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5일 경기 포천 승진훈련장에서 실시된 ‘2023 연합·합동 화력격멸훈련’에서 이종섭 국방부 장관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학수학능력시험과 관련해 변별력은 갖추되 학교 수업만 열심히 따라가면 문제를 풀 수 있도록 출제하고 학교 수업에서 다루지 않은 부분은 출제에서 배제하라.” (15일 오후 2시,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브리핑)
“공교육 교과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분야의 문제는 수능 출제에서 배제해야 한다. 공교육에서 다루는 내용에 관해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더 보충하기 위해 사교육을 찾는 것은 막기 어렵다.” (15일 저녁 6시, 대통령실 윤 대통령 발언 추가 공개)
“윤석열 대통령은 어제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에게 ‘쉬운 수능’ ‘어려운 수능’을 얘기한 게 아니다.” (16일 아침 8시13분,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 서면브리핑)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5개월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이 수능 관련 지시를 내리며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의 발언 취지가 ‘수능 난이도’와 관련된 게 아니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수능이라는 폭발력 있는 사안에 기름을 붓는 발언을 불쑥 내놓고 이후 수습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입니다.
이는 윤석열 정부에서 자주 노출하는 모습입니다. ‘초등학교 5살 입학’, ‘주 69시간 노동 시간 개편’, ‘수능’까지 민감한 정책을 다루는 과정에서 ‘의견수렴 부족→돌출 발언→논란→수습→혼란’의 과정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오답노트’를 만들지 않는 걸까요?
박순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2022년 8월8일 저녁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교육시설안전원에서 사퇴 의사를 밝힌 뒤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초등 입학 만 5살” 열흘 만에 교육부 장관 사퇴
이번 수능 논란은 11개월 전 ‘만 5살 초등입학’ 논란을 연상케 합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7월29일 금요일, “초중고 12학년제를 유지하되
취학 연령을 1년 앞당기는 방안(만 6살→만 5살)을 신속히 강구하라”고 박순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에게 지시했습니다.
이날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박 장관으로부터 교육부 현안 보고를 받은 뒤 나온 발언입니다. 박 부총리는 “사회적 양극화의 초기 원인은 교육 격차다. 취학 연령을 1년 앞당겨 사회적 약자 계층이 빨리 의무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로 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주말 내내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학부모들과 교육계에서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취학연령 문제는 아동 발달 특성, 부모들의 삶의 계획, 교육 예산·인프라 마련 등 사회 전 분야와 걸쳐있는 문제인데 제대로 된 의견 수렴 없이 덜컥 발표를 한 것입니다. 앞선 정부에서도 추진을 했지만 의견 수렴, 공론화 부족으로 유보했던 정책입니다.
여당인 국민의힘과도 소통이 부족했습니다. 당시 당대표 도전을 앞두고 있던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8월4일 <와이티엔>(YTN) ‘뉴스라이브’에 출연해 “무슨 일을 이 모양으로 할까 속상하고 화도 난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익은 정책들, 국민들과 이해관계 단체들과 교감을 이루지 않은 정책들을 저렇게 해대면 이건 참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다”며 “박 장관의 책임이 매우 크다고 생각하는데 따지고 보면 박 장관만의 책임이 아니고 우리 당 책임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논란이 사그라들지 않자, 박 부총리는 대통령 현안 보고 열흘 뒤인 지난해 8월8일 사퇴했습니다.
근로시간 개편 논란 당시 온라인에 많이 공유됐던 ‘69시간 근무표’. 온라인커뮤니티 갈무리
지난 3월16일 안상훈 대통령실 사회수석은
“윤석열 대통령께서는 연장근로를 하더라도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3월6일 고용노동부가 근로시간 개편안의 내용을 담은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입법예고 한 지 열흘만으로, 정부안을 뒤집는 발언입니다.
이는 정부·여당이 ‘엠제트(MZ) 노조’로 호출한 ‘새로고침노동자협의회’의 반발에 부딪히면서 나온 지시입니다. 그런데 3월20일 대통령실은 “의견수렴을 해서 주 60시간 아니고 더 이상 나올 수도 있다”고 밝혔습니다. 기존의 ‘주 69시간’ 정부안에 비판 여론이 일자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며 대통령이 보완을 지시한 건데 또 다른 메시지가 나온 것입니다.
윤석열 정부의 ‘근로시간 제도 개편방안’(개편방안)은 연장근로시간 관리 단위를 확대해 한주 노동시간을 최대 52시간에서 최대 80.5시간(주 7일 기준, 주 6일 기준 69시간)까지 늘릴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애초부터 과로와 장시간 노동을 부를 수 있는 개편방안이기 때문에 일터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고 의견을 충분히 수렴했어야 하는 정책입니다. 그러나 당시 근로시간 개편 논의에서 대통령실은 일터의 노동자, 주무부처인 노동부, 여당인 국민의힘과 원활한 소통 없이 정책 혼선을 자초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오후 경기도 포천 승진훈련장에서 열린 ‘2023 연합·합동 화력격멸훈련’을 관람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은 3월27일 내각과 대통령실 참모들에게 “법률안과 예산안을 수반하지 않는 정책도 모두 당정 간에 긴밀하게 협의하라”며
“당정 협의 과정에서 국민 여론이 충분히 반영되도록 하라”고 주문했습니다. 당시 앞선 정책 혼선의 교훈에서 나온 지시라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수능 발언’은 이러한 지시를 무색게 할 정도로 이전의 잘못을 답습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정책 혼선의 피해자는 당연히 국민입니다. 온라인에선 ‘수험생만 불쌍하다’는 반응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권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옵니다. 유승민 국민의힘 전 의원은 17일 페이스북에 “윤석열 정부의 교육개혁을 기대했다. 그런데 지난해 만5세 취학 폭탄, 이번엔 수능 폭탄으로 혼란만 야기했다”며 “둘 다 대통령이 자초한 리스크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