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중심’ 강조하다 검·변 반발 부르기도
사무직 범죄 엄단·대법원 구성 다양화 호응
사무직 범죄 엄단·대법원 구성 다양화 호응
이용훈 대법원장 취임 1돌 무엇이 바뀌었나
이용훈 대법원장의 지난 1년은 사법개혁의 주춧돌을 놓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사무직 범죄의 엄벌과 구속영장의 신중한 발부, 공판중심주의를 판사들에게 주문하는가 하면, 파격적인 대법관 인선과 법원 과거사 반성을 시도하는 등 이전 대법원장들과는 구분되는 면모를 보였다.
공판중심주의 강화=25일로 취임 1주년을 맞는 이 대법원장은 최근 지방법원을 돌면서 공판중심주의와 구술변론을 강조했다. 직설적인 화법으로 검찰과 대한변호사협회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그의 발언 취지는 상당한 공감을 얻었다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 평가다.
이 대법원장은 공판중심주의를 강화하면 단순히 “재판을 잘 하자”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 사법불신과 법조비리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 관계자는 “공개된 법정에서 모든 걸 드러내놓고 결정을 하게 되면 재판 과정을 국민들이 평가할 수 있다”며 “이렇게 되면 판사가 변호사를 사무실에서 만날 일도 없고 전관예우, 법조비리 문제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게 이 대법원장의 생각”이라고 전했다.
공판중심주의를 위한 토양은 상당 부분 마련돼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부는 주 2~3차례 열던 심리를 4~5차례로 늘리는 등 증인심문을 강화했다. 4월부터는 중요사건의 경우 재판부가 검찰, 변호인과 사전에 만나 쟁점을 정리하는 ‘계획심리 제도’도 도입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공판중심주의로 가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게 대체적인 지적이다. 서울 지역의 한 판사는 “공판중심주의는 판사가 일하는 곳이 집무실이냐, 법정이냐의 문제”라며 “증거조사를 통해 심증이 굳혀지면 법정에서 곧바로 판결을 해야하는 게 공판중심주의 취지에 맞지만, 아직도 판사들은 관행에 젖어 집무실에서 기록을 다시 보게 된다”고 말했다.
의심이 가시지 않았지만 일단 유죄 판결을 하고 양형을 깎아주는 타협적 판결도 여전하다고 한다. 서울 지역 법원의 고위관계자는 “유죄 판결을 해놓고 ‘피고인의 주장이 전혀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니다’라면서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의심이 가지만 검찰 조서에 얽매여 유죄를 선고하게 되는 경우인데, 증거 조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영장 신중 발부, 사무직 범죄 엄단=이 대법원장은 법원의 유전무죄식 양형과 무분별한 영장발부가 문제라는 생각을 전부터 해왔다고 한다. 지난 2월 두산그룹 총수 일가 집행유예 판결을 비판한 것도 “유전무죄 판결로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의 반영이었다. 이 발언은 재판권 침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창원지법이나 전주지법 등 일선에서 뇌물죄나 경제사범 등을 엄하게 처벌하는 양형 기준을 마련하는 성과를 이끌기도 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사무직 범죄를 온정적으로 처리해왔던 판사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법원의 구속·압수수색 영장의 무분별한 발부는 이 대법원장이 변호사 시절 인식하게 된 문제라고 한다. 변호사 비용을 마련하려고 한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기업체 압수수색이 이뤄지면 수사 끝까지 업무가 정지되는 상황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일선 반응은 엇갈린다. 강연을 들은 한 판사는 “과거 저녁 약속을 이유로 영장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도장을 찍었던 일을 반성하게 됐다”고 했다. 다른 판사는 “‘집행유예로 풀려날 사람을 왜 구속하느냐’고 하셨지만, 피해자와의 합의등을 생각하면 그런 사안도 구속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갈길 먼 과거사 반성=이 대법원장은 지난해 9월26일 취임사에서 사법부 과거사 청산을 약속했다. 그는 “국민께 끼친 심려와 상처에 대해 가슴깊이 반성한다”며 잘못된 재판 사례를 수집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1972~87년 사이 시국·공안 사건 판결문 6500여건을 모아 분석하고 있다.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보이지 않고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재심 사건이 대법원에 올라오면 이를 통해 사법부의 잘못된 판결을 시정하는 방식을 구상하고 있다”며 “언론과 정치권이 ‘정권과 코드 맞추기’라며 정쟁거리로 만들어놓아 운신의 폭이 좁아진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이 대법원장은 취임 1주년 기념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과거사 문제를 언급할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이 대법원장은 취임 후 대법관 8명을 제청하면서 보수일색이던 대법원의 색깔을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 10월 고위 법관 중심의 인선 관행을 벗어나, 40대의 노동법 전문가인 김지형 서울고법 부장판사와 2003년 대법관 제청 파문 때 옷을 벗었던 박시환 변호사를 제청하는 파격 인사를 단행했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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