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경제적 ‘독점의 해체’ 인권과 평등 실현 ‘선진사회’
6월항쟁 20돌 ‘시대정신’을 찾는다
지난해 진보 학계가 연출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최장집 고려대 교수와 박명림 연세대 교수의 논쟁이었다. 두 학자의 논쟁은 사제 간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우선 흥미로웠지만 대결의 내용 또한 만만찮게 흥미로웠다. 한국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가 대립 지점이었다. 박명림 교수는 ‘낡은 제도’에서 원인을 찾았고, 최장집 교수는 ‘제도의 운용 미숙’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논쟁의 바탕에는 노무현 정부 4년에 대한 절망에 가까운 인식이 깔려 있다. 1987년 6월항쟁을 한국 민주주의가 오랜 동면에서 기지개를 켠 기점으로 잡으면 20년, 김대중 정부로부터 치면 10년 가까이 민주주의 실험이 계속됐지만, 그 내용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더구나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와 달리 민주화 세력이 처음으로 의회권력을 장악해 명실공히 지배적 다수를 차지한 정부였다. 그런데도 한국 민주주의는 획기적으로 전진하기는커녕 되레 갈팡질팡하고 좌고우면하다 탈선의 위기에까지 몰렸다. 제도 자체가 문제냐, 제도운영이 문제냐는 질문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짙은 고민이 담긴 질문이었다.
그 논쟁의 결말은 아직 성급한 것이긴 하지만, 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민주주의 내용을 어떻게 채우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으로 모이는 듯하다. 민주주의 형식을 아무리 번듯하게 세운들, 그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 구성원의 삶의 질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속 빈 강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특히, 사회적 약자와 기층 민중을 포함한 국민 다수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분배의 정의를 실천하지 않는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형식적 민주주의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백낙청 서울대 교수가 지난해 내내 이야기한 ‘선진사회’의 내용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공동체적 결속 위에서 인권과 평등이 보편적으로 실현된 사회가 선진사회인 셈이다. 그런 선진사회가 ‘1인당 지디피(GDP) 3만 달러’ 따위의 통계학적 수치로 이루어질 수는 없을 터이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독점의 해체’라는 용어로 민주주의의 실체적 내용을 설명하기도 했다.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의 달성이 정치적 독점의 해체라면, 민주주의의 내용적 달성은 ‘경제적 독점’과 ‘사회적 독점’의 해체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경제적 독점의 해체는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는 일로 요약 가능하다. 또 사회적 독점의 해체는 인종·지역·성 차이를 가로질러 사회적 소수자의 차별을 극복하고 평등한 지위를 보장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선진사회론이든 독점해체론이든 민주주의의 내용을 얼마나 풍요롭게 가꿀 것이냐에 대한 숙고이자 반성이고 모색이다. 따라서 여전히 문제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다. <한겨레> 새해 대담에 함께한 박명림 교수는 ‘경쟁에서 연대로’를 강조했다.민주주의의 한 축인 ‘자유주의’가 경쟁의 원리에 무게를 두고 있다면, 다른 한 축인 ‘공화주의’는 사회 구성원의 연대에 관심을 집중한다. 자유주의만 있고 공화주의는 없는 민주주의는 바퀴 하나가 빠진 수레와 다를 바 없다. 민주주의는 연대와 함께할 때만 진정한 민주주의일 수 있다는 것을 박 교수는 지적한 셈이다. 박 교수와 대담한 김명인 교수는 ‘성찰적 행동주의’를 강조했다. 민주주의의 내용을 확보하는 일은 절차와 제도에 안주해서는 이룰 수 없다. 민주주의는 팔짱끼고 지켜만 보는 시민에게 저절로 굴러들어오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알맹이는 시민의 적극적 실천으로 일구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반성 없는 행동은 과도함과 편협함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에, 행동은 언제나 성찰이라는 브레이크를 동반해야 한다는 것이 김 교수의 논지였다. 말하자면, 성찰하는 행동으로 사회적 연대를 실현하는 것이 2007년 한국 사회에 던져진 ‘시대정신’의 한 요구일 것이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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