지난 30여년 동안 이어져 온 북핵 협상의 뼈대가 되어왔기 때문이다. 미국이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조선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향하여 노력할 것을 확약”한다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서약이 담긴 싱가포르 공동선언을 계승한다는 뜻이고, 이 약속의 토대가 된 2018년 4·27 판문점 선언에 생명력을 불어넣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남이 먼저 비핵화해 북의 비핵화를 이끌겠다는 ‘한반도 비핵화’와 달리 북한 일방적인 핵포기를 뜻하는 ‘북한 비핵화’는 외교적 수단으로는 도무지 달성할 수 없는 ‘먼 꿈’일 뿐이다.
대북 정책을 둘러싼 한-미의 이견은 어느 정도 조정된 듯 보이지만, 갈 길은 여전히 멀다. 북한은 2일 미국이 말하는 외교란 “적대행위를 가리기 위한 허울 좋은 간판”(2일 권정근 북 외무성 미국담당 국장 담화)이라며 사나운 말을 쏟아냈다. 남과 미국의 근본적인 정책 변화가 이뤄지지 않는 한 ‘적대시 정책 철회’라는 근본 요구를 내걸며 ‘병진노선 2.0’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쉽게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진 않을 것이다. 또다른 위협은 지난 2018~2019년에 진행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과정에서 ‘훼방꾼’ 역할을 톡톡히 했던 일본의 움직임이다. 일본 외무성은 3일 미-일 외교장관 회담 결과를 정리한 보도자료에서 여전히 “북한 비핵화”라는 표현을 고수했다. 바이든 행정부에 들어서도 미국의 대북 정책을 둘러싼 한-일의 처절한 물밑 갈등이 불가피해 보인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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