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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정서적 내전’ 끝낼 분권형 개헌, 대통령이 나서야

등록 2023-09-03 07:30수정 2023-09-03 09:14

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496
대통령·차기주자 이해 엇갈려
36년간 헌법개정 번번이 실패
‘4년 중임제’ 최소개헌이 현실성
윤 대통령, 총선 직후 제안해야
윤석열 대통령이 8월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한덕수 국무총리와 함께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8월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한덕수 국무총리와 함께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히 선거된 대표로써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단기 4281년 7월 12일 대한민국 국회의장 이승만”

단기 4281년은 서기 1948년입니다. 헌법 부칙은 이렇게 끝납니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을 이에 공포한다. 단기 4281년 7월 17일 대한민국 국회의장 이승만”

우리나라 헌법은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히 선거된 대표로써 구성된 국회’가 제정하고, 국회의장이 공포했습니다. 헌법은 대통령을 국회에서 무기명 투표로 뽑도록 했습니다. 국회는 7월20일 이승만 국회의장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7월24일 중앙청 광장에서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독재·쿠데타·시민혁명의 결과

여기까지는 아름다운 역사였습니다. 그 뒤 헌법 개정의 역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독재, 쿠데타, 시민혁명으로 얼룩졌습니다. 지금까지 모두 아홉차례 개헌했습니다.

1차 개헌은 전쟁 중인 1952년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재선을 목적으로 밀어붙였습니다. 1950년 5월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하는 바람에 국회 선출로는 이승만 대통령 재선이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직선제 정부안과 내각책임제 국회안을 발췌, 혼합하여 발췌개헌안을 만들었습니다. 1952년 7월4일 경찰과 군대가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기립 방식으로 투표하여 개헌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야만의 시대였습니다.

1954년 2차 개헌은 이승만 대통령의 종신 집권을 위한 개헌이었습니다. 국회 본회의에서 정족수에 1표가 부족해 부결됐습니다. 다음날 “정족수를 사사오입하면 가결”이라고 우겨서 가결로 번복했습니다. 몰상식의 시대였습니다.

1960년 3차 개헌은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권력구조를 의원내각제로 바꾸는 개헌이었습니다. 4차 개헌은 3·15 부정선거 관련자 및 부정축재자들을 소급하여 처벌할 수 있도록 한 개헌이었습니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로 헌정이 중단됐습니다. 군정을 끝내고 민정으로 넘어가면서 1963년 5차 개헌이 이뤄졌습니다. 이때부터 개헌 국민투표를 했습니다. 투표율 85.3%, 찬성 78.8%였습니다. 1969년 6차 개헌은 박정희 대통령 3선을 위한 개헌이었습니다. 1972년 7차 개헌(10월 유신)은 박정희 독재를 강화하는 친위 쿠데타였습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로 헌정이 중단됐습니다. 8차 개헌으로 전두환 정권이 출범했습니다. 1987년 6월항쟁이 일어났습니다. 대통령직선제 9차 개헌이 이뤄졌습니다.

대통령 임기 말 개헌이 안 되는 이유

그리고 36년이 지났습니다. 36년은 매우 긴 시간입니다. 일제강점기가 36년이었습니다. 1948년 정부 수립부터 9차 개헌이 이뤄진 1987년까지 39년 걸렸습니다. 36년은 39년에 육박하는 시간입니다. 36년 동안 개헌이 없었던 이유가 뭘까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 자료사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 자료사진

첫째, 대통령의 임기 연장 시도나 쿠데타가 없었습니다.

둘째, 1987년에 도입한 5년 단임 대통령제가 그런대로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가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헌정 질서 안에서 이뤄진 정권교체였습니다.

셋째, 대통령과 대선주자들의 이해가 매번 엇갈렸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두번째 이유는 자명합니다. 세번째 이유는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개헌의 핵심은 권력구조입니다. 권력구조는 국민 대다수의 합의, 현실적으로는 대통령과 대선주자급 정치인들의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정국은 절묘했습니다.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하면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가운데 누가 대통령에 당선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불투명한 전망 덕분에 합의가 가능했고, 개헌이 이뤄졌습니다.

그런 절묘한 정국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1990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내각제에 합의했습니다. 김영삼이 파기했습니다. 1997년 김대중 김종필이 내각제에 합의했습니다. 김대중이 파기했습니다. 내각제 반대 여론이 압도적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 임기를 5년 단임에서 4년 연임으로 조정하는 ‘원 포인트 개헌’을 추진했습니다. 박근혜 의원이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반대해 무산시켰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개헌을 시도했지만, 당내 반대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 말 개헌 시도는 국정농단 의혹을 회피하려는 꼼수였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야당과 논의 없이 대통령 단독으로 개헌안을 발의했습니다. 국회는 여소야대였습니다. 투표 불성립으로 불발됐습니다.

이처럼 그동안 여러차례의 개헌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것은 여야가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대통령과 대선주자들의 이해가 엇갈렸기 때문입니다.

5년 단임 대통령의 권력은 당선자 기간이나 취임 직후에 가장 막강합니다. 개헌은 바로 이때 추진해야 가능합니다. 야당의 동의도 쉽게 끌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헌 논의가 시작되면 대통령은 갑자기 ‘레임덕’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역대 대통령들은 개헌보다 자신의 권력을 훨씬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대통령 임기 말에 추진하는 개헌은 대선주자들이 반대했습니다. 잘하면 자기가 곧 대통령이 될 것 같은데, 개헌에 찬성할 리가 있겠습니까? 36년 동안 개헌이 안 된 가장 큰 이유입니다.

제왕과 불행한 대통령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개헌이 왜 필요할까요? 개헌한다면 무엇을 고쳐야 할까요?

첫째,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정부의 임기를 맞춰야 합니다.

임기 4년인 국회의원 총선거와 전국 동시 지방선거는 2년마다 엇갈려 치릅니다. 대선은 5년마다 치릅니다. 너무 복잡합니다.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제로 바꿔 선거 시기를 맞춰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나라 정치에도 순환 주기가 생길 것입니다. 그래야 예측 가능한 정치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제왕적 대통령제를 분권형 대통령제로 바꿔야 합니다.

우리 헌법의 권력구조는 제왕적 대통령제입니다. 권한이 너무 큽니다. 대통령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여야는 매번 극한투쟁을 벌입니다. 대선이 끝나면 곧바로 다음 대선에 들어갑니다. 상대방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끊임없이 부추깁니다.

그 결과 정치 양극화가 점점 더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대선이 끝나면 절반의 유권자는 희망에 부풀고 나머지 절반의 유권자는 절망의 나락에 빠져듭니다. 국민 전체가 정서적으로 내전 상태입니다. 이대로는 살 수 없습니다. 멈춰야 합니다.

제왕적 대통령제에서는 퇴임한 대통령도 구조적으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통령제 그만해야 합니다. 그래도 의원내각제는 아직 안 됩니다. 반대 여론이 너무 높습니다. 당장은 분권형 대통령제가 정답입니다.

국무총리를 국회에서 선출하거나 추천하도록 해야 합니다. 감사원을 국회로 옮겨야 합니다. 권력을 대통령과 국회가 공유해야 합니다. 권력을 여당과 야당이 공유해야 합니다. 그래야 협치할 수 있습니다.

‘개헌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제대로 하자’는 주장은 ‘하지 말자’는 주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욕심을 내면 안 됩니다. 권력구조는 모범 답안이 없습니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다른 것이 당연합니다. 경로 의존성도 생각해야 합니다. 실현 가능한 개헌, 여야 합의가 가능한 ‘최소 개헌’을 해야 합니다.

2024년 4·10 22대 총선 전 개헌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민주당은 이미 총선 승리에 ‘올인 베팅’을 한 상태입니다. “총선 승리 천국, 총선 패배 지옥”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개헌은 영영 불가능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정치의 특징은 역동성입니다. 정국이 정치인이나 언론인들의 예측대로 흘러간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내년 총선 이후 개헌 논의가 순식간에 폭발할 수 있습니다.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오면 놓치지 말고 붙잡아야 합니다. 가장 현실성이 있는 시나리오는 윤석열 대통령의 개헌 제안입니다.

윤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를 1년 줄이고 4년 중임제로 개헌한 뒤 2026년에 전국 동시 지방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같이 치르자고 제안하면 됩니다. 윤 대통령의 제안에 민주당이 호응하면 개헌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합의가 이뤄지면 개헌 절차는 어렵지 않습니다. 국회 개헌특위에서 헌법개정안을 만들어 본회의에서 여야가 함께 의결한 뒤 국민투표를 하면 됩니다.

개헌에 성공하면 윤 대통령은 정치 개혁을 이룬 위대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개헌하지 않으면 역대 대통령처럼 불행해질 것입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국회 헌법개정 및 정치제도 개선 자문위원회와 한국정치학회, 한국공법학회, 한국헌법학회 주최로 9월4일부터 26일까지 수원, 춘천, 세종, 대구, 부산, 광주에서 ‘국민 공감 개헌 시민 공청회’가 열립니다. 개헌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을 듣는 자리입니다.

개헌해야 합니다. 개헌하면 대한민국은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정치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것입니다. 성공은 실천하는 자의 것입니다.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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