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천원짜리 인간’들이 있다. 2009년 최저 임금인 시급 4천원을 받고 살아가는 노동자들이다. 언론은 가난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종종 전해왔지만,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틈은 무장 벌어지기만 한다. ‘워킹푸어’(working poor)는 2년 전 이미 300만 명을 넘어섰다는 분석도 나왔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동트기 전에 출근해 별을 보며 퇴근해도 가난은 결코 저물지 않는 이들이다.〈한겨레21〉은 그들의 세계로 직접 들어가보기로 했다. 시급 4천원짜리 일자리를 구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부닥치고 일했다. 그 돈으로 한 달 생활을 직접 꾸려보았다.
2009년 9월부터 연재되었던 한겨레21의 ‘노동OTL’ 기획시리즈 1회는 이렇게 첫발을 뗐다. ‘노동OTL’은 한겨레 탐사보도의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기사 가운데 하나다.
첫 번째로 ‘4천원 인생’에 뛰어든 임인택 기자의 일터는 경기 안산 지역 공단의 작은 난로 공장 생산직이었다. 임인택은 7월 하순부터 구직 활동을 시작해 8월 6일부터 9월 5일까지 ‘9번 기계’로 일했다. 2009년 9월 발간된 한겨레21 778호 표지이야기 〈‘9번 기계’의 노동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노동OTL 기획시리즈 첫 번째 이야기 ‘9번 기계’의 노동일기
여름 한철,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값싼 ‘을’이었다.1970~1980년대 공장 노동이 ‘여공’과 ‘미싱’으로 상징된다면, 지금은 전동 드라이버다. 계절 따라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공장 시계 돌아가는 소리는 아니 들리고, 일주일에 7일, 하루 12시간씩 나사 돌리는 소리만 요란하다. 곡절 끝에 취업한 A사, 대부분의 여공 손에도 드라이버가 쥐어져 있다.
경기 안산시 곳곳에선 구인광고를 쉽게 볼 수 있다. 중국인 노동자가 많아, 해당 나라말 광고문도 넘친다. 김정효 기자
당시에 안수찬, 전종휘, 임인택, 임지선 기자가 각각 대형마트, 경기도 마석의 가구 공장, 경기도 안산의 난로 공장, 식당에서 최저임금을 받으며 한 달 동안 일했다.
관찰자로서 기자 자신이 보고 느낀 빈곤 노동자의 삶, 감정, 인간관계 등을 마치 세밀화를 그리듯이 지면 위에 펼쳐놓았다. 서사적 글쓰기인 내러티브 저널리즘을 본격 활용한, 새로운 도전이었다.
갈빗집과 감자탕집에서 불판을 닦고 설거지를 했던 임지선 기자는 그곳에서 만난 40~50대 여성 노동자들의 빈곤과 돌봄노동을 아주 세세하게 그려냈다. 그곳에는 젖은 손과 부은 다리를 부여안고 ’식당 아줌마’와 ’엄마 또는 아내’로 낮밤 직업을 바꿔가며 살아내는 비정규직 여성들이 있었다. ▶노동OTL 기획시리즈 두 번째 이야기 ‘감자탕 노동일기’
사장의 횡포에도 주방 언니가 묵묵히 일하는 이유가 있다. 주방 언니의 남편은 직장이 불안정하다. 의자 공장을 하다 망한 뒤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언니가 이 감자탕집에서 벌어오는 돈은 귀하다. 집도 5분 거리여서 하굣길에 중학교 1학년인 아들이 가게에 들른다. 언니는 이때 아들에게 1천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넨다. 어떤 날은 감자를 볶아놨다가 건네며 저녁 반찬으로 먹으라고 한다. 3개월이 아니라 더 오랫동안 휴일 없이 일을 시켜도 계속 다닐 수밖에 없다. 이왕 익숙해진 일이니 다른 일을 하는 것보다 낫다고도 생각한다.
기사가 연재되는 넉 달 동안 독자들의 호응은 뜨거웠다. 한국 사회의 그늘진 곳을 비추려는 한겨레 기자들의 고민이 극대화된 결과물이었다. 언론계 안팎에서도 두루 성과를 인정받았다. 노동OTL 시리즈는 한국기자협회가 주는 이달의 기자상과 한국기자상, 민주언론상 특별상 등을 연이어 받았다. 한겨레출판에서 기사를 묶어 《4천원 인생》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노동OTL 시리즈를 묶어서 단행본으로 펴낸 한겨레출판의 <4천원 인생>.
이 연작기사는 소재와 글쓰기 장르의 측면에서는 장기간의 ‘잠입’ 취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적 글쓰기’ 혹은 이 시대 불안정하고 열악한 노동의 풍경을 밀도 있게 포착하는 세밀한 현장기술지를 제공했다. 그러한 결과 기자들이 한국사회의 노동실태를 밀착적으로 동시에 매우 두껍게 기술하고, ‘현장 저널리즘’ 혹은 ‘민속지학적 저널리즘’의 활성화를 매개로 독자와 언론계에 상당한 공감과 공명, 그리고 문제의식을 제공할 수 있었다는 높은 인정과 평가를 이미 얻은 바 있다.
경희대 이기형 교수는 한겨레21의 ‘노동OTL’ 시리즈를 연구한 논문 〈‘현장’ 혹은 ‘민속지학적 저널리즘’과 내러티브의 재발견 그리고 미디어 생산 연구의 함의〉에서 위와 같이 노동OTL 보도에 의미를 부여했다.
이기형 교수는 노동OTL을 읽으면서 조지 오웰의 르포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떠올렸다고 했다. 영국 북부 탄광지대 광부들의 극악한 노동 현실과 삶을 다룬 르포와 노동OTL에서 공통적으로 “특정 노동의 현장에 들어간 저널리스트의 체화된 관찰과 현장체험에 기반을 둔” 텍스트 속에 진하게 투영된 서술과 관찰의 방식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2018년 5월, 한겨레는 창간 30돌을 맞아 ‘노동orz’ 시리즈를 시작했다. 사회부 24시팀 소속 기자 여럿이 한 달 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을 기록했다. 고한솔 기자가 낮밤을 바꿔 일하는 화장품 제조업체 노동자로, 신민정 기자가 감정·감시 노동의 이중고를 겪는 콜센터 노동자로, 황금비 기자가 법·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은 주 15시간 미만 초단기 노동자로, 장수경 기자가 두 바퀴에 몸을 의지해 아스팔트 위로 쫓기듯 내몰린 배달대행 노동자로 일했다. ▶연재 중인 노동orz 기사 모아보기
2018년 창간 30주년을 맞아 한겨레는 ‘노동orz’ 시리즈를 연재 중이다.
2009년에서 2018년, 9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초단시간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감정 노동자 등 그들을 일컫는 ‘새로운 이름’과 분류 기준이 등장했다는 것 정도다.
한겨레 사회부는 노동orz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노동, 우리는 정말 알고 있을까?’ 이 질문이 시작이었습니다. 2009년 기자 네 명이 가장 낮은 노동의 현장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들은 <한겨레21> ‘노동OTL’ 연속 보도로 엎드려 좌절하는(OTL) 노동자의 초상을 전했습니다. <한겨레> 창간 30돌을 맞아 다시 같은 질문을 되뇌어봅니다. ‘4차 산업혁명’ ‘초연결사회’ 등 거창한 혁신의 시대에 노동자들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요. 열심히 일해도 사는 게 팍팍하다는 노동자들은 어쩌면 더 작아진 것은 아닐까요? 깃발과 구호, 통계와 정책으로 살필 수 없는 날것의 모순을 <한겨레> 기자가 온몸으로 물었습니다. 더 낮게 웅크려(orz) 왜소해진 우리, 노동자의 삶을 ‘노동orz’가 정밀화로 그려냅니다.
노동, 빈곤, 소수자 인권 등은 한겨레가 창간 이후 줄곧 애정과 관심의 끈을 놓지 않은 의제다.
탐사보도 영역에서도 그러했다. 한겨레21은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대한민국 영구 빈곤 보고서’(2010년 3월), 취재기자가 직접 환자 입장에서 겪은 의료 상업화의 문제점을 고발한 ‘병원 OTL-의료 상업화 보고서’(2012년 5월) 등의 내러티브 저널리즘 심층 보도를 이어갔다.
양성평등과 마찬가지로 비정규직 차별 철폐도 한겨레가 지면에서 일관되게 목소리를 높여온 의제였다. 비정규직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된 2000년대 이후로 한겨레는 줄곧 비정규직의 열악한 노동 실태를 고발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기사를 써왔다.
‘노동자의 절반 비정규직’(2001년 4월), ‘제2근로기준법 비정규직법안 쟁점(2005년 4월)’, ‘갈길 먼 비정규직법’(2006년 12월), ‘차별없는 노동, 차별 없는 사회’(2007년 8월)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 이후로도 한겨레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비정규직의 문제를 큰 사회적인 이슈로 만들어내는 보도를 이어갔다.
※ 한겨레 창간 30돌을 맞아, 한국사회를 바꾸는 데 기여한 특종이나 기획 기사의 뒷이야기를 <창간 30년, 한겨레 보도>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이 글은 디지털 역사관인 '한겨레 아카이브'에 소개된 내용의 일부입니다. 한겨레의 살아 숨쉬는 역사가 궁금하시다면, 한겨레 아카이브 페이지(www.hani.co.kr/arti/archives)를 찾아주세요. 한겨레 30년사 편찬팀 achiv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