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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대결서 협력으로…남북관계 새 역사를 쓰다

등록 2009-08-20 14:21

<b>대결·반목에서 화해·협력으로</b>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6월14일 평양 목란관에서 남북공동선언에 합의한 뒤 손을 맞잡아 들어올리며 밝게 웃고 있다. 평양/청와대사진기자단
대결·반목에서 화해·협력으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6월14일 평양 목란관에서 남북공동선언에 합의한 뒤 손을 맞잡아 들어올리며 밝게 웃고 있다. 평양/청와대사진기자단
[되돌아본 DJ] ① 통일·외교
‘6·15공동선언’ 통일방향 큰틀·경협 토대 마련
김정일 “DJ는 북남관계 돌파구 연 투사”평가
거목의 잎새는 무성했고 가지는 굵었으며 뿌리는 깊었다. 민주화·인권의 상징으로 우뚝 섰지만 3김정치, 지역주의의 굴레도 둘러썼다. 노벨상의 영광을 안긴 햇볕정책엔 퍼주기 비판도 뒤따랐다. 구제금융을 극복하고 복지의 터전을 닦았다는 칭송과 양극화의 그늘을 짙게 했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우리 사회에 두루 남긴 족적의 명암과 과제를 분야별로 네 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2009년으로 분단 64년에 이른 남북관계 역사는 6·15 정상회담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야 할 것이다. 원로 언론인 리영희 전 한양대 명예교수가 지적했듯이 2000년 6월15일 이전의 한반도와 그날 이후의 한반도는 이미 같은 한반도가 아니었다. 남과 북은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한반도의 역사를 새로 쓰기 시작했다. 이 정상회담은 김대중 대통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뉴욕 타임스>는 당시 이렇게 썼다. “그의 위상은 ‘근대 한국역사의 거대한 변화의 힘’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 확실하다.”

두 정상이 합의한 6·15 공동선언은 말 그대로 남북관계의 전환점이자 새로운 남북관계를 위한 출발점이었다.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 해결 원칙이 천명됐고, 통일의 방향에 대한 큰 틀의 합의가 마련됐다. 또 분단의 아픈 상처인 이산가족 문제를 치유하고 경의선·동해선 철도·도로 연결, 개성공단 착공 등 남북 경제협력의 토대가 마련됐다. 그런 점에서 김 전 대통령은 남북관계를 대결과 반목에서 화해와 협력으로 전환함으로써 통일을 향한 대장정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될 수 있다.

6·15 공동선언은 30여년에 걸쳐 온갖 음해와 박해를 감수하며 지켜온 그의 오랜 신념이 결실을 맺은 것이기도 하다. 1971년 대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절대 권력에 도전장을 내민 김대중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통일정책은 ‘폐쇄 전쟁지향’에서 ‘적극 평화지향’으로 가자는 것이다.” “때려잡자 김일성, 물리치자 공산당”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용공·좌익·친북이라는 딱지가 평생 그를 괴롭혔다.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냉전적 대결과 반목 그리고 불신의 최대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 점에서 남북의 화해와 협력은 그 자신을 옭아매던 이념과 현실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26년 뒤인 1997년 12월19일 이번엔 대통령 당선자로 첫 기자회견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그리고 대통령으로서 1971년 이래 견지해온 통일의 철학을 햇볕정책에 담았다. 2000년 3월9일 베를린자유대학 연설에는 햇볕정책의 핵심이 담겨 있다. “첫째, 북한의 무력도발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며, 둘째 우리도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통일을 추구하지 않으며, 셋째 남북이 화해 협력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햇볕정책의 핵심이며 냉전 종식을 위한 주장입니다.” 그는 이 연설에서 “이제 한국의 민주화는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한반도의 통일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베를린 연설을 거치며 북한은 정상회담에 최종 합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은 김 대통령에게는 △남북대결 반대 △유엔 동시가입 △평화공존 △평화통일의 일관된 통일 철학을 북쪽에 관철한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2000년 6월15일 환송오찬에서 “앞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북남관계의 돌파구를 연 투사로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언론인 겸 역사학자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한 인터뷰에서 김 전 대통령을 “비반미적 민족자주, 비용공적 평화통일, 비폭력적 민주회복론을 제시하고 실천”한 것으로 평가했다. 예컨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을 강조할 만큼, 그는 ‘비반미적 민족주의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9년 한반도는 다시금 수구 냉전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햇볕정책의 옥동자로 불려 온 금강산 관광은 중단된 채 기약이 없고, 남북협력의 미래를 상징해 온 개성공단은 위태롭다. 지난 10여년 쌓아온 화해 협력과 평화 번영의 남북관계 대신 날카로운 군사적 대결의 긴장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는 노구를 이끌고 이에 맞섰다.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12월10일 노벨 평화상 수상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벨상은 영광인 동시에 무한한 책임의 시작입니다. 저는 역사상의 위대한 승자들이 가르치고 알프레드 노벨경이 우리에게 바라는 대로 나머지 인생을 바쳐 한국과 세계의 인권과 평화, 그리고 우리 민족의 화해 협력을 위해 노력할 것임을 맹세합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행동하는 양심’을 외치며 ‘무한한 책임’의 이 맹세를 지킨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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