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8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한국자유총연맹 제69주년 창립기념행사에서 참석자들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28일 전임 문재인 정부를 사실상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했다. 강경보수단체 행사에서 보수층을 결집하려는 의도를 띤 발언이라 해도 선을 넘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파장이 예상된다. 대외적으로도 불필요하게 남북 긴장을 고조시킨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윤 대통령의 발언은 ‘한국자유총연맹 제69주년 창립 기념행사’에서 나왔다. 한국자유총연맹은 행정안전부 아래 설립된 안보운동단체로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이 만든 ‘반공연맹’을 모태로 한다. 행사에는 보수진영 원로부터 정·관계 인사, 한국자유총연맹 회원 등 4천여명이 참석했다.
연설에서 윤 대통령은 전 정부를 “왜곡된 역사의식, 무책임한 국가관을 가진 반국가 세력”이라고 지칭한 뒤 “핵무장을 고도화하는 북한 공산집단에 대해 유엔 안보리 제재를 풀어달라고 읍소하고, 유엔사를 해체하는 종전선언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고 맹비난했다. 보수의 ‘홈그라운드’에서 전 정부를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붙이면서 강한 반감과 적대적인 대북관을 가감 없이 드러낸 것이다. 윤 대통령이 ‘강경한 축사’를 하는 동안 10여차례 박수가 터져 나오고 “윤석열”을 연호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이날 현직 대통령으로는 24년 만에 직접 참석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윤 대통령이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전면 부정하며 적대감을 표시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9월 그는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는 전 정부 대북정책을 두고 “북한에만 집착하는 학생 같았다”고 비판했다. 지난 1월 외교부·국방부 새해 업무보고 자리에서는 “무슨 ‘종전선언이네’ 하는 상대방 선의에 의한 평화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 뒤 국무회의 머리발언에서는 “상대의 선의에 기대는 가짜 평화가 아닌 압도적인 힘에 의한 평화로 튼튼한 안보를 구축하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연설처럼 문재인 정부를 반국가 세력이라고 노골적으로 지칭하는 수준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윤 대통령은 야당과 정부에 비판적인 시민사회단체들을 향해서도 적대감을 나타냈다. 그는 “조직적·지속적인 허위 선동, 조작, 가짜 뉴스, 괴담으로 자유대한민국을 흔들고 위협하며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세력’이 너무나 많이 있다”며 “이들이 자유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고 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세력을 겨냥한 발언으로 풀이됐다. 협치 대상을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세력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발언에 야당은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문 전 대통령 당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윤건영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백번을 양보해 아무리 야당이 밉고 전임 정부가 싫다 해도, ‘반국가 세력’이라는 것은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었다”며 “제발 꼴통보수의 수장처럼이 아니라, 대한민국 대통령답게 국정운영을 하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의 발언은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에 반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지병근 조선대 교수는 <한겨레>에 “전 정권에 적대감이 깔린 상황에서 상대를 친북 세력으로 몰아 보수 입지를 다지겠다는 것으로 보이는데 국민통합을 추구해야 할 대통령의 발언으로 보긴 어렵다”고 했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지층 결집을 위해 (윤 대통령이) 발언 수위를 높일 것이라는 신호탄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북 관계 측면에서도 위험하고 경솔한 발언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진시원 부산대 교수는 “최근 미-중 관계가 충돌, 갈등 관리 모드로 변하면서 남북, 한-중 관계 개선 기회가 열릴 수 있는데, 윤 대통령은 구태의연한 대결과 긴장을 조성하며 좌충우돌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미나
mina@hani.co.kr 권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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