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을 직접 표를 찍어 뽑고 싶어도 몸이 불편해 투표소에 갈 수 없는 인영철(84)씨가 19일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에서 선거 안내문이 담긴 우편물을 만져보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회사쪽 기본권 침해 불구 투표일에도 정상출근
장애인·쪽방촌 독거노인 움직일 수 없어서 포기
“공장·역 기표소 설치…어디서든 투표 가능해야”
장애인·쪽방촌 독거노인 움직일 수 없어서 포기
“공장·역 기표소 설치…어디서든 투표 가능해야”
투표 못한 사람들
17대 대통령 선거 투표율이 역대 대선 중 가장 낮은 62.9%를 기록했다. 정치 무관심을 탓하기도 하지만, 정작 투표를 하고 싶어도 못한 유권자들도 적지 않았다.
■ 일에 치여=임시 공휴일인데도 일 때문에 소중한 한 표를 던지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투표를 하지 못하게 하는 사업주를 2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하도록 한 근로기준법은 여전히 죽은 법이었다.
봉제업을 하는 김아무개(40·서울 봉천동)씨는 19일 “아침 8시까지 출근하는데, 새벽에 더 일찍 일어나 줄을 설 시간이 없었다”며 “어제 사장님이 ‘하루 쉬자’고 말하길 기다렸지만 아무 말이 없어 야속했다”고 말했다. 서울 신사동에서 청소 용역일을 하는 강아무개(60·여·서울 시흥동)씨도 이날 “아침 6시 반까지 출근해야 해 어제 현장 소장한테 ‘투표일에 쉬면 안 되냐’고 물었는데, ‘정상 출근하라’는 답만 들었다”고 말했다.
24시간 교대로 일하는 아파트 경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현저동 ㄱ아파트에서 경비 일을 하는 김아무개(62)씨는 “새벽 5시에 나와 투표할 시간이 없었다”며 “투표하고 온다고 좀 늦게 교대하자는 말은 꺼내기 힘들다”고 말했다.
상당수 정규직 노동자도 비슷한 일을 당했다. ㅎ택배에서 일하는 장아무개(48)씨는 “회사에서 ‘출근이 늦어지더라도 필히 투표하고 나올 것’이라고 공문이 내려왔지만, 늦게 나오면 그만큼 일이 늦게 끝나는데 누가 그러겠느냐”고 말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기관사 김아무개(50)씨도 “1시간20분 걸리는 출근은 아침 7시40분까지 해야 하고, 퇴근도 오후 4시40분이어서 투표할 수가 없었다”며 “매번 투표일마다 비번이나 오후 근무자를 제외한 기관사 30% 정도는 투표를 못한다”고 말했다.
19일로 파업 180일째를 맞은 이랜드그룹 노조 간부 6명은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여서 투표소로 갈 수 없었다.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인 박양수 뉴코아노조위원장은 “국민의 기본적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게 돼 안타깝다”고 말했다.
■ 움직일 수가 없어서=1급 지체장애인 서주관(46)씨는 “우리처럼 손을 못 움직이는 사람들은 활동보조인이 기표를 대신해줘야 하는데, 투표 참관인들은 여전히 가족만 대신 기표할 수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
쪽방촌에서도 힘든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이들의 투표 포기가 잇따랐다.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뒷편 쪽방촌에 사는 100여명 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하는 독거 노인들은 차가운 방을 지켜야만 했다. 두달 전 폐지를 수집하다 허리를 다친 인영철(84)씨는 “복지관 같은 곳에서 나와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을 투표소까지 데려다준다고 하던데, 이곳엔 그마저도 없다”고 말했다.
주민등록이 말소된 채 10년 가까이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는 위명환(55)씨는 “마음 속으로 밀어주고 싶은 후보가 있어도 정작 투표날이 되면 다른 세상 이야기라는 생각에 더 주눅이 든다”고 말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선관위가 찾아가는 서비스로 공장, 백화점, 역 등에 기표소를 설치하고 인터넷을 이용해 어디를 가도 손쉽게 투표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문숙 민주노총 대변인은 “건설 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 등이 참정권을 박탈당하지 않게 유급 휴일을 보장하거나 건설 현장 등에 투표소를 설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훈 황보연 김연기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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