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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언제까지’ 답하지 않을 것인가, 시민의 ‘시간’을 빼앗는 자들은

등록 2022-04-23 09:29수정 2022-04-23 16:54

[한겨레S] 이라영의 비평
시간과 정치

지체 거듭된 차별 철폐의 시간
시민의 시간 지배해온 정치권은
차별금지법도, 장애인 이동권도
‘언제 해결?’ 물음에 응답 안 해
21일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서울 지하철 경복궁역에서 기획재정부 등을 규탄하는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21일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서울 지하철 경복궁역에서 기획재정부 등을 규탄하는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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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을 앞둔 권력과 취임을 앞둔 권력이 교차하는 시간.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당선자 쪽은 5월10일부터 반드시 용산에서 집무를 시작하겠다고 한다. 게다가 애초에 돌려달라고 한 적 없는 청와대를 5월10일부터 자꾸 국민에게 돌려준다 한다. 한편 더불어민주당은 대통령이 바뀌기 전에 검찰 수사권-기소권 분리를 반드시 이루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다. 당론으로 채택해 소속 의원 172명 전원 명의로 법안을 발의했다. 그 강한 의지는 어째서 15년간 유예된 차별금지법 제정을 향해서는 흐르지 않을까.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며 11일부터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누군가에게는 시급한 어떤 시간이 꾸준히 지연되고 연장된다.

계급에 따라 불평등한 시간

흥미롭게도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국민의 나이를 만 나이로 통일시킨다는 약속을 했다. 전국민에게 한두살 젊은 나이를 선물해주니 시간을 퍼주는 듯 생색내기에 좋다. 사소해 보이는 이 약속은 국가가 국민의 시간을 합법적으로 지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시계는 똑같이 움직이며 시간 자체는 과학적이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다룰지는 정치적인 문제다. 게다가 시간을 소비하는 방식은 사회적 계급과 정체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당과 야당 모두 지금 시간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을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에 실제로는 가장 많은 시간을 소유했다. 정해진 기간 안에 반드시 처리해야 할 안건을 능동적으로 결정한다. 권력이 있는 사람은 기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박근혜 전 대통령은 형을 다 채우지 않고 사면되었으며, 이명박 전 대통령 사면은 여전히 살아 있는 의제다. 또한 시간을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당선자를 포함하여 대통령이나 총리가 이동할 때는 상황에 따라 교통신호 통제까지 실시된다. ‘높은 분’들의 의전 혹은 경호를 위해 시간과 장소가 통제될 때는 일반적으로 ‘시민의 발목을 잡는다’고 하지 않는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착취당하는 이들이 겪는 가장 근본적인 부정의로 “시간성 분배의 부정의”를 꼽았다. 시간이 과대평가되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평가절하되는 집단도 있다. 신선한 새벽배송은 밤샘 노동의 결과다. 또한 사회적 소수자들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나중에 정치’는 시간의 정치경제학을 정확히 보여준다. 민주당에 차별 철폐의 시간은 나중으로 꾸준히 지체된다면, “여성가족부는 역사적 소명을 다했다”는 국민의힘에 이 사회는 이미 구조적 차별이 없는 평등한 공동체이다.

이처럼 권력은 시간적 구조를 만든다. 동시대인이라는 감각은 차별받는 집단에게는 공유되기 어렵다. 성차별주의자들이 여성 인권을 ‘과거의 우리 어머니’와 비교하는 습관은 여성을 동시대인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은 현존재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애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활하며 비장애인들과 동시대에 존재하지 않아야 ‘선량한 시민’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치권에서 차별금지법의 제정 시기를 계속 늦추는 행위는 이처럼 동시대인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삶의 시간을 쥐고 불이익을 주는 것이다. 시민으로서 ‘불승인’하는 권력 행위다. 그렇게 평등이 ‘지체’된다. 모든 사람의 시간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음으로써 구조적 불평등을 의도적으로 강화한다. 시간적 불평등은 기본적인 인권침해 중 하나다.

장애인을 비롯한 교통약자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많이 듣는 말은 ‘이 시간에 왜 여기에’라는 힐난이다. 이 힐난은 일종의 시간적 장벽을 세우는 행위다. 정치학자 엘리자베스 코언은 “권리를 획득하거나 박탈당할 때 시간이 교환 수단이 되는 정치적 거래 시스템”을 ‘시간의 정치경제학’이라 정의하고, 한 사회의 정치체제가 얼마나 평등한가는 국민의 시간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시간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집단이 겪는 고통은 순간적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일상의 리듬이 깨져야 보이는 것들

일부에서는 장애인들이 왜 하필 출근 시간에 ‘고의로’ 지하철 타기 시위를 하느냐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들의 시위는 시간을 지배하는 이들에게 매우 논리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행위이다. 시간을 무시당하는 집단은 시간을 지배하는 이들과 공통 시간을 경험하는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 시위는 하나의 발언인데, 시위자들은 부당함을 가시화하고 새로운 사회구조를 만들기 위해 기존의 시간과 관련된 규범과 문화를 무너뜨린다. 예를 들어 철도 노동자, 택배 노동자들의 파업은 일상의 리듬을 깨뜨린다. 시민들의 익숙한 시간적 리듬을 흩뜨림으로써 정상적으로 보이는 그 리듬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보이게 만든다. 투쟁은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점유한 장소에 침투하고, 빼앗긴 시간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이 사회의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교란하고, 기존의 언어를 전복시키며 침묵의 벽을 깨는 행위다. 이때 찾아오는 불편은 마땅히 필요한 과정이다. 불편을 통과하지 않는 진보의 시간은 없다.

시간에 대한 무지는 부족한 인권 의식의 결과다. 경기도 김포에 살고 있는 나는 평소에 ‘서울에서 가깝다’고 자주 말해왔다. 버스로 한번에 가고, 지하철도 있고, 서울 동북쪽만 아니면 가기 편하고 등등. 그러나 지금은 폐지된 김포 향유의집 시설에 살던 장애인들이 서울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왕복 8시간이 걸렸다. 비장애인은 장애인의 시간을 모른다.

국민의힘 대표와 한 티브이 토론에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꾸준히 강조한 것은 바로 정치에서 시간의 개념이다. 그는 정확히 시간의 정치경제학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지금까지 많은 정치인이 장애인 관련 정책을 내놓았지만 핵심이 빠졌다. 박경석은 ‘언제까지’라는 답을 줘야 한다고 했다. ‘언제까지’에는 답하지 않은 채 장애인들이 ‘일반 시민’의 시간을 붙잡는다는 구도는 기만이다. 우리 사회가 정작 붙들고 있는 시간은 누구의 시간인가. “저희는 21년을 기다렸다는 이 무게를 한번 생각해주세요. 진지하게.”

예술사회학자.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2020) <타락한 저항>(2019) 등의 저자. 사회의 구석구석을 비평합니다. 아름다우면서도 정확한 비평의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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