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 박정희 정권에선 중앙정보부를 빼놓고는 선거 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집권 공화당은 선거조직의 일부일 뿐이고, 정부 및 지방 행정조직과 마을 단위 자치 조직은 물론이고 학교, 기업체, 사회단체를 동원하는 건 중정의 일이었습니다. 이들을 선거운동에 동원하고, 흑색선전 돌리고, 자금 살포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투개표 과정까지 뒤틀었죠. 기억하실 겁니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선거가 1967년 총선(6·8 부정선거)과 1971년 대선이었습니다. 1967년 총선은 3선 개헌을 염두에 두고 개헌선(재적 3분의 2)을 확보해야 하는 선거였습니다. 그때 중정의 책임자가 그 무지막지한 김형욱 부장이었으니, 어떻게 진행됐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개헌선보다 훨씬 많은 의석(73%)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투표자 수가 유권자 수보다 더 많은 선거구가 곳곳에서 나타났습니다. 중복투표, 대리투표는 물론 투개표 조작까지 있었다는 반증이었습니다. 부정이 얼마나 심했는지 공화당이 나서서 당 소속 당선자 7명을 제명하기도 했습니다. 3선 개헌 후 치러진 1971년 대선은 더 극악스러웠습니다. 얼마나 부정이 저질렀는지는 김대중 후보가 이후락 중정 부장에게 대놓고 했다는 ‘나는 박정희 후보에게 진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졌소’라는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선거 부정을 은폐하는 방식 또한 기가 막혔습니다. 김형욱 부장은 전면 재선거 요구가 정치권과 학원, 시민사회에서 분출하자 총선 한 달 뒤인 7월8일 이른바 동백림 사건을 터뜨립니다.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선생 등이 포함된 예술가·학자·공직자 194명이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적화통일을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이 막무가내식 더러운 공작은 주효했습니다. 그 서슬 앞에서 부정선거 규탄과 전면 재선거 요구는 동결됐습니다. 이후락 부장은 더 심했습니다. 현실적인 위협인 김대중씨를 아예 일본에서 납치해 현해탄에 수장시키려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끔찍한 시절이었습니다.
그 더러운 공작이 이제는 사라졌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대통령선거를 통해 다시 부활했습니다. 이름만 바꾼 국가정보원이 다른 사람도 아닌,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 후보를 위해 전면에 나선 겁니다. 그래도 그 규모나 수준이란 게 성의 표시 정도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실제 처음엔 국정원 요원들이 공작이란 이름을 붙이기에도 졸렬한 ‘인터넷 댓글’ 붙이는 것에 매달린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더군요. 세월의 변화를 참작하면, 질적으로 아버지 때 못지않은 것이었습니다. ‘소매상 수준’의 댓글 달기가 아니라, 저질 흑색선전을 생산해 트위터를 통해 마구 뿌려대는 ‘도매상 수준’의 여론 조작 공작이었습니다. 내용이란 것도 우리 사회의 수준을 의심케 하는 저질 가운데 상저질이었습니다. 박근혜 후보 만세, 문죄인 간첩, 찰스 제비 또는 남장여자… 따위였습니다.
게다가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공작 또한 부친 때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국정원을 기소한 채동욱 검찰총장을 온갖 저열한 방법으로 쫓아내더니 이번엔 트위터 공작을 밝힌 윤석열 특별수사팀장을 찍어냈습니다. 수사팀이야 당연히 범죄의 전모를 캐는 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그런데 사건의 본질에 가까이 접근하자 팀장을 쫓아낸 것입니다. 말로는 지휘 계선인 차장, 지검장에게 보고하지 않아 검찰권을 남용했다는 건데요, 수사팀에선 두 사람에게 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검찰이 알아서 이런 짓을 했겠습니까. 채 전 총장을 찍어낸 자들, 스스로 감찰을 받으라고 떠들어댄 자들이 한 일이겠죠.
국정원 요원 수사 및 체포 시 국정원장 통보 문제를 놓고도 절차 위반을 주장합니다. 물론 국정원법엔 그렇게 하도록 한 규정이 있습니다. 중정을 치외법권의 통치기구로 운용했던 박정희 정권 때 들어간 규정입니다. 독재를 위해 독재자에게 필요했던 이 규정의 존재에 대해선 먼저 국회의원들의 무지와 무능을 탓해야 할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가령 대통령 시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유력한 용의자는 국정원장과 그 요원들입니다. 그러면 수사기관은 관련자를 체포할 때 이 사실을 국정원에 통보를 해야 합니까, 해서는 안 됩니까. 이미 한 번 경험했던 일이니, 판단은 분명할 겁니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 공작을 대통령 시해와 어떻게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있겠느냐고 따지겠죠. 대통령 시해는 내란죄에 해당합니다. 국사범이죠. 국가기관이 선거에 개입해 국민의 주권 행사를 방해한 것도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 파괴에 해당합니다. 마찬가지로 국사범입니다. 경중을 따질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지금 재판이 진행중인 국정원 불법 선거 개입 사건의 피의자는 국정원(장)입니다. 선거 공작에 동원된 실무 요원을 기소유예 한 것은 이 사건이 국정원(장) 차원에서 일어났다고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통보 의무는 경찰의 초기 수사 단계에서 끝났다고 봐야 합니다. 게다가 지금은 재판에서 검찰과 피의자가 유무죄를 다투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추가 범죄 사실이나 수사 계획을 피의자에게 통지하라는 건데, 도대체 이런 미친 짓을 어떻게 수사기관에 강요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런 통보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수사 기밀 유출로, 형사처벌을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검찰은 공익을 대표하는 최고 기관입니다. 국민의 주권 행사만큼 중요하고 긴급한 공익은 없습니다. 국가기관이 국민의 주권 행사를 제약하거나, 방해하고 왜곡시키는 짓이 있다면, 이는 공익 보호 차원에서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런데 범죄자에게 미리 증거를 없애고 도망칠 기회를 주자고요? 미쳐도 단단히 미쳤습니다.
이쯤에서 대통령님은 답해야 합니다. 국정원 선거 공작의 꼬리가 잡혔을 때 눈을 부라리며 ‘젊은 여성에 대한 인권 유린 사건’이라고 흥분했습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또 국정원 선거 공작 및 은폐 조작 사실이 검찰 수사로 드러나 기소된 후에는,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발뺌했습니다. 선거 후 은폐 조작이 지금도 본인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십니까?(닉슨 미국 대통령이 사임한 직접적인 원인은 워터게이트 사건 자체가 아니라 이에 대한 거짓말이었습니다.) 주권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제 이렇게 따져야 할 지경입니다. 꼭 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막가겠다는 건가요?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