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명은 하나처럼 행동했다. 100만명이 모인 12일에 이어 19일 열린 촛불집회 행진도 마찬가지였다. 19일 저녁 8시30분께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과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4차 촛불집회’에 참여한 <한겨레> 음성원 기자가 경복궁 쪽으로 향하는 행진 대열을 따라가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에 100만여명이 모인 가운데 기자는 어떻게 숭례문에서 내자동까지 2㎞ 행진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질서를 지켜 평화집회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집단지성으로 모였기에 가능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스웜 인텔리전스는 이 집단지성이 실제 물리적 실체로 구현되도록 도와줬다. 이 스웜 인텔리전스에 초점을 맞춰 그날의 집회를 재구성해봤다.
지난 12일 오후 4시30분, 기자는 100만명 이상이 참가한 것으로 평가된 ‘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과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3차 촛불집회’에 참가했다. 시청역이 너무 혼잡해 서울역에서 출발했다. 그 시간 인파는 이미 숭례문 앞쪽에까지 모여 있었다. 1차 목적지를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으로 정하고 출발했다. 사람이 많긴 했지만 걷기에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주 잠깐뿐이었다. 시청 근처에 이르자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여러 발언이 이어졌고, 애초 5시에 시작하겠다고 한 행진은 5시50분께 되어서 시작되었다. 이미 선두에서는 행진이 시작되었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보니 병목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걷다, 멈춰서다’를 반복해야만 했다. 아주 느리긴 했지만, 10㎝도 되지 않는 서로 간의 간격이 유지되며 앞으로 진행됐다. 서로 간에 가벼운 접촉은 있었지만, 이동에 큰 불편을 주지는 않았다. 커다란 이동 흐름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무리를 마주칠 때만 주변 사람들과 밀착되거나 잠시 멈춰서야 했다.
1㎡당 족히 3~4명이 될 정도의 엄청난 밀도로 모인 광화문 일대에 무려 100만명이란 거대한 무리가 질서 있는 흐름을 보이며 행진할 수 있던 것은 어떤 원리에 의한 것일까? 물론 집회 참가자들의 높은 시민의식과, 폭력이나 사고가 이뤄지면 안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가장 중요한 요소였겠지만, 여기에 더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발현되는 ‘복잡성 과학’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100만명 이상이 모여 있던 곳에서 어떻게 기자는 마지막 대치가 이뤄졌던 내자동으로까지 갈 수 있었을까? 20일,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한겨레> 미래팀은 복잡성 과학을 토대로 이날의 집회 장면을 재구성해봤다.
회피·정렬·결집의 규칙
복잡성 과학 중에는 집단행동을 설명하는 흥미로운 이론이 있다. 바로 ‘스웜(떼, 무리) 인텔리전스’다. 메뚜기 떼나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 모습, 정어리 떼가 마치 하나의 개체인 양 유기적인 모습으로 이리저리 무리 지어 헤엄치는 양태를 설명하는 이론이 바로 스웜 인텔리전스다. 스웜 인텔리전스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규칙만 지키면 된다. 첫째, 다른 개체와의 충돌을 피할 것(회피), 둘째, 바로 옆 개체와 나란히 움직일 것(정렬), 셋째, 가장 가까이 있는 개체들의 평균 위치로 움직일 것(결집)이다. 컴퓨터 애니메이션 전문가 크레이그 레이놀즈는 1986년 보이드(boid)라 불리는, 방향성을 파악할 수 있는 수백 개의 이등변 삼각형이 마치 하나의 개체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세 가지 규칙만을 이용해서 말이다.
레이놀즈의 세 가지 규칙은 이날 기자가 참여한 집회에서도 자연스럽게 적용됐다. 기자는 광화문(청와대) 쪽으로 가야 한다는 일념하에, 그저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의 뒤통수만 따라갔다(정렬). 전체 무리가 그쪽을 향할 것이란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앞쪽에 빈 공간이 눈에 띄면 즉시 그 공간을 채웠다(결집). 빨리 가려면 그런 행동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무엇보다 주변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회피). 아주 느린 걸음이었지만, 그저 그렇게 움직였을 뿐인데 어느새 시청 앞 광장에서 청계천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리더를 따라라
하지만 청계천에서부터는 더 이상 움직일 공간이 없었다. 그때였다. 광화문 쪽에서 기자 쪽으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청계천 쪽으로 우회하고 있었다. 모두 서 있는 집단과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집단이 만나는 순간, 약간의 혼란이 있긴 했지만, 자연스럽게 두 무리의 흐름이 구분되었다. 청계천 쪽으로 우회하는 무리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외쳤다.
“앞쪽(광화문)으로는 진행할 수 없어요.”
행진의 끝까지 참여하고 싶었던 기자는 이 말을 듣고, 곧바로 이 무리에 합류했다. 흐름 속에 뛰어드는 순간에만 남들보다 재빠른 움직임이 필요했을 뿐, 그다음부터는 역시 레이놀즈의 세 가지 규칙에 따라 사람들과 동행하기만 하면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개체들이 집단을 형성해 주변의 환경 변화에 공동으로 반응할 때는, ‘복잡적응계’가 형성된다. 복잡적응계란, 단순한 구성 요소가 수많은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자발적으로 질서를 창출하는 체계다. 독일 드레스덴 공과대학의 디르크 헬빙 등이 쓴 ‘자기조직화된 보행자 움직임’이란 제목의 논문은 ‘자기조직화’(self organizing)라는 현상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두 무리가 충돌한 이 순간, 복잡적응계가 형성되었고 자기조직화 현상이 나타나 빠르게 질서가 잡혔다. 그랬기에 기자는 시청 앞 광장에서 광화문 쪽으로 이동해 청계천 앞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꾸로 거슬러 올라오던 무리 중에는 분명 ‘리더’가 존재했다. 기자보다 더 앞쪽으로 이미 가봤던 누군가가 더 이상의 진행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방향을 바꾸기로 판단한 것이었다. 이후부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들에 합류하는 식으로 무리가 형성됐다. 이와 비슷하게,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의 케빈 슐츠 등이 쓴 ‘꿀벌 떼의 비행 안내 메커니즘’이란 제목의 논문은, 새로 이사갈 집을 이미 다녀온 적이 있는 꿀벌이 전체의 5%도 채 되지 않는데 어떻게 무리 전체를 이끌 수 있을지에 대해 분석했다. 그 결과 다른 벌보다 더 빠르게 나는 꿀벌, 이른바 ‘질주 벌’(streaker)의 존재를 찾아냈다. 질주 벌이 앞서 나가고, 이어 레이놀즈의 세 가지 원칙이 적용되며 자연스레 벌 떼가 새집을 찾아간 셈이다. 질주 벌이 다른 벌과 다른 점은 단 한 가지, 정보의 격차였다. 집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회피·정렬·결집 세 규칙만으로
수많은 개체를 유기적으로 연결
그렇게 ‘복잡 적응계’가 형성된다
정보 많은 리더는 행진 조정하고
충돌 때엔 자기조직화 거쳐 안정
참여자 공감대도 중요한 구실
세 시간 만에 청와대 입구 도착했다
이날 평범한 집회 참가자와 달리 정보를 더 많이 가진 리더는 또 있었다. 집회 주최 쪽과 함께 집회의 모든 과정을 관리하는 작업에 참여한 각 노조의 깃발을 앞세운 단체들은 맨 앞쪽 리더를 따라 우회하며 숨통을 틔워줬다. 한국진보연대의 김현식 국장은 그날 집회의 행진을 총괄 계획했던 인물이다. 김 국장 역시 인파가 그렇게까지 몰릴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그날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날 서울 광장에 모인 사람을 20만명 정도로 보는데, 그중 10만명은 광화문으로 직진하도록 하려 했어요. 하지만 이미 오후 2시부터 주변 도로까지 사람으로 가득 차 계획대로 움직이지 못했어요. 이들에게는 각자 알아서 주변 길로 흩어져 합류하도록 했어요. 이때부터는 이미 전체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김 국장의 계획대로 움직인 무리가 상당수였겠지만, 그러지 않고 자율적으로 이동한 무리도 꽤 되었다는 뜻이다. 그 자율성이 발현된 것은 역시 그 무리에 속한 몇 명의 리더를 중심으로 스웜 인텔리전스가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2006년 3월 미국에서 포착된 작은바다쇠오리 떼의 비행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함성의 파도
공연장에서 한 사람이 박수를 치면, 마치 파도처럼 옆사람에서 옆사람으로 박수갈채가 이어지며 모든 사람이 박수를 치는 현상이 나타난다. 복잡적응계에서 개별 구성원 간의 상호작용으로 이뤄지는 ‘되물림’ 현상의 대표적인 사례다. 함성을 지르기로 약속된 시간은 저녁 6시30분이었다. 시계로 6시30분을 확인하며 ‘왜 시작하지 않지?’란 생각이 들기 시작할 때였다. 저 멀리서 “와”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거대한 쓰나미처럼 함성의 파도가 기자를 덮쳤다. 그 순간 기자 역시 “와” 하는 함성을 지르게 됐다. 저 멀리까지 퍼져 나간 함성은 또다시 기자에게 다가와 다시 한 번 함성을 지르는 기회를 만들어줬다. 멀리서 듣는다면, 소리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흘렀다가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흐르며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함성의 파도로 느껴졌을 것이다. 어느 응원단이 연출한 장면이었다면 엄청난 연습으로 성공적인 연출을 했겠거니 할 만한 장면이지만, 이것은 아무도 연습하지 않은 즉석의 연주였다. 이 역동적 패턴은 그저 “옆사람이 함성을 지르면 따라 함성을 지른다”는 단순한 규칙에서 비롯되었다. 야구장에서 흔히 보는 ‘파도타기’ 응원도 같은 원리다. 개인에서 개인으로 빠르게 정보가 전달되면서 나타나는 집단행동의 양상이다.
집단지성의 힘
이날 집회가 끝난 뒤, 박상철 경기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날의 평화집회에 대해 “전형적인 집단지성이 작용해 평화롭고 집단적인 질서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스웜 인텔리전스는 다수 군집의 이동을 설명하기에 좋은 도구이긴 하지만, 이를 소개한 책 <보이지 않는 지능>은 극장에서 불이 났다고 가정해 각 개체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비좁은 출구를 향해 나가는 속도는 모두가 서두를수록 더 느려지며, 모두가 속도를 조금씩 줄이고 차례로 움직일 때 오히려 전반적인 이동 속도가 더 빨라진다는 것이다.
이날 집회에서 개별 참여자들은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공감대를 갖고 스스로 움직임을 제어하며 행진했다. 2㎞가 넘는 기자의 행진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것은 이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지능>은 이와 같은 개체의 의지를 중시한다. “지식과 목적을 가진 개체가 빠진 스웜 인텔리전스는 집단을 유지하고 집단이 환경에 반응하도록 해주긴 하지만, 상황을 주도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이날 벌어졌던 집회에서는 수많은 사람을 찾아볼 수 있었다. 내자동을 향해 행진하려는 사람들, 전체 집회의 전망이 보이는 계단 쪽에 앉아 시민들의 거대한 힘을 보려는 사람들, 도로에 가지런히 앉아 연단에 오른 평범한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 이 수많은 사람의 다양한 의지는 ‘박근혜 퇴진을 관철해야 한다’는 공감대 아래 서로에 대해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날 모인 사람들 다수는 이 ‘목표’를 위해 ‘질서를 지켜 평화집회를 열자’는 생각이 다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 국장은 “그날 시민들이 그렇게까지 많이 모이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모두 질서 있게 움직여주셔서 사고 없이 잘 진행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날 경복궁 앞에 처음 도착한 시간은 저녁 7시께였다. 이후 1시간 정도 걸려 대부분의 행진이 마무리됐다. 기자 역시 8시께 경복궁 앞을 지나 내자동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19일 열린 제4차 촛불집회도 일주일 전의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이날 기자가 참가한 광화문에서의 행진도 사고 없이 평화적으로 마무리됐다.
음성원 권오성 기자
esw@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