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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민주화·정권교체 ‘빛’ 뒤 3김정치 ‘그림자’

등록 2009-08-22 11:40수정 2009-08-22 11:45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기수였지만 정당정치의 측면에선 그늘도 짙었다. ‘3김’으로 표현되는 지역정치, 제왕적 보스정치의 주역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의 민주당 총재직 사퇴는 ‘3김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2001년 11월8일 당시 심재권 민주당 총재비서실장(오른쪽 사진 왼쪽 네번째)이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열린 당무회의에서 김 전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 내용이 담긴 편지를 읽고 있다. 김 전 대통령(왼쪽 사진)이 다음날 총재직 사퇴를 철회해 달라는 민주당 당무위원회의 결의를 거절한 뒤, 존 틸럴리 전 주한미군사령관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이정우 기자 <A href="mailto:woo@hani.co.kr">woo@hani.co.kr</A>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기수였지만 정당정치의 측면에선 그늘도 짙었다. ‘3김’으로 표현되는 지역정치, 제왕적 보스정치의 주역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의 민주당 총재직 사퇴는 ‘3김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2001년 11월8일 당시 심재권 민주당 총재비서실장(오른쪽 사진 왼쪽 네번째)이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열린 당무회의에서 김 전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 내용이 담긴 편지를 읽고 있다. 김 전 대통령(왼쪽 사진)이 다음날 총재직 사퇴를 철회해 달라는 민주당 당무위원회의 결의를 거절한 뒤, 존 틸럴리 전 주한미군사령관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이정우 기자 woo@hani.co.kr
[되돌아본 DJ]
반독재 민주화운동 아시아권에도 파급효과 커
50년만의 첫 수평적 정권교체로 민주주의 진전
집권뒤 정체성 논란…지역편중인사 시비 휘말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 정치사의 으뜸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삶의 궤적과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분리해 기술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존재는 컸다. 그러나 현실 정치인으로서의 행적 곳곳에 ‘3김 정치’의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 있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국민들이 군사독재에 시달리던 시절 민주화를 위해 몸을 던져 희망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그는 1972년 10월18일 박정희 정권이 유신과 계엄령을 선포하자 신병치료차 머물던 일본 도쿄에서 곧바로 유신반대 첫 성명을 발표한다. 이어 미국 워싱턴에서 유신헌법 처리 국민투표 무효선언을 발표한 것을 비롯해 망명객 신분으로 해외에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1973년 8월 ‘도쿄 납치 살해 미수사건’으로 귀국하자마자,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당한다. 그러나 그는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하며, 1976년에는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인사들과 함께 3·1 민주구국선언을 주도한다.

이 시절 그는 군사정권에 의해 가장 위험한 인물로 지목됐다. 숱한 투옥, 망명, 연금을 당하며 1980년에는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도 받았다. 그 시절에는 김대중이란 이름조차 언론에 보도될 수 없었다. ‘재야 인사’ ‘동교동’으로 불려야 했다.

국민들과 함께 벌인 민주화운동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은 상당한 결실을 일궈낸다. 1987년 6월항쟁을 거쳐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냄으로써 전두환 군사정권의 연장을 차단한 것이다. 황태연 동국대 교수(정치학)는 “민주화운동을 김 전 대통령 혼자 한 것은 아니었지만 군사독재의 탄압이 김 전 대통령한테 집중되었기 때문에, 그는 선두에 서서 목숨을 거는 형태로 훨씬 강도 높게 싸워야 했다”고 말했다.

이 시기 민주화의 진전은 국제적 의미도 있었다. 한국이 민주화된 이후 다른 아시아 나라들도 더이상 독재로 회귀하지 못하는 등 아시아권에서의 파급효과가 컸다. 서구 언론들은 김 전 대통령을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로 부르며, 아시아 민주인권 지도자로서 그의 존재감을 평가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씨가 1976년 명동성당에서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뒤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다시, 김대중을 위하여>(김옥두 전 민주당 의원)
김대중 전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씨가 1976년 명동성당에서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뒤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다시, 김대중을 위하여>(김옥두 전 민주당 의원)

1997년 대선 승리는 50년만의 첫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정치사적 의미가 컸다. 권력을 평화적으로 넘겨주고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민주주의의 진전을 의미했다. 특히 진보 또는 리버럴 정치세력으로의 정권교체는 유럽 나라들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정권교체를 통해 국가권력을 담당하는 세력의 질적 전환이 이뤄졌다는 점도 중요했다. 김영삼 정부의 출범이 군사정권 세력과의 연합을 통한 변형 집권이었던 것과 달리, 국민의 정부 출범은 민주화운동의 맥을 좀더 적극적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조희연 교수(성공회대 사회학)는 “1961년 이래 30여년에 걸쳐 반독재 민주화운동 세력이 제기했던 의제들이 국가정책 의제로 실천하는 일이 비로소 가능해졌다”고 평가했다.

국가인권위원회를 설치하거나 여성부 신설 등을 이런 맥락에서 꼽을 수 있다. 국가인권위 설치는 선례가 세계 몇 나라 되지 않는 일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했으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대선 때 공약한 대로 합법화됐다.

국민의 정부 당시에는 이러한 민주화 조처들이 크게 체감되지 않았다. 당시로선 워낙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까닭이었다. 또한 국제통화기금 위기를 극복한다거나, 남북 정상회담 등의 다른 거대 쟁점들이 많았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의 집권기간중 ‘조급증’과 ‘제한된 민주화’의 한계 등도 분명했다. 개혁의 대상이어야 할 재벌과 관료가 신자유주의 구조 개혁의 전도사로 부활했다. 경제민주화의 호기를 놓쳤다는 비판을 받을 만 했다.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형성해나가는 데 있어서의 미숙함도 나타났다. 인사문제를 두고선 첫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구여권 출신인 김중권씨를 기용한 것을 두고 정권의 정체성 논란을 빚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선 호남 편중 인사 시비가 벌어졌다. 정권이 박정희 기념사업 지원에 적극 나선 것을 두고도 찬반 논란이 격렬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긴 했지만 본격적인 과거사 진상 규명은 다음 정부로 미뤄졌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도 인권단체들이 전향적 조처를 꾸준히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창식 선임기자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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