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제정연대 회원들이 지난달 25일 오전 국회 앞에서 14년간 유예된 차별금지법의 연내 제정을 요구하며, 무지개와 각종 차별 금지 사유가 적힌 깃발 등을 든 채 국회 주변을 에워싸는 국회 포위 행동을 펼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국민에게 주어진 권리는 ‘청원’까지만인 것일까. 지난 6월14일 차별금지법이 ‘30일 안에 10만명 이상 동의’라는 국민동의청원 요건을 갖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로 넘어간 지 반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올해 12월8일 기준, 정확히 178일째다.
그러나 법안 심사는 한치도 나아가지 못했다. 지난달 9일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한 심사기한이 21대 국회 임기 끄트머리인 2024년 5월까지로 미뤄졌고, 그런 뒤 새롭게 전해진 법안 논의 소식은 없다. 대선 시계가 빨라지며 정치권은 너나없이 분주한데, 차별금지법의 시계는 멈춘 듯하다.
국회는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가는 길 어디쯤에 서 있는 것일까. <한겨레>는 지난달 15∼24일 국회 법사위원 18명에게 차별금지법 찬반 의견을 묻는 전수조사에 착수했다. 지난해 9월 <한겨레21>이 했던 비슷한 조사에서는 답변서를 제출한 위원이 3명(차별금지법 제정 찬성 2명, 검토 중 1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1년여가 흐른 만큼 찬반 어느 쪽이건 입장을 정한 위원이 늘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응답자는 3명에 그쳤다. 더불어민주당의 박주민·이수진(지역구) 의원이 찬성 입장을 회신했고, 김남국 의원은 ‘원론적으로는 찬성하지만 사회적으로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서면으로 보내왔다. 나머지 15명은 전부 응답 자체를 하지 않았다. 1년 전과 놀랍도록 똑같은 결과다.
“실명 조사 부담스러운데…다른 의원실은 어떤가요?”
사실 이런 조사 결과가 도출될 것은, 조사를 시작하는 시점부터 예감할 수 있었다. <한겨레>가 ①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찬반 ②찬반 또는 유보 입장인 이유 ③유보 입장이라면 수정·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 ④각국의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흐름과 유엔(UN) 등 국제사회의 한국에 대한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에 조응할 방법 등을 묻는 조사지를 들고 국회 의원회관 법사위원 사무실 18곳을 처음 방문한 날은 지난달 15일이다. 한 주 뒤인 지난달 22일에는 18곳 의원실에 전화를 걸어 답신을 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첫날 의원실을 방문했을 때 ‘조사 결과가 실명으로 공개되느냐’는 문의가 많았다. <한겨레>는 실명 조사를 이번 조사의 원칙으로 삼았다. 국회에서 논의되는 법안들에 대한 실명 토론과 입장 표명 등은 한명 한명이 독립적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의 책무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보좌진이 찬성 또는 반대 입장이 각 의원 실명으로 보도되는 것에 상당한 부담감을 나타냈다. ‘다른 의원실들은 어떻게 한다고 하느냐’는 질문도 쏟아졌다.
국회 법사위 소속 민주당 의원실 비서관은 이렇게 설명했다. “(익명 발표가) 소극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당장 하루하루 업무가 굴러가야 하는 우리로선 공개적인 입장 표명이 현실적인 부담이다. 전례를 보면 공개적인 공간에서 차별금지법 찬성을 입장을 밝힌 의원의 사무실에는 항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항의 전화가 쏟아져 며칠이고 업무가 마비됐다. 당장 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인데 솔직히 그런 위험을 감수하기는 어렵지 않겠나.”
“정교한 전략이 우선”…시민단체 “그동안 무슨 노력을 했나”
결국 ‘위험을 감수’하기로 한 위원은 3명. 다만, 무응답한 의원 15명의 고민이 다 같은 온도인 것은 아니다. 응답 수는 적었지만, 조사 진행 과정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한 각 의원실의 다양한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국민의힘의 경우 법사위 소속 위원 6명 가운데 5명이 아예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민주당에서 법사위 간사이자 차별금지법 대표발의자인 박주민 의원을 중심으로 국민의힘 쪽에 공동 토론회나 공청회를 열자고 요구하고 있지만, 아예 ‘무반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국민의힘 의원실 한 곳은 “명백하게 차별금지법 반대 입장”이라고 구두로 설명했지만, 조사에 공식적으로 응하지는 않았다.
민주당의 경우 고민이 복잡했다. 한 의원실 보좌관은 “이번 조사 결과(3명 응답)가 곧 민주당 내부의 분위기라고 해석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당 내부에 차별금지법에 대한 공감대는 분명히 있다”며 “다만 제정이라는 목적지까지 가려면 정교한 전략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가 밝힌 ‘필요한 전략’을 대략 정리하면 이렇다. 한쪽으로는 차별금지법에 대한 과도한 오해를 쌓아놓은 종교계를 상대로 한 적극적인 설명, 설득을 해야 한다. 다른 한쪽으로는 그런 오해를 그대로 흡수해 차별금지법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 야당을 논의 테이블에 앉혀야 한다. 또 다른 의원실의 비서관은 “찬성 입장을 표명하는 것을 검토는 했다”며 “다만 논의가 시작되는 국면에서 야당과 종교계를 자극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고 전했다.
누군가 ‘대세’를 정해주길 바라는 분위기도 있었다. 한 보좌관은 “결국은 대선 캠프(선대위)나 원내지도부 수준에서 방향과 속도를 정해줘야 법사위 소속 개별 의원들이 움직일 수 있지 않겠느냐”며 “11명(민주당 소속 법사위원)이 지기엔 굉장히 무거운 짐인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유보’ 입장을 공개 표명을 한 김남국 의원의 답변서에도 이런 취지가 담겨있다. 김 의원은 답변서에서 “차별금지법이 국회에서 처리되어야 할 법안이라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면서도 “법안을 처리하는 방식과 시기 등에 있어서 사회적으로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김 의원 쪽은 “이런 입장 표명만으로도 종교계 항의가 엄청나겠지만, 그래도 실명으로 입장을 밝히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민주당의 고민이 깊어지는 가운데, 차별금지법 제정을 바라는 시민사회 모임인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국회 앞 농성은 한달째를 맞았다. 몽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은 “지난해 법사위 전수조사 결과와 올해 조사 결과에 차이가 없다는 것이 매우 놀랍다”며 “민주당은 번번이 사회적 논의를 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당장 지난 1년 동안에는 어떤 사회적 논의를 위한 노력을 했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사실은 종교계 등 일각의 항의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감당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 아니냐”며 더욱 적극적인 입법 추진을 요구했다.
최하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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