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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팬데믹이 소환한 큰 정부, 평범한 사람의 안전망 1순위로”

등록 2021-12-24 04:59수정 2021-12-24 20:43

다시 멈춤, 이것만은 꼭! ③ 국가의 귀환
22일 오후 서울 중랑구 서울의료원 건물로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한 시민이 의료진과 함께 짐을 들고 들어가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22일 오후 서울 중랑구 서울의료원 건물로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한 시민이 의료진과 함께 짐을 들고 들어가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윤홍식 |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코로나19 팬데믹은 국가의 역할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국가를 강화하자는 주장은 오랫동안 시대착오적인 생각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980년대 이래 대부분의 사회에서 국가는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이자,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는 비효율과 불신의 대명사로 비난받았다. 게다가 디지털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국가가 개인의 일상을 감시하고 자유를 통제하는 ‘빅브러더’가 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이 닥치자, 그런 국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방역으로 인한 손실보상을 요구하는 자영업자부터 기본소득, 최소소득 보장, 부의 소득세, 공공의료의 확충을 요구하는 시민단체와 유력 정치인까지 모두 국가가 지금보다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심지어 재정건전성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큰 정부는 악이고 작은 정부가 선이라고 주장했던 보수 야당조차 자영업자들에게 50조원, 100조원의 공적 지원을 공약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몰고 온 전대미문의 위기에 모두가 국가의 귀환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대응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이 고용 유지와 소득 보장을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것을 보면서,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팬데믹 이후 국가의 역할을 묻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독일의 <슈피겔>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세계가 ‘거대한 정부의 시간’이 될 것이라는 우려 섞인 기사를 실었다. 미국의 바이든 정부는 미국 예외주의를 벗어던지고 광대역 통신망, 교통, 상하수도 등 국가 인프라를 개선하기 위해 1조2천억달러(약 1422조원)에 이르는 인프라법에 서명했다.

국가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현대 사회에서 국가가 뒷방으로 물러나 있었던 적은 없었다. 1997년 구제금융기(IMF) 외환위기에 직면해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나쁜 일자리가 대량으로 늘어나게 한 것도, 주택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게 한 것도 모두 국가 정책의 결과였다. 경제위기 때마다 천문학적인 세금을 들여 기업을 구제한 것도 국가였다. 성장 동력을 적극적으로 찾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면, 그런 국가는 한국 사회를 떠난 적이 없었다. 깊이와 폭은 달랐지만,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공업 정책이 그랬고, 김대중 정부의 정보통신산업 정책도,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그린 뉴딜과 디지털 뉴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국가의 귀환이 아니라, 누구를 위한 국가의 귀환인지를 물어야 한다. 고강도 방역이 코로나19 확산을 억제하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로 인해 발생한 사회경제적 피해의 대부분이 취약계층에 집중되면서 선진국 대한민국의 후진적 복지의 민낯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팬데믹 상황에서 임시·일용직에 종사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매일 일자리를 잃었고, 영세자영업은 문을 닫았다. 하지만 그곳에 국가는 없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명목상 모든 취업자에게 확대되었던 고용보험은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사회보험이 정규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제도화되면서 임시·일용직과 같은 불안정 고용 상태에 있는 노동자와 영세자영업자를 제도에서 배제했기 때문이다. 최후의 안전망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있지만, 엄격한 자격 기준 때문에 보호가 절실한 많은 사람들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선진국 대부분이 시행했던 광범위한 고용 유지 정책도 우리에겐 없었다. 전대미문의 감염병이 창궐하는데도 민간 중심의 의료전달체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 의사 집단이 공공의료 확충을 가로막자 국가는 처음부터 의지가 없었던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로 쉽게 정책을 포기해버렸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지속되면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요구가 높지만, 사실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재난지원금과 손실보상금의 지급 대상을 놓고 정치권 전체가 들썩였지만, 임시적 지원을 제외하면 팬데믹 이후 심화될 불평등을 막을 제대로 된 정책은 거의 마련되지 않았다. 손실보상제도는 최소화되었고 전국민 고용보험과 상병수당은 논의되고 있지만, 국민이 원하는 방식으로 제도화될지는 알 수 없다. 정부의 대응은 한국형 실업부조(국민취업지원제도)에서 보듯 한국적 현실을 반영한다는 명분으로 늘 제도를 왜곡·축소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는 시민의 삶을 적극적으로 책임진 적이 거의 없다. 코로나 팬데믹은 그 부끄러운 국가의 역사를 바로잡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기업과 시장만을 위한 국가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안전한 삶을 지키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국가가 필요하다. 정책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변할 수 없는 국가의 역할이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기본생활을 보장받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실업, 질병, 노령, 돌봄 등 사회적 위험에 직면해도 안전한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게 국가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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