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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18대 대통령에 대한 실망·분노, 이미 예고되어 있다

등록 2012-12-14 20:40수정 2012-12-15 16:53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14일 오전 경남 진주시 장대동 진주중앙시장을 찾아 손을 흔들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진주/공동취재사진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14일 오전 경남 진주시 장대동 진주중앙시장을 찾아 손을 흔들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진주/공동취재사진
[토요판] 르포 2
성한용 선임기자의 여섯번째 대선
거인들이 사라진 시대, 극적 변신은 계속되고…
벌써 여섯번째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뒤 여섯번째로 임기 5년의 대통령을 뽑는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그리고…. 지금 대선 현장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후보와 유권자들은 변화하는 것일까? 민주주의는 진화하는 것일까? 정치부 성한용 선임기자는 1987년 대선 2년 전인 1985년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그가 직접 경험한 여섯번의 선거 이야기를 2012년 대선 현장에서 들려준다.

12월10일(D-9) 월요일: 후보들

 싸늘하다. 케이비에스 스튜디오에 먼저 들어온 문재인 후보와 이정희 후보는 긴장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다. 내부 폐회로텔레비전을 통해 토론 시작 전 후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이채롭다. 벌써 두번째 법정토론회다. 오늘도 이정희 후보가 박근혜 후보를 몰아붙일까? 첫번째 토론에서 박근혜 후보의 얼굴 근육이 약간 흔들리던 장면이 떠올랐다.

 화장실에 갔던 박근혜 후보가 뒤늦게 입장했다. 문재인, 이정희 후보와 차례로 악수를 나눈다. 웃는다. 속으로도 웃고 있을까? 박근혜 후보는 가방을 가지고 자리에 앉았다. 1차 토론 때는 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이 가방을 보좌진에게 맡기도록 했는데 이번에는 그냥 두었다. 박근혜 후보가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이다.(토론이 끝난 뒤 이 가방 안에 아이패드가 들어 있었다는 등 ‘커닝 논란’이 한때 벌어졌다.) 세 사람은 사진기자들을 위해 포즈를 취했다. 이정희 후보가 가운데다. 손을 잡아 달라는 기자들의 요청에 두 여성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손을 잡았다. 꼬집고 싶지는 않을까? 문재인 후보의 미소는 어딘지 어색한 구석이 있다.

 토론이 시작됐다. 위기관리 역량을 묻는 질문에 대해 문재인 후보는 엉뚱하게 통합의 리더십을 얘기했다. 처음부터 동문서답이다. 그래도 이날 토론은 꽤 짜임새 있게 진행됐다. 이정희 후보도 자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박근혜 후보는 ‘지하경제 활성화’를 비롯해 몇 가지 실수를 했다. 말도 약간 더듬었다. 문재인 후보는 후반부에 토론을 매우 잘했다. 2차 토론 이후 두 사람의 지지율 격차가 줄기 시작했다.

 이번 대선은 박근혜와 문재인의 격돌이다. 그런데 후보들이 별로 매력이 없다. 박정희의 딸과 노무현의 비서실장이 그리 좋은 경력은 아니다. 업적도 비전도 부족해 보인다. 더구나 대한민국 대통령직은 더이상 무소불위가 아니다. 국회보다 훨씬 힘이 약하다. 온갖 공약을 내놓았지만 국회가 동의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정당을 장악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유권자들은 새 대통령이 뭔가를 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18대 대통령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이미 예고되어 있다.

 1987년 이후 대선 출마자들은 대부분 화려한 경력의 정치인들이었다. 카리스마가 강했다. 언론은 얼마 전까지 대통령 권력을 ‘대권’이라고 불렀다. 후보들을 용으로 묘사했다. 용은 조선시대 왕의 상징이다.

 87년 첫번째 대선에 나선 김영삼, 김대중 후보는 야당에서 박정희 정권과 싸우며 잔뼈가 굵은 대중 정치인들이었다. 국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두 사람이 단일화를 하면 노태우 후보를 이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끝까지 후보를 양보하지 않았다. 김대중 후보의 동교동에선 ‘4자필승론’이 나왔다. 궤변이었다. 양김씨는 예상대로 졌다. 28살 3년차 기자이던 나는 그때 큰 정치인들이 나보다 멍청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걸출한 정치인이었지만 그가 97년 대선에서 당선된 것은 기적이었다. 김대중-김종필 연합이 이뤄진 것도 기적이었고, 이인제 후보 출마로 여당 지지층이 분열한 것도 기적이었다. 외환위기만 없었어도 김대중 후보의 당선은 불가능했다. 2002년 노무현 후보의 당선은 각본 없는 드라마였다. 노무현이라는 매력적인 정치인 때문에 그런 드라마가 가능했다. 사람들은 새로운 정치를 열망하고 있었다. 정치적 역량을 기준으로 볼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을 고비로 대선 후보는 갈수록 작아지는 추세다. 거인들이 사라져 간다는 얘기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퇴화다.

 그래도 박근혜 후보는 매우 특별한 정치인이다. 어릴 때부터 대통령의 딸이었다. 품위, 카리스마, 독기가 적절히 뒤섞여 있다. 지금까지 몇 차례 인터뷰, 토론, 식사 등 자리에서 대화를 나눴다. 나보다 일곱살 위인 그는 늘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독재자의 딸’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아버지 후광에 기대지 말고 정치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얼마 뒤 박근혜 후보는 “기사 잘 봤다”고 했을 뿐 화를 내지는 않았다.

 주위 정치인들에게 박근혜 후보는 매우 차갑다. 정치인들이 자신을 돕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긴다. ‘고마워할 줄 모른다’는 불만은 주로 친박 의원들에게서 나온다. 2007년 경선을 앞두고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이명박 후보를 선택하자 박근혜 후보는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두 손을 허리에 올리고 “그럴 수가 있느냐”고 퍼부었다. 현장을 목격한 다른 정치인들은 혀를 내둘렀다.

 정책적 역량은 얼마나 될까? 2007년 경선을 앞두고 여의도 경선 캠프에서 인터뷰를 했다. ‘줄푸세’의 타당성에 대해 질문을 했다. 세금을 줄이면 복지예산을 도대체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느냐고 따졌다. ‘세금을 줄이면 기업이 투자를 늘려 사업이 잘되고 장기적으로는 세수가 늘게 된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그런 주장은 2008년 금융위기로 허구임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아직 그에 대한 반성이나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열심히 정책을 공부했다고 하는데 토론을 보면 뭘 공부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이명박 정부의 정책 기조를 크게 바꾸지 않을 것 같다.

 문재인 후보는 본래 정치를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2011년 6월 <문재인의 운명>이라는 책을 냈을 때 인터뷰를 한 일이 있다. 왜 정치를 피하느냐고 물었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라는 대답이 나왔다. 매우 솔직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지난 11월18일 의원회관에서 인터뷰를 할 때 그 대목을 거론하면서 생각이 바뀐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문재인 후보는 “그런 부분이 다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가진 힘이라도 보태야 한다는 간절함과 절박감 때문”이라고 했다.

 문재인 후보는 2009년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발표할 때 매우 침착했다. 시간이 지나서 어떻게 그렇게 냉정을 유지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난 10월 <한겨레> 이수윤 기자가 간암으로 숨지기 직전 병원을 찾은 문재인 후보는 병실을 나선 뒤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는 <한겨레> 창간 당시 부산지사장이었고, 이수윤 기자는 주재기자였다. 문재인 후보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대통령 후보로서 정치적, 정책적 역량은 어떨까? 부족하다고 봐야 한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매력을 물려받지 못했다. 요즘 그의 참모들에게 “왜 막판 ‘한 방’이 없느냐”고 여러차례 물었다. 그의 참모들은 “본래 없는 걸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항변했다. 당선되면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달라지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다행인 것은 그에게 역사의식이 있고 동시에 ‘디테일’이 강하다는 것이다.

 대선 후보의 총체적 역량은 인터뷰나 패널 토론을 해보면 대략 알 수 있다. 정치인이라면 현안에 대해 첫번째 답변은 늘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이유를 파고드는 두번째, 세번째 질문을 계속 던지면 실력이 드러난다.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대선 후보 연쇄 인터뷰를 했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수없이 쏟아지는 보충질문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답변했다. 경제에 관해서는 김원길 정책위의장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전문가들도 김대중 후보의 식견과 안목을 인정했다.

 동일한 방식으로 이회창 후보를 인터뷰했다. 대법관 출신답게 논리적으로 답변을 이어갔다. 하지만 김대중 후보가 보여줬던 폭과 깊이를 따라가지는 못했다. 그 차이가 1997년 대선 승부를 가른 것은 아닐까?

 올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후보의 <한겨레> 인터뷰는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그의 주변 참모들 중에 ‘조중동’만 챙기면 된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쉽다.

이정희 후보가 가운데 있다
손을 잡아달라는 요청에
두 여성은 가볍게 손을 잡았다
꼬집고 싶지는 않을까?
문 후보의 미소는 어색하다 

박 후보 인터뷰 자리에서 나온
원론적인 ‘줄푸세’ 논리는
1년 뒤 허구로 드러났다
직접 만난 문 후보는 솔직했지만
노무현의 매력은 갖지 못했다
다만 역사의식과 디테일이 있다

 

12월11일(D-8) 화요일: 유세·유권자

 저녁 6시 박근혜 후보의 유세가 예정되어 있는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는 온통 붉은 물결이었다. 이곳은 박근혜 후보가 지난 7월10일 대선 출마선언을 한 장소였다. 영하 10도의 냉기와 칼바람을 무릅쓰고 50~60대 나이든 사람들이 자꾸 모여들었다. 붉은색 겨울 점퍼를 입거나 붉은색 목도리를 두른 사람들은 동원된 사람들로 보였다. 형광막대도 붉은색이었다. 단상의 진행요원들은 붉은색 산타 모자를 썼다.

 최병서, 김흥국, 지상욱, 장윤창, 박일준, 현철, 변웅전, 정몽준, 이자스민, 송재호, 최홍만 등 유명인들이 차례차례 소개됐다. 청중들은 트로트 음악에 맞춰 태극기를 흔들거나 춤을 췄다. 광장 한켠에서는 ‘육영수 여사의 삶을 그린 만화’를 팔았다. 옆길에는 ‘엔엘엘 수호 국민문화제’ ‘종북좌파 척결’ 등 구호를 쓴 트럭이 지나다녔다.

 비슷한 시각 경기도 안산 중앙역 로데오 거리 공영주차장에서는 문재인 후보 유세가 열렸다. 민주통합당 일부 당직자들이 노란색 점퍼를 입거나 노란 목도리를 둘렀지만 수가 많지 않아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민주당에서는 무한궤도의 ‘그대에게’, 정수라의 ‘환희’를 유세의 배경음악으로 사용한다. 행사 진행요원들이 미리 흥을 돋우려 했지만 추운 날씨 때문인지 청중이 별로 모이지 않았다.

 문재인 후보가 등장하자 순식간에 사람이 불어났다. 청중들은 30~40대가 많았다. 한쌍의 남녀가 실랑이를 벌였다. 남자는 “날씨도 추운데 그냥 가자”고 했지만, 여자는 “보고 가자”고 했다. 문재인 후보는 “박근혜 후보가 되면 정권교대, 저 문재인이 돼야 정권교체다. 가짜 정권교체 말고 진짜 정권교체를 안산시민들께서 해주시겠는가”라고 기염을 토했다. 청중은 함성으로 화답했다.

 박근혜, 문재인 후보는 전국을 돌며 유세를 하고 있다. 대개는 수백명에서 수천명 규모로 청중이 몰린다. 유세는 후보가 유권자들을 직접 찾아간다는 정치적 의미가 있다. 따라서 앞으로도 유세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유권자는 4천만명이 넘는다. 후보의 유세는 상징적인 의미를 넘어서기 어렵다.

 유권자가 대선 후보를 평가하려면 텔레비전 토론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유세 일정을 핑계로 문재인 후보와의 맞짱토론을 피했다. 유세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토론을 하면 할수록 손해라고 판단해서다. 박근혜 후보의 참모들도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1987년과 1992년 대선은 유세가 선거의 중심을 차지했다. 당시에는 텔레비전 토론이 없었다. 87년 선거에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세 후보는 여의도 광장에서 대규모 유세로 세 대결을 벌였다. 11월29일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 유세에 몰려든 ‘사상 최대 인파’는 130만명이었다. 주최 쪽은 500만명, 경찰은 50만명이라고 추산했다. 어쨌든 유세에 100만명 이상 몰려든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과거의 규모는 수십만명 수준이었다.

 이에 질세라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후보도 12월5일 여의도 광장에서 130만명을 모아 놓고 유세를 했다.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의 12월12일 유세에는 무려 150만명이 몰렸다. 광장에 다 들어가지 못해 마포대교에서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노태우 후보의 여의도 유세에는 공무원, 공기업체 직원, 은행 직원 등 정부의 영향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상사에게 눈도장을 찍으러 여의도까지 나온 젊은 사람들의 참담한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물론 민정당 당원들도 대거 동원되었다. 유세장 한켠에서 사람들에게 일당을 나눠주던 조직책은 내가 신분을 밝히고 접근하자 도망을 쳤다. 한심한 시절이었다.

 김대중 후보는 선거 사흘 전인 12월13일 보라매공원에서 또다시 대규모 유세를 시도했다. 200만명 안팎의 엄청난 군중이 모여들었다. 김대중 후보는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결과는 3등이었다.

 1992년 대선에서 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텔레비전 토론을 집요하게 요청했다. 김영삼 후보는 토론을 극구 회피했다. 지지율은 앞서 있었고 토론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후보는 보라매공원에서 대규모 유세로 반전을 시도했지만 영남 전역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은 김영삼 후보를 이길 수 없었다.

 1997년 대선부터는 텔레비전 토론이 시작되면서 대규모 유세가 사라졌다. 2002년, 2007년에도 텔레비전 토론이 선거의 중심이었다. 선거의 진화였다. 그러나 이번 2012 대선에서는 법정토론회를 제외하고 후보간 텔레비전 토론이 사라졌다. 진화는 가끔 거꾸로 간다.

 텔레비전 토론이 활성화되는 것과 선거판에서 검은돈이 사라져 가는 것은 긴밀한 관련이 있다. 대규모 유세에는 엄청난 액수의 현금이 들어간다. 1987년, 1992년까지 여당 후보는 수천억원, 야당 후보는 수백억원씩의 돈을 썼다. 정확한 액수는 아무도 모른다. 장부에 적어 놓고 쓰는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가성만 없으면 정치자금을 주고받는 것은 죄가 안 되던 시절이다. 선관위 국고보조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각성으로 선거판의 검은돈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2002년 이회창 후보의 측근들이 대기업으로부터 800억원대의 현금을 차떼기로 넘겨받았던 이른바 ‘차떼기’ 사건이 대형 정치자금 스캔들로는 마지막이었다.

 대선에서 유권자들의 의식도 크게 변화했다. 무엇보다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이 조금씩 낮아지고 있다. 1987년 89.2%의 투표율이 2007년 63.0%까지 떨어졌다. 이제는 너무 낮아서 문제다. 유권자들의 지나친 정치혐오증은 기득권 세력의 영구집권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그래도 선거 뒤 남게 되는 유권자들의 상처는 지금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박근혜 후보는 ‘100% 대한민국’, 문재인 후보는 ‘대통합’을 주장한다. 그러나 지금 유권자들은 반씩 양쪽으로 갈려 있다. 박근혜 후보 지지자들에게 문재인 후보의 당선은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반대로 정권교체를 희망하는 유권자들에게 박근혜 후보의 당선은 ‘재앙’이다.

 갈등과 대립은 정치의 본질적 요소지만, 선거 결과에 대한 승복과 소수자 배려가 전제되지 않으면 민주주의 시스템은 유지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아직 우리 유권자들은 충분히 진화하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많은 사람들이 화병에 걸릴 것이다. 벌써부터 걱정이다.

 1987년 양김씨의 분열로 정권을 놓친 야당 지지자들은 울화통이 터져 욕을 해댔다. 노태우 당선자를 욕한 것이 아니라 김영삼 지지자들은 김대중을, 김대중 지지자들은 김영삼을 욕했다.

 1992년 투표 다음날 새벽 <한겨레> 가까이에서 국밥집을 하던 전라도 아주머니는 손님들에게 “아무거나 그냥 가져다 드쇼. 우리 선생님 불쌍해서 어떻게 사나”라고 눈물을 흘렸다. 세대투표 현상이 처음 나타난 2002년엔 50대 이상 유권자들이 마음을 다쳤다. 투표 다음날 젊은 세대는 축배를 들었지만, 늙은 세대는 낮부터 홧술을 마셨다.

 정책 선거가 안 되고 있다는 문제점도 여전하다. 책임은 일차적으로 후보와 정당에 있지만 유권자 몫이 더 크다. 유권자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하는 계급투표가 정착되면 후보와 정당도 정책 선거에 주력할 수밖에 없다. 많은 유권자들이 아직도 지역과 연고에 따라 투표한다.

 돈으로 유권자를 매수하는 행태는 사라졌다. 이번 대선은 후보와 정당이 조직적으로 돈을 뿌리지 않은 첫 선거가 될 것 같다. 유권자들도 누가 돈을 주면 이제는 선관위에 신고한다. 유권자들의 정치의식도 높아졌지만 상벌제도 정비로 새로운 문화가 정착하고 있다. 대단한 발전이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14일 오후 경남 창원시 상남분수광장 유세에서 환호하는 시민과 지지자들과 인사를 하고 있다. 창원/공동취재사진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14일 오후 경남 창원시 상남분수광장 유세에서 환호하는 시민과 지지자들과 인사를 하고 있다. 창원/공동취재사진
12월12일(D-7) 수요일: 정치인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가 문재인 후보 지지 의사를 밝혔다. 페이스북을 통해서다.

 “아버지의 민주화에 대한 지금까지의 열정이 역사에 욕되지 않기 위해 이번 선거는 민주세력이 이겨야 합니다.”

 2012년 대선에서 흥미로운 포인트는 정치인들의 진영 이동이다. 김덕룡, 문정수 등 김영삼의 사람들이 문재인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반대로 한화갑, 한광옥, 김경재 등 김대중의 사람들은 박근혜 후보에게 갔다. 정운찬, 이수성 전 총리는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대선에서 정치인들의 변신은 늘 있었지만 이번처럼 극적인 경우는 많지 않았다.

 현철씨는 얼마 전까지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을 했던 사람이다. 새누리당에서는 현철씨의 행동을 “공천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김덕룡 전 의원은 금품수수 사건이 터졌을 때 박근혜 후보가 감싸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 같다. 두 사람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뜻에 반해 움직일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바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박근혜 후보의 당선을 원치 않고 있다고 봐야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의 정적이었다.

 한광옥, 한화갑 등 동교동 사람들의 처신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광옥 전 대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다. 그전엔 1997년 디제이피 후보 단일화 협상에서 국민회의 책임자였다. 한화갑 전 대표는 권노갑 전 의원과 함께 동교동의 ‘양갑’으로 불렸다. 별명이 ‘리틀 디제이’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오랫동안 취재했던 기자의 시각에서 두 사람의 이번 변신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두 사람 모두 박근혜 후보 지지의 명분을 통합에서 찾았다. 그럴 것이다. 진짜 다른 이유는 없을까? 박근혜 후보가 집요하게 공을 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다른 이유도 있다고 한다. 그게 뭔지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정치인의 속은 참 알 수가 없다. 이런 현상을 진화로 봐야 할까, 퇴화로 봐야 할까? 헷갈린다.

 이와 별도로 2012 대선의 한복판에는 특별한 정치인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박근혜 캠프의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이다. 그는 박근혜 후보에게 몇 차례 모욕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다. 결별을 결심했지만 실행하지 못했다. 박근혜 후보의 낙선과 그로 인한 비난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아직도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경제민주화를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의 소망은 이뤄질 수 있을까?

 문재인 캠프의 윤여준 국민통합위원장도 연구대상이다. ‘합리적 보수주의자’로 불리는 윤 위원장은 텔레비전 찬조 연설에서 잔잔한 어조로 “지금 유력한 후보 두 분 중 문재인 후보가 민주주의를 더 잘 실천할 지도자라고 판단했다”고 호소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직접 체험을 바탕으로 ‘박근혜 리더십’의 위험성을 여러차례 경고한 바 있다. 김종인, 윤여준 두 사람은 지난해 안철수 전 후보와 함께 청춘콘서트를 했다. 지금도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눌 정도로 사이가 좋다. 그런데 위치가 엇갈리면서 한 사람은 이기고 한 사람은 질 수밖에 없게 됐다. 누가 이길까?

 

1987년과 92년은 유세대결
수백만명 인파 사이로
일당이 오고가기도 했다
97년부턴 티브이토론이 대세
올해 토론은 다시 사라졌다 

1987년 대선이 끝난 뒤엔
여당 반장 기자들이 집 한채 값
촌지를 챙겼다는 소문이 돌았다
2012년 현장을 뛰는 기자들은
정당의 전세버스 비용까지 낸다

12월13일(D-6) 목요일: 마지막 변수

 각 언론사 여론조사 결과에서 문재인 후보가 박근혜 후보와의 격차를 급속히 좁히고 있다. 공표 가능한 여론조사 시한인 12일 <한겨레> 조사는 박근혜 45.4%, 문재인 43.4%였다. 여론조사는 숫자 자체보다 흐름에 의미가 있다. 마지막 주말에 1위가 뒤바뀌는 대역전극이 일어날 수 있을까? 역대 대선에서는 투표 2주일 전 여론조사가 뒤집힌 적이 없었다.

 민주통합당의 우상호 공보단장은 “문재인 후보 상승세가 투표 당일까지 이어지면 이번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가 승리한다”고 브리핑을 했다. 정말 그럴까? 투표일이 다가오면 정당 소속 취재원들의 말은 믿기가 좀 어렵다. 반대로 새누리당 선대위 사람들은 “연령대별 투표율 등 판별분석을 하면 박근혜 후보가 이긴다. 뒤집히는 일은 절대로 없다”고 자신했다. 이것도 혹시 야당 지지자들의 기세를 꺾기 위한 심리전은 아닐까?

 지지율이 움직이는 이유는 뭘까?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안철수 전 후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철수 전 후보 사퇴 이후 고집스럽게 부동층으로 남아 있던 안철수 지지층 일부가 막판에 문재인 후보 쪽으로 움직이는 흐름이 뚜렷이 잡힌다.

 안철수 전 후보의 대학가 투표 독려 캠페인 현장을 찾아가 보았다. 안철수 전 후보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스마트폰으로 만들어진 동그라미 물결 한가운데에 그가 있었다. 신문과 방송 등 기존 언론매체는 안철수 전 후보를 보도하지 않는다. 그는 더이상 후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철수 쪽 사람들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우리는 우리만의 소통수단이 따로 있다”고 말했다.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등 에스엔에스(SNS)가 그들의 ‘무기’라는 것이다.

 기존 매체에 노출되지 않는 안철수 전 후보의 움직임은 수도권과 대도시의 젊은층 유권자들을 대거 투표장으로 끌어들일 가능성이 높다. 최근 중앙선관위의 유권자 의식 조사에서 적극적 투표 의향층 수치가 높게 나온 것도 우연이 아니다. 안철수의 흡인력이 강하면 문재인이 이기고, 약하면 박근혜가 이긴다. 안철수가 이번 대선의 마지막 변수가 되는 셈이다. 안철수 전 후보 때문에 젊은층 투표율이 높아진다면 그건 확실한 진화다.

 2002년 대선의 마지막 변수는 정몽준이었다. 후보등록 직전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가 이뤄지는 바람에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은 이회창 후보를 훌쩍 넘어섰고 그 탄력으로 당선까지 됐다. 정몽준 후보가 투표 전날 밤 지지 철회를 선언했지만 오히려 노무현 지지층이 급속히 결집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진보정당 후보인 권영길 후보를 찍으려던 젊은 유권자들이 투표 당일 노무현으로 돌아섰고, 중국이나 일본에 출장중이던 회사원들이 당일 비행기로 급거 귀국해 노무현 후보를 찍은 사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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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4일(D-5): 기자·언론

 ‘군, 북 장거리 로켓 주요부품 첫 확보’(조선일보), ‘부동층 10% 싸움 막판 한 방의 유혹’(중앙일보), ‘북 제재 빈틈없게…2단계로 옥죈다’(동아일보), ‘연평도 포격징후 내부보고 묵살…또 드러난 안보실패’(한겨레), ‘새누리 댓글달기 불법 선거운동 의혹’(경향신문)

 아침 신문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모든 사건이 변수가 된다. 북한의 로켓 발사처럼 대형 사건은 말할 것도 없다. 신문의 영향력은 1987년 이후 지속적으로 줄고 있다. 텔레비전의 영향력도 마찬가지다. 미디어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신문의 의제 설정 기능은 여전히 막강하다. 보수 성향 신문과 진보 성향 신문의 제목만 살펴도 안보 쟁점을 다루는 시각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문은 정권의 향배에 민감하다. 이념 성향 때문만이 아니라 언론사주의 이해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중동은 김대중 정부에서 세무조사를 받고 사주가 구속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명박 정권에서는 ‘종편’이라는 큰 선물을 받았다. 이번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기를 원하는지는 자명하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조선일보>에 ‘정주영 찍으면 김대중 된다’는 류근일 칼럼이 실렸다. 정주영 후보의 국민당은 펄펄 뛰었지만, 정주영 후보 지지자들이 김영삼 후보 쪽으로 대거 이동하는 계기가 됐다. 조중동 사주들은 1997년과 2002년에는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후보의 당선을 막지 못했다. 신문, 특히 사주의 영향력이 줄고 있는 현상은 분명한 진화다. 신문과 방송의 퇴조로 생긴 공백은 인터넷과 에스엔에스가 채워가고 있다.

 1987년 대선이 끝나고 언론계에는 민정당을 출입했던 여당 반장 기자들이 집 한채 규모의 촌지를 챙겼다는 소문이 돌았다. 권언유착이 극심하던 시절이었다. 정치인들이 기자에게 돈봉투를 주던 문화는 노무현 정부에 이르러 거의 사라졌다. 지금 현장 취재를 다니는 기자들은 정당에서 빌린 전세버스 비용까지 내야 한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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