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11일 오후 강원 춘천시 강원도당에서 열린 강원도 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발언을 마친 뒤 마스크를 다시 쓰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디지털 성범죄물 유통 방지를 위해 마련된 이른바 ‘엔(n)번방 방지법’(전기통신사업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 ‘사전 검열’에 해당한다며 재개정 추진 입장을 공식화했다. 하지만 이미 불법성이 확인된 범죄 촬영물을 걸러내는 조처를 ‘사전 검열’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제1야당의 대선 후보가 일부 ‘남초 커뮤니티’ 주장에 편승해, 디지털성폭력을 막기 위해 여야가 합의 통과시킨 법을 뒤집는 것은 무책임한 표몰이 정치라는 비판이 나온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1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엔번방 방지법’ 시행으로 혼란과 반발이 거세다. 엔번방 방지법은 제2의 엔번방 범죄를 막기에는 역부족인 반면, 절대 다수의 선량한 시민들에게 ‘검열의 공포’를 안겨준다”며 이준석 당대표의 재개정 추진 입장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앞서 이 대표는 지난 10일 엔번방 방지법이 ”통신의 자유를 심하게 침해할 소지가 있고 실질적으로 엔번방 사건에서 유통경로가 되었던 텔레그램 등에는 적용이 어려워 결국 실효성이 떨어지는 조치”라며 당 차원에서 재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윤 후보와 이 대표가 언급한 ‘엔번방 방지법’은 지난해 5월 여야 합의로 통과된 전기통신사업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다. 개정안은 부가통신사업자에게 불법 촬영물을 삭제하고 접속을 차단하는 등의 조처 의무를 부과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다. 이에 따라 시행 첫날인 지난 10일부터 일평균 이용자 10만명 이상 또는 연평균 매출액 10억원 이상 사업자인 카카오·네이버와 주요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불법 촬영물 필터링이 적용됐다. 하지만 일부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카카오톡에 올린 일상적인 영상에도 필터링 기술이 적용됐다는 증언과 함께, 이용자들이 공유한 영상의 불법 촬영물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이 ‘사전검열’에 해당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귀여운 고양이, 사랑하는 가족의 동영상도 검열의 대상이 된다면 그러한 나라가 어떻게 자유의 나라겠느냐”(윤석열 후보)는 것이다.
하지만 방송통신위원회는 이미 불법촬영물이라고 확인된 영상의 ‘코드’를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등 공개된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영상물의 ‘코드’와 비교해 걸러내는 것을 ‘사전 검열’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라고 반박한다. 방통위 관계자는 “방통위에서 이용자 신고나 수사를 통해 불법촬영물이나 미성년자 성착취물로 확인된 영상물의 디지털 코드를 데이터베이스로 보유하고 있다. 이 코드를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코드와 비교해서 일치하면 차단하는 것”이라며 ”사업자가 영상물의 내용을 보고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공인된 불법촬영물을 걸러내는 것이다. 과거부터 웹하드에서 하던 ‘스크리닝’을 확대적용했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윤 후보와 이 대표가 문제삼은 ‘엔번방 방지법’은 지난해 5월20일 재석 의원 178명 중 170명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이 중에는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의원 50여명의 찬성표도 포함되어 있다. 윤 후보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권성동 사무총장과 장제원 의원도 이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불법촬영물 ‘사전 차단’을 두고 시민사회 일각의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단법인 ‘오픈넷’은 이번에 논란이 된 전기통신사업법 일부 조항이 “카카오톡, 페이스북 등 정보매개자의 과도한 사적 검열로 합법적인 정보의 유통을 차단하거나 사전 검열을 거친 정보만 공유할 수 있는 일종의 사전허가제로 운영될 수 있다”며 지난 3월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청구한 바 있다.
하지만 '범죄피해 구제'와 '통신의 자유' 사이의 섬세한 논의가 필요한 사안을 남초 커뮤니티 일각의 표심을 의식해 ‘사전검열’로 몰아붙이는 것은 ‘무책임한 정치’라는 비판이 나온다. 강민진 청년정의당 대표는 “엔번방 방지법이 실행된 지금도 피해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뒷전이다. 지금 카카오톡에선 여성을 대상화한 사진과 영상이 고의적으로 공유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장혜영 정의당 선대위 수석대변인도 이날 성명을 내어 “엔번방 방지법은 유통 플랫폼에 대한 책무와 규제를 포함해 디지털 성착취물의 유포를 선제적으로 차단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만들어진 법안”이라며 “지금 필요한 것은 무책임 선동정치가 아니라 책임감 있는 숙의정치”라고 지적했다. 임재우 이재훈 기자
abbad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