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1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지원단체 회원들이 광주광역시청 앞에서 일본 전쟁범죄 기업의 배상 책임을 대신해주는 윤석열 정부의 ‘제3자 변제안’을 규탄하고 있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제공
지난 3월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의 ‘해법’인 3자 변제안이 발표된 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재단)이 지급할 판결금을 누가 수령할지에 언론의 관심이 쏠렸다. 정부의 3자 변제안은 일본 정부의 사과나 일본 가해 기업의 배상이 모두 빠졌다는 점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컸다. 그러나 정부의 제3자 변제안이 현실화된 이상, 생존 피해자와 유족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한 관심 역시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3자 변제안에 비판적인 국내 여론 속에서, 뜻했던 바와 다르게 선택의 순간에 당면한 피해자들은 부담감도 느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정부안을 두고 “연대했던 피해자와 가족들, 시민사회를 갈라치기하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 과정에서 앞서 2018년 대법원에서 강제동원에 대한 배상 승소 확정 판결을 받은 원고 15명(생존피해자 3명) 중 생존피해자 1명을 포함해 11명이 정부안을 수용하기로 했다.
강제동원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당사자인 일본이 빠지면서, 사안은 국내정치의 갈등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3자 변제안 발표 뒤 개선된 한-일 관계를 치적으로 꼽은 윤석열 대통령은 “과거에 발목 잡혀선 안 된다”며 “우리 사회엔 배타적 민족주의와 반일을 외치면서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세력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대일 외교를 비판한 야당을 포함해 시민단체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해법’은 피해자와 유족, 시민사회를 가르는 방식으로 ‘배상금’의 의미까지 흩뜨려 놓았다. 미쓰비시·신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2018년 대법원에서 받은 승소 판결에 따른 배상금은 연대의 결실이기도 했다. 1990년대까지도 한국이 외면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일본 법원에서, 일본 시민단체들의 법적·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소송으로 싸웠다. 이를 알게 된 한국 시민사회와 변호사들이 나섰고, 2009년 설립된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민변(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들과 함께 수임료도 받지 않고 공익 소송을 벌였다. 이후 일본의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될 때까지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정부가 재단을 통해 지급하기로 한 판결금은 이 기회를 또다시 물거품으로 만들었지만, 피해자와 시민사회가 함께 한 노력의 결과란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보수언론은 이런 강제동원 운동의 역사는 지운 채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과 대리인단이 판결금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금전적 요구를 했다는 보도를 연일 이어가고 있다. 이에 발맞춰 여당은 이들 모임과 대리인단이 약정금 명목으로 판결금의 20% 지급을 청구하고, 후원금 대부분이 피해자가 아닌 시민단체 쪽으로 흘러갔다며 “시민단체의 탈을 쓰고 비즈니스를 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10여년간 진행된 공익 소송의 수임료를 받지 않는 대신 10%의 성공보수를 받기로 한 약속을 불순한 계약처럼 몰고 가는 것이다. 해당 약정금은 근로정신대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역사 기념 및 피해자 인권 지원 사업에 쓰는 공익적 목적을 갖고, 피해자 지원을 위해 전개한 다양한 입법·사회 활동과 그 결과는 다뤄지지 않았다. 보수언론과 여권은 오랜 시간을 함께한 피해자들과 시민단체·대리인 사이 약속을 위법성 여부나 공적 가치 등에 대한 세밀한 고려 없이 모두 “돈벌이 수단”으로 치환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단체와 대리인의 수고에 감사를 표하는 피해자들도 있었지만, 보수언론과 여권의 공세에 수십년간 한뜻을 가졌던 피해자, 이들과 연대했던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벌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흐르고 있다. 이번에 제기된 논란과 관련해 위법성 의혹이 제기되면, 단체와 대리인단도 적극 대응한다는 계획이지만, 이들이 걱정하는 것은 조직의 미래가 아닌 “역사를 기억하는 일”의 미래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국언 이사장은 “만약 소송이나 압수수색이 들어온다면 모두 감당할 것이다. 하지만 강제동원 문제와 같은 과거사에서 중요한 건 기억 투쟁인데, 그 힘이 약해지진 않을지가 가장 걱정이 된다”고 했다.
장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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