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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미래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시간여행 SF의 얄궂은 운명

등록 2019-10-28 06:00수정 2019-10-28 10:09

디스토피아 미래 다룬 ‘타임머신’
1920년대 번역 소개 2회만에 중단
작가의 사회주의 사상 문제였던듯
1926년 별건곤 창간호에 실린 웰스의 ‘팔십만년 후의 사회\'.
1926년 별건곤 창간호에 실린 웰스의 ‘팔십만년 후의 사회\'.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장치라는 뜻으로 오늘날 보통명사나 다름없이 쓰이는 ‘타임머신’이란 말은 원래 영국 작가 H.G.웰스의 소설 제목이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는 항시기(航時機), 또는 시항기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복거일 작가는 SF소설 ‘역사 속의 나그네’에서 조선시대로 시간여행을 한 주인공이 탄 기계를 타임머신이라 부르지 않고 시낭(時囊)이라는 말로 표현한 바 있다.

웰스의 ‘타임머신’은 1895년에 발표됐다. 그 이전의 동서양 문학에서도 시간여행을 다룬 이야기들은 적지 않았지만, 웰스는 과학적으로 가능하다는 식의 논리를 펴서 기존 판타지와는 차별되는 장르 서사를 처음 내놓았다. 그래서 이 작품은 시간여행 SF의 시조로 꼽히며 오늘날까지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는 고전이 되었다. 하지만 이 소설을 그저 시간여행 이야기로만 알고 있다면 절반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타임머신’은 80만 년 뒤라는 아득한 미래사회가 배경이다. 주인공이 그 세계에 도착해서 목격한 것은 지상에서 놀고먹기만 하는 ‘엘로이’족과 지하에서 오로지 노동에만 종사하는 ‘몰록’족이라는 두 가지 부류의 인간들이었다. 웰스가 이 작품을 집필하던 19세기의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이 일반화되면서 자본이 축적되어가던 시기였지만, 노동자들의 작업 환경이나 권리, 복지 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아직 열악하던 때였다. 아홉 살짜리 어린이가 휴일도 없이 하루 12~16시간씩 일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이다. 웰스는 당시의 그러한 세태를 보고 자본 계급과 노동 계급이 극단적으로 분화된 디스토피아적 미래사회를 ‘타임머신’에 묘사한 것이다.

웰스의 ‘타임머신’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20년대이다. 1920년 잡지 ‘서울’에, 그리고 1926년에 잡지 ‘별건곤’에 각각 번역 연재로 실리기 시작했으나 단 2회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때 달린 제목은 둘 다 ‘팔십만 년 후의 사회’였다. 시간여행이라는 과학적 상상력보다는 먼 미래사회에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바뀌었을지 그 전망에 더 주목하는 뉘앙스를 번역 제목에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미래세상의 모습 부분이 미처 나오기도 전에 연재가 중단되고 말았는데,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자못 궁금하다.

이와 관련해서 당시 웰스가 어떤 인물로 인식되었나 하는 것이 혹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웰스는 소설가인 동시에 문명비평가로서 사회주의 사상의 소유자였으며 온건한 방법으로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페이비언협회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탈퇴하기도 했다. 페이비언협회는 오늘날 영국 노동당의 모태가 된 조직이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뒤에는 변화한 사회의 모습을 직접 살펴보고자 몇 차례에 걸쳐 러시아를 방문했으며, 친분이 있는 작가인 고리키의 주선으로 레닌을 만나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를 막으려 애를 썼으며 이른바 불온서적도 읽지 못하게 했다. 예를 들어 1930년대에 박정희가 대구사범학교를 다니던 시절 동급생 중에 웰스의 저작인 ‘세계문화사대계’를 읽었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학생이 있었다. 웰스를 사회주의자로 보았기에 그의 저작들도 금서가 되었다.

‘세계문화사대계’는 우주와 지구의 탄생부터 시작하여 인류의 역사를 서술한 매우 방대한 분량의 저작으로, 오늘날 주목받는 ‘빅 히스토리’의 효시격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이다. 작가 박경리도 젊은 시절 이 책을 읽었다고 생전에 술회한 바 있는데, 당시 그가 본 것은 일본어판이었다. 일제강점기가 이어지면서 교육받은 지식 청년들은 모두 일본어로 된 책을 읽었다. 웰스의 ‘세계문화사대계’는 아직 한국어로는 완역된 적이 없으며 그동안 요약판 단행본으로만 선을 보였을 뿐이다.

웰스는 2차대전을 목도하고는 인류에 실망한 채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문명비평가로서보다는 SF문학의 시조이자 과학적 상상력의 대가로만 주로 기억될 뿐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이 낳은 상상력의 유산은 후배 SF작가들에 의해 활짝 꽃피었고, 이제 그 상상력은 그가 진정으로 추구했던 인류의 진보와 희망을 위해 꼭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지금 우리는 팔십만 년이 아닌 팔십 년 뒤의 세계가 궁금하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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