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서 발리로 이동하는 비행기 화면. 배지현 기자
윤석열 대통령의 동남아시아 순방 출발 하루 전인 지난 10일 저녁 7시께. 저는 캄보디아 프놈펜행 아시아나 민항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대통령실 출입기자인 저는 애초 11일 아침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 기자단과 함께 대통령 전용기인 공군 1호기를 타고 프놈펜으로 향할 예정이었지만 돌발 변수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실은 순방 출발 이틀 전인 9일 밤 <문화방송>(MBC) 기자들에게 윤 대통령 ‘전용기 탑승 배제’ 통보를 했습니다. 윤 대통령의 지난 9월 뉴욕 순방 중 비속어 발언을 자막을 달아 최초 보도한 점 등에 대한 “최소한의 필요 조처”라는 설명이었습니다.
대통령실이 순방에 임박해 <문화방송>에 통보한 탓에, 10일 대통령실 기자단의 총회가 열렸어도 대응이 쉽지 않았습니다. “의도적으로 늦게 통보한 게 아니냐”, “악의적이다”라는 비판이 기자들 사이에서 나왔지만, 대통령실은 결코 철회할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한겨레>는 그날 아침 대통령실의 명백한 언론 통제 조처에 항의해 전용기를 이용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저는 그때부터 분주해졌습니다. 결정은 회사의 몫이었지만, 취재는 기자의 몫이었기 때문입니다.
탑승 제한이 취재 제한 아니다? 현장은 제한투성이
우선 미리 전용기에 부치려 했던 짐부터 되찾았습니다. 10일 오전 10시께 이동 차량에 실리려던 캐리어를 급히 찾아 내렸습니다. 가장 빠른 프놈펜행 민항기가 있는지 검색에 들어갔습니다. 이코노미 좌석은 없었습니다. 결국 인생 처음 그날 저녁 7시25분 출발하는 아시아나 비즈니스석을 예약했습니다. 초유의 전용기 탑승 거부 취재는 그렇게 윤 대통령보다 하루 먼저 시작됐습니다.
민항기를 이용한 동남아 순방 취재는 장애물의 연속이었습니다. 10일 늦은 밤 프놈펜에 도착해 하루를 묵은 저는, 이튿날인 11일 오전 윤 대통령과 함께 전용기로 출발해 오후 도착한 기자단의 프레스센터가 차려진 호텔에 합류했습니다. 대통령실은 전용기 탑승 배제는 “취재 편의를 일부분 제공하지 않는 것이지, 취재 제한은 전혀 아니다”라고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현장 취재에 어려움이 적지 않았습니다.
싱가포르 공항에서 경유를 위해 대기하는 상황. 배지현 기자
전용기로 이동하는 대통령의 동선을 시간에 맞춰 따라잡기란 불가능했습니다. 특히 윤 대통령은 지난 13일 밤 프놈펜 일정을 마치고 전용기를 타고 다음 방문지인 인도네시아 발리로 4시간 만에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날 저녁 비행기가 없어 이튿날인 14일 아침 호텔을 나섰습니다.
프놈펜 공항에서 발리 공항에 도착하기까지 10시간 남짓 걸렸습니다. 프놈펜-발리 직항 민항편은 없었습니다. 싱가포르를 경유하는 비행기표를 끊었습니다. 급히 프놈펜 공항으로 달려갔지만, 야속하게도 비행기는 1시간이나 지연된 끝에야 이륙했습니다. 프놈펜에서 싱가포르까지 2시간5분을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발리행 비행기를 갈아타려 2시간 남짓 공항에서 기다렸습니다. 이어 2시간45분을 비행해 발리 공항에 닿았습니다만, 입국 수속에 또 한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제가 발리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던 그 시각, 윤 대통령은 이미 발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현지에서 주요20개국(G20) 경제단체와 기업 대표들이 참여하는 비(B)20 서밋 기조연설에서 발언하고 있었습니다. 동행취재단은 발리 프레스룸에서 연설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싱가포르에서 발리로 이동하는 비행기 화면. 배지현 기자
비행기 안에 있는 저는 기사 작성이 불가능했고, 결국 서울 대통령실에 남아있는 동료 기자가 윤 대통령의 현지 발언 등을 챙겨 기사화했습니다. 저는 발리에 그날 저녁 8시30분께에야 도착했습니다. 그날 오전 순방 동행기자단을 대상으로 진행한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의 인도네시아 방문 관련 브리핑, 대통령실 관계자의 김건희 여사 일정 관련 브리핑 등은 이미 다 지나간 뒤였습니다.
14일 월요일 하루를 대부분 프놈펜~발리 이동에만 보낸 것입니다. 전용기를 타지 못한 까닭에 대통령 순방 일정과 주요 행사를 담은 취재용 안내수첩도 뒤늦게야 받았습니다. 현장에서 정보력은 떨어졌고, 우왕좌왕했습니다.
제가 비행기를 갈아타며 발리로 향하는 동안 전용기 안에서 벌어진 일도 뒤늦게 알았습니다. 윤 대통령은 프놈펜에서 발리로 가던 중 평소 친분이 있던 <시비에스>(CBS)와 <채널에이(A)> 기자 2명만 따로 승무원을 통해 불러 전용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는 겁니다.
저는 14일 밤과 15일을 발리 프레스센터에서 다른 순방 취재기자들과 함께 합류해서 보냈습니다. 고생과 불편함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발리에서 만난 한 현지 한인은 <한겨레> 기자인 것을 알아보고 “<한겨레>의 전용기 탑승 거부 결정을 응원한다”고 했습니다.
인도네시아 발리에 설치된 프레스룸. 15일(현지시각) 윤석열 대통령이 귀국하면서 비어있는 모습. 배지현 기자
15일 밤, 저는 다시 텅 빈 프레스센터에 남았습니다. 이날 밤 윤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한-중 정상회담과 주요 20개국(G20) 정상 환영만찬을 마친 뒤 밤 10시30분 전용기로 이륙했습니다. 기자단도 이에 맞춰 윤 대통령보다 먼저 프레스센터에서 짐을 싸서 공항으로 철수했습니다. 각종 보도자료와 생수통, 멀티탭 그리고 단상의 태극기와 인도네시아 국기만 남은 빈 공간은 적막했습니다.
저는 발리 공항 근처의 숙소로 따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서울로 가는 비행기는 없었습니다. 저는 17일 이른 새벽, 다시 민항기에 올라 아침에 서울에 도착합니다. 대통령 순방보다 하루 먼저 시작한 순방 취재는 이렇게 하루 늦게 마무리됩니다. 윤 대통령은 4박6일, 저는 6박8일입니다.
※추신
특정 언론사를 대상으로 한 대통령실의 전용기 탑승배제라는 초유의 결정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대통령실 쪽은 여전히 “정해진 방침이 없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순방의 다수 일정 공개를 전속에게만 맡기는 등 윤 대통령의 편협한 언론관에 비춰보면 <문화방송>이 아닌 다른 언론사까지 배제 범위가 확장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번엔 취재제한 공간이 전용기였지만 어떤 공간까지 확대될지도 알 수 없습니다.
발리/배지현 기자
beep@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