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연재를 마치며
민주 정치세력은 늘 혼자 힘으로는 이기지 못했다. 87년 첫 직선제 대통령 선거의 패배는 예견된 것이었다. 디제이(김대중)와 와이에스(김영삼)로 분열됐기 때문이다. 그 뒤 와이에스는 92년 선거에서 이른바 문민정부를 출범시켰지만 그건 3당 합당으로 아예 보수가 되면서 가능했다. 97년 디제이는 충청권을 대표한다는 김종필의 자민련과 연대해서야 승리했고, 2002년 노무현은 또 다른 보수세력인 정몽준을 끌어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엔 안철수가 있었고 단일화를 이뤘다. 그럼에도 ‘독재자의 딸’에 졌다.
담쟁이 포럼 이사장으로 문재인 후보를 적극 지원했던 한완상 전 부총리를 24일 오전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87년 이래 과거 다섯번의 대선에 대해 “그래도 그 때는 설명이 됐다”면서 이번 선거결과를 보고 자신도 “인생에 첨으로‘멘붕 상태에 빠졌다”고 말했다. 본래 이 인터뷰는 무려 162회에 걸쳐 연재된 비망록 <길을 찾아서>를 마감하는 자리로 준비됐다. 그러나 그의 비망록이 지난 20년 가까운 우리 역사와 정치현실을 담고 있었기에 이번 대선을 인터뷰의 중심에 둘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비망록을 ‘평화순례자’의 입장에서 과거 공직에서의 경험을 되돌아보며 썼다고 말했다. “통일부총리, 교육부총리를 비롯해 적십자사 총재 등 과거 김영상 정부에서부터 노무현 정부까지 공직을 맡았다.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나름 노력하며 겪었던 그 경험을 정직하고 충실하게 되돌아보자. 그래야 현재의 잘못을 고칠 수 있고 밝고 희망찬 미래의 창을 열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연재때 정권 뒷얘기 공개 고민
지난 20년간 가장 아쉬운 것은
YS때 북과 파격적 화해 못한것 -20여년 가까이 지난 일들을 현장 상황과 당시의 보도를 비롯해 날자까지 기억해 내고 되살려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되도록 지난날 일을 사실에 충실하게 기록하려고 했다. 일기를 써왔고 93년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통일 부총리로 공직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언젠가 비망록으로 남기려고 더욱 철저히 자료와 꼼꼼하게 기록해 왔다. 지식인으로 학자로서 공적인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뉴스 보도 자료 등도 챙겼다. 또 역사를 전공하지 않았지만 신학을 공부하면서 성서신학을 연구하다 보니 역사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됐다." -디제이 와이에스 정부의 주요 인물들의 뒷얘기 등 이른바 당사자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이라고 할 수 있는 ‘아픈’ 내용들도 꽤 있는데 "사실 자료를 바탕으로 상황을 보여주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드러나지 않은 많은 얘기들이 있었는데 어디까지 얘기할 것인가가 고민이었다. 진실은 항상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가혹하기도 하다. 그러나 지난날의 사건들에 대한 올바른 기억과 기록 없이 밝은 내일은 열리지 않는다. 조선왕조 실록의 역사적 가치는 사관이 갖고 있던 특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인데 그것으로 왕의 권력을 견제하고 통치행위가 기록된다는 걸 의식하도록 했다는 데 있다." -특히 와이에스 재임시절 1차 북핵 위기 당시 제임스 레이니 대사 주한 미 대사와는 가장 가까운 사이였기에 속마음을 터놓고 많은 얘기들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93년 북핵 문제의 포괄적 해결을 위한 접근 방법을 놓고 와이에스와 클린턴 미 대통령 사이의 갈등은 당시 보도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매우 심각했다. 레이니 대사는 과거 주한 미대사들이 보였던 ‘총독형’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친구의 나라라는 생각과 신학적 관점에서 늘 겸손했고, 핵 위기 상황에서도 대북정책은 공포의 균형, 군사적 억제를 넘어서야 한다며 오히려 진보적인 자세였다. 그 당시로 보면 지금 보다 더 종북 좌파로 몰렸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친미 우파들로부터종북 좌파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그들보다도 내가 더 친미주의자가 되는 묘한 상황이었다. 대사라는 공식적인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고 우리가 잘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에 좀 더 적극적으로 알리고자 했다." -그럼에도 쓰지 못한 부분이 많다고 하셨는데. "<길을 찾아서>에 실린 것은 그동안 써왔던 비망록 가운데 3분의1 정도에 불과하고 그것도 지면 제약으로 자세한 얘기들이 잘려나갔다. 일단 연재했던 내용들을 바탕으로 내년 상반기 안에 책으로 발간하고 <비망록> 전체는 출판사와 협의해 역사적 기록이라는 차원에서 별도의 책으로 내년 말쯤 낼 예정이다." -와이에스 정부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햇볕정책을 추진하셨는데 왜 디제이 정부 들어 대북정책에서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건가 "디제이와 충청권을 대표하는 김종필의 이른바 디제이피 연합이 잘못됐다고 봤다. 적어도 선거 이후에는 민주주의와 한반도에 평화에 대한 디제이의 철학에 따라 정국을 구상하고 주도적으로 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대통령 비서실장, 외교 통일 장관등 핵심인사들을 자신의 철학과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을 임명했다. 디제이는 대통령으로서 관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초기 2년여 정책이 삐걱거리고 북이 햇볕정책을 변종된 흡수통일론의 간교한 정책으로 오해하도록 만든 측면이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북관계가 좀 더 일찍 풀릴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번 대선결과에 생애 처음 ‘멘붕’
‘멘붕’ 구조적 극복땐 새 역사 가능
문재인, 정치문화 바꾸는 일 남아 -20여년 가까운 시대를 되돌아 보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점들을 꼽는다면 "문민 정부를 출범시킨 와이에스가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을 통해서 노벨상을 받았으면 했다. 남북의 두 김씨 지도자가 파격적인 화해 협력에 합의하고 북한이 미 중 등 주변국과 교차승인을 거쳐 탈냉전을 완성해 가는 정책적 그림이 실현된다면 와이에스가 노벨 평화상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느 동맹도 민족보다 나을 수는 없다는 와이에스 취임사의 한 대목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남북의 정상이 백두산 한라산에서 만나서 터놓고 얘기하자는 정상회담을 제안한 것인데 성사되지 못했다. 통일 부총리가 되자 곧바로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노인을 북에 보냈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바로 그 다음날 북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국가연합단계로 갈 수 있었던 그 꿈이 좌절된 게 가장 아쉽다. 또 디제이의 경우 디제이피 연합에 발이 묶여 초기에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하지 못했던 것과 97년말 국가부도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 취했던 정책들이 당시로서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용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걸 깨닫지 못했던 것이 안타깝다. 노 대통령은 와이에스처럼 3당 통합으로 보수쪽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보수쪽과 연합한 디제이처럼 보수에 빚진 것도 없었기에 그만큼 자유롭게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는데 왜 5년 지나고 나서 신자유주의적이고 친미 보수적인 정책을 취했다며 진보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결국엔 가장 냉전수구적인 정권에 권력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는지 그게 가장 아쉽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캠프의 외곽조직인 담쟁이 포럼 이사장으로 이번 대선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셨는데 "문재인은 참신성, 진정성, 정직성에다 그 모든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관용을 유지하려 했던 ‘비주류적인’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따뜻한 마음의 지도자를 뽑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다. 사실 지난 시대를 돌아보면 지금이 가장 안타깝다. 아니 그런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 이번 선거 결과로 흔히 하는 말로 인생에서 첨으로 ‘멘붕’ 상태에 빠졌다. 87년 첫 직선제 이래 5번의 선거를 치뤘는데 와이에스, 디제이, 노무현 세번을 이기고 두번을 졌지만 멘붕은 아니었다. 그때는 설명이 됐다. 87년 노태우 대통령 당선은 양김의 분열 때문이었고, 2007년 이명박 대통령 당선도 노무현 정부 심판론에다 경제대통령을 내세워 당선됐기에 기가 차고 분노했지만 멘붕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정말 국민의 사랑을 받는 인품을 가진 대통령을 뽑을 수 있었다고 믿었기에 더욱 아팠다. 그러나 이 멘붕으로 나를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구조적인 멘붕 극복으로 새 역사가 만들어지고 개인적인 멘붕극복으로 인간이 새롭게 다져지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선거결과를 놓고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는데 "민주통합당은 올 4월 총선에서 과반수 집권 기회를 놓쳤다. 무사 만루 찬스를 만들어줬는데 안타 하나 못내고 넘겨준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게 안철수 현상으로 나타난 것 아닌가. 안철수 현상을 존중해야 한다. 민주당의 안철수에 대한 비판이 안철수 현상을 받아들이는데 장애로 작용했고 결국 안철수 현상과의 괴리를 낳았다. 새 정치 문화를 보여주지 못했고 권력 장악, 선거 승리만 얘기했다. 구호로는 제시됐지만 국민들이 느낄 수 있는 대안 곧 시장의 탐욕을 제압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실체를 보여주지 못했다. 후보로서의 안철수는 준비되지 않은데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민주 시민사회 진영은 모두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새 정치 문화의 실체를 채워나가야 한다. 2013년 체제에 대한 지식인들의 기대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게 아니었나 생각한다. 새 정치 문화와 체제의 내용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진보 개혁세력은 노령화 시대로 가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인식 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50대가 10년동안 왜 변했는가? 보수는 부패할 수 있지만 누구하고도 손잡을 수 있어야 하기에 오히려 유연하다. 진보는 역사는 우리 편이다라는 독선에 빠지기 쉽고 진영논리에 자기를 가둬 버리기 쉽다. 독선은 자기 성찰을 못하게 되고 역사의 변화된 현실 인식에 장애가 된다. 이해 소통은 역지사지에서 가능한데 독선에 빠지면 그게 안된다. 이번 대선의 핵심은 정치의 민주화가 아니라 경제 민주화였다. 끝없는 시장의 탐욕이 이 세계를 혼란으로 가져왔고 국민들은 불안해 하고 있다. 시장의 탐욕에 맞서서 정부가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정부는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공정성의 잣대로 시장을 관리해내야 한다. 정부가 시장을 공정하게 관리하지 않고 민주주의 원리를 훼손시키는 쪽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시민사회가 나서야 한다. 그게 경제 민주화다. 디제이는 재벌을 사실상 묵인하고 노무현은 재벌을 개혁한다고 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그 힘을 극복하지 못했다. 족벌 세습 경영의 재벌은 극복해내야 하지만 기업은 살리고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하고 더욱 키워나가야 한다는 걸 분명히 했어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도 경제 민주화를 얘기했다. 게다가 복지도 내걸었다. 독재의 유산과 기득권에 뿌리를 둔 박근혜의 그것과 문재인의 경제 민주화가 어떻게 다른지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보수세력이 경제민주화와 복지담론을 전술적으로 선제 활용하는 전략으로 승리한 셈이다." -문재인이 남긴 것은 무엇이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경선과정에서 끝까지 자신의 성실성을 지켰다. 네거티브 하지 않고 정직함과 겸손함으로 국민들 마음속에 문재인이라는 인품의 씨앗을 심어놨다. 지금은 고령화시대다. 60대가 끝은 아니다. 이제 시작이고 할 일이 남았다. 그 씨앗을 이제 키워나가야 한다. 문재인으로 결집된 48%는 이익을 도모하는 국민이 아니다. 이익을 따르는 지지는 끝나면 다 흩어지는데 인품을 좋아하며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와 함께 할 것이다. 문 후보는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정치인이다. 대통령 후보로서는 실패했지만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어가는 리더쉽이 시퍼렇게 살아있다. 당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있기에 당을 새로운 차원으로 바꿔가는 과제에서 자유롭다. 민주당은 가진 지분을 내려놓고 시민사회와 손을 잡고 새로운 정치제도를 만들어가는데 협조해야 한다." -박근혜 당선자가 대통령으로 성공하기 위해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두가지 장애만 넘어서면 좋은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새 대통령은 정치적 독재라는 아버지의 유산을 극복해야 한다. 따라서 재벌 기득권층의 경제적 독재도 청산해야 한다. 이 장애를 넘어서야 국민의 생존권적 기본권을 신장시키는 경제 민주화를 이뤄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엠비가 했던 것을 절대로 답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아버지의 유산을 뛰어넘는 것은 어려울지 몰라도 냉전의 남북관계라는 유산을 뛰어넘는 것은 가능하다. 오바마 2기 미 행정부에서 존 케리 국무장관의 임명으로 북미관계의 적극적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에서 박근혜 당선자가 냉전 수구세력들에 의해 휘둘리지 않아야 하는데 이 부분은 이명박 대통령과는 다른 카리스마가 박 당선자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글·사진/강태호기자 kankan1@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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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년간 가장 아쉬운 것은
YS때 북과 파격적 화해 못한것 -20여년 가까이 지난 일들을 현장 상황과 당시의 보도를 비롯해 날자까지 기억해 내고 되살려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되도록 지난날 일을 사실에 충실하게 기록하려고 했다. 일기를 써왔고 93년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통일 부총리로 공직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언젠가 비망록으로 남기려고 더욱 철저히 자료와 꼼꼼하게 기록해 왔다. 지식인으로 학자로서 공적인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뉴스 보도 자료 등도 챙겼다. 또 역사를 전공하지 않았지만 신학을 공부하면서 성서신학을 연구하다 보니 역사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됐다." -디제이 와이에스 정부의 주요 인물들의 뒷얘기 등 이른바 당사자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이라고 할 수 있는 ‘아픈’ 내용들도 꽤 있는데 "사실 자료를 바탕으로 상황을 보여주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드러나지 않은 많은 얘기들이 있었는데 어디까지 얘기할 것인가가 고민이었다. 진실은 항상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가혹하기도 하다. 그러나 지난날의 사건들에 대한 올바른 기억과 기록 없이 밝은 내일은 열리지 않는다. 조선왕조 실록의 역사적 가치는 사관이 갖고 있던 특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인데 그것으로 왕의 권력을 견제하고 통치행위가 기록된다는 걸 의식하도록 했다는 데 있다." -특히 와이에스 재임시절 1차 북핵 위기 당시 제임스 레이니 대사 주한 미 대사와는 가장 가까운 사이였기에 속마음을 터놓고 많은 얘기들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93년 북핵 문제의 포괄적 해결을 위한 접근 방법을 놓고 와이에스와 클린턴 미 대통령 사이의 갈등은 당시 보도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매우 심각했다. 레이니 대사는 과거 주한 미대사들이 보였던 ‘총독형’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친구의 나라라는 생각과 신학적 관점에서 늘 겸손했고, 핵 위기 상황에서도 대북정책은 공포의 균형, 군사적 억제를 넘어서야 한다며 오히려 진보적인 자세였다. 그 당시로 보면 지금 보다 더 종북 좌파로 몰렸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친미 우파들로부터종북 좌파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그들보다도 내가 더 친미주의자가 되는 묘한 상황이었다. 대사라는 공식적인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고 우리가 잘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에 좀 더 적극적으로 알리고자 했다." -그럼에도 쓰지 못한 부분이 많다고 하셨는데. "<길을 찾아서>에 실린 것은 그동안 써왔던 비망록 가운데 3분의1 정도에 불과하고 그것도 지면 제약으로 자세한 얘기들이 잘려나갔다. 일단 연재했던 내용들을 바탕으로 내년 상반기 안에 책으로 발간하고 <비망록> 전체는 출판사와 협의해 역사적 기록이라는 차원에서 별도의 책으로 내년 말쯤 낼 예정이다." -와이에스 정부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햇볕정책을 추진하셨는데 왜 디제이 정부 들어 대북정책에서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건가 "디제이와 충청권을 대표하는 김종필의 이른바 디제이피 연합이 잘못됐다고 봤다. 적어도 선거 이후에는 민주주의와 한반도에 평화에 대한 디제이의 철학에 따라 정국을 구상하고 주도적으로 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대통령 비서실장, 외교 통일 장관등 핵심인사들을 자신의 철학과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을 임명했다. 디제이는 대통령으로서 관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초기 2년여 정책이 삐걱거리고 북이 햇볕정책을 변종된 흡수통일론의 간교한 정책으로 오해하도록 만든 측면이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북관계가 좀 더 일찍 풀릴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번 대선결과에 생애 처음 ‘멘붕’
‘멘붕’ 구조적 극복땐 새 역사 가능
문재인, 정치문화 바꾸는 일 남아 -20여년 가까운 시대를 되돌아 보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점들을 꼽는다면 "문민 정부를 출범시킨 와이에스가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을 통해서 노벨상을 받았으면 했다. 남북의 두 김씨 지도자가 파격적인 화해 협력에 합의하고 북한이 미 중 등 주변국과 교차승인을 거쳐 탈냉전을 완성해 가는 정책적 그림이 실현된다면 와이에스가 노벨 평화상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느 동맹도 민족보다 나을 수는 없다는 와이에스 취임사의 한 대목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남북의 정상이 백두산 한라산에서 만나서 터놓고 얘기하자는 정상회담을 제안한 것인데 성사되지 못했다. 통일 부총리가 되자 곧바로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노인을 북에 보냈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바로 그 다음날 북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국가연합단계로 갈 수 있었던 그 꿈이 좌절된 게 가장 아쉽다. 또 디제이의 경우 디제이피 연합에 발이 묶여 초기에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하지 못했던 것과 97년말 국가부도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 취했던 정책들이 당시로서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용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걸 깨닫지 못했던 것이 안타깝다. 노 대통령은 와이에스처럼 3당 통합으로 보수쪽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보수쪽과 연합한 디제이처럼 보수에 빚진 것도 없었기에 그만큼 자유롭게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는데 왜 5년 지나고 나서 신자유주의적이고 친미 보수적인 정책을 취했다며 진보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결국엔 가장 냉전수구적인 정권에 권력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는지 그게 가장 아쉽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캠프의 외곽조직인 담쟁이 포럼 이사장으로 이번 대선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셨는데 "문재인은 참신성, 진정성, 정직성에다 그 모든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관용을 유지하려 했던 ‘비주류적인’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따뜻한 마음의 지도자를 뽑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다. 사실 지난 시대를 돌아보면 지금이 가장 안타깝다. 아니 그런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 이번 선거 결과로 흔히 하는 말로 인생에서 첨으로 ‘멘붕’ 상태에 빠졌다. 87년 첫 직선제 이래 5번의 선거를 치뤘는데 와이에스, 디제이, 노무현 세번을 이기고 두번을 졌지만 멘붕은 아니었다. 그때는 설명이 됐다. 87년 노태우 대통령 당선은 양김의 분열 때문이었고, 2007년 이명박 대통령 당선도 노무현 정부 심판론에다 경제대통령을 내세워 당선됐기에 기가 차고 분노했지만 멘붕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정말 국민의 사랑을 받는 인품을 가진 대통령을 뽑을 수 있었다고 믿었기에 더욱 아팠다. 그러나 이 멘붕으로 나를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구조적인 멘붕 극복으로 새 역사가 만들어지고 개인적인 멘붕극복으로 인간이 새롭게 다져지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선거결과를 놓고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는데 "민주통합당은 올 4월 총선에서 과반수 집권 기회를 놓쳤다. 무사 만루 찬스를 만들어줬는데 안타 하나 못내고 넘겨준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게 안철수 현상으로 나타난 것 아닌가. 안철수 현상을 존중해야 한다. 민주당의 안철수에 대한 비판이 안철수 현상을 받아들이는데 장애로 작용했고 결국 안철수 현상과의 괴리를 낳았다. 새 정치 문화를 보여주지 못했고 권력 장악, 선거 승리만 얘기했다. 구호로는 제시됐지만 국민들이 느낄 수 있는 대안 곧 시장의 탐욕을 제압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실체를 보여주지 못했다. 후보로서의 안철수는 준비되지 않은데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민주 시민사회 진영은 모두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새 정치 문화의 실체를 채워나가야 한다. 2013년 체제에 대한 지식인들의 기대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게 아니었나 생각한다. 새 정치 문화와 체제의 내용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진보 개혁세력은 노령화 시대로 가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인식 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50대가 10년동안 왜 변했는가? 보수는 부패할 수 있지만 누구하고도 손잡을 수 있어야 하기에 오히려 유연하다. 진보는 역사는 우리 편이다라는 독선에 빠지기 쉽고 진영논리에 자기를 가둬 버리기 쉽다. 독선은 자기 성찰을 못하게 되고 역사의 변화된 현실 인식에 장애가 된다. 이해 소통은 역지사지에서 가능한데 독선에 빠지면 그게 안된다. 이번 대선의 핵심은 정치의 민주화가 아니라 경제 민주화였다. 끝없는 시장의 탐욕이 이 세계를 혼란으로 가져왔고 국민들은 불안해 하고 있다. 시장의 탐욕에 맞서서 정부가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정부는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공정성의 잣대로 시장을 관리해내야 한다. 정부가 시장을 공정하게 관리하지 않고 민주주의 원리를 훼손시키는 쪽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시민사회가 나서야 한다. 그게 경제 민주화다. 디제이는 재벌을 사실상 묵인하고 노무현은 재벌을 개혁한다고 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그 힘을 극복하지 못했다. 족벌 세습 경영의 재벌은 극복해내야 하지만 기업은 살리고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하고 더욱 키워나가야 한다는 걸 분명히 했어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도 경제 민주화를 얘기했다. 게다가 복지도 내걸었다. 독재의 유산과 기득권에 뿌리를 둔 박근혜의 그것과 문재인의 경제 민주화가 어떻게 다른지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보수세력이 경제민주화와 복지담론을 전술적으로 선제 활용하는 전략으로 승리한 셈이다." -문재인이 남긴 것은 무엇이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경선과정에서 끝까지 자신의 성실성을 지켰다. 네거티브 하지 않고 정직함과 겸손함으로 국민들 마음속에 문재인이라는 인품의 씨앗을 심어놨다. 지금은 고령화시대다. 60대가 끝은 아니다. 이제 시작이고 할 일이 남았다. 그 씨앗을 이제 키워나가야 한다. 문재인으로 결집된 48%는 이익을 도모하는 국민이 아니다. 이익을 따르는 지지는 끝나면 다 흩어지는데 인품을 좋아하며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와 함께 할 것이다. 문 후보는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정치인이다. 대통령 후보로서는 실패했지만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어가는 리더쉽이 시퍼렇게 살아있다. 당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있기에 당을 새로운 차원으로 바꿔가는 과제에서 자유롭다. 민주당은 가진 지분을 내려놓고 시민사회와 손을 잡고 새로운 정치제도를 만들어가는데 협조해야 한다." -박근혜 당선자가 대통령으로 성공하기 위해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두가지 장애만 넘어서면 좋은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새 대통령은 정치적 독재라는 아버지의 유산을 극복해야 한다. 따라서 재벌 기득권층의 경제적 독재도 청산해야 한다. 이 장애를 넘어서야 국민의 생존권적 기본권을 신장시키는 경제 민주화를 이뤄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엠비가 했던 것을 절대로 답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아버지의 유산을 뛰어넘는 것은 어려울지 몰라도 냉전의 남북관계라는 유산을 뛰어넘는 것은 가능하다. 오바마 2기 미 행정부에서 존 케리 국무장관의 임명으로 북미관계의 적극적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에서 박근혜 당선자가 냉전 수구세력들에 의해 휘둘리지 않아야 하는데 이 부분은 이명박 대통령과는 다른 카리스마가 박 당선자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글·사진/강태호기자 kankan1@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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