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가 ‘인류세’(Anthropocene) 곧 인류로 인한 지구온난화와 생태계 침범을 특징으로 하는 지질학적 시기라는 데 대해서는 큰 논란이 없지만, 인류세가 언제 시작했는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세계 곳곳의 인류학자 250여명이 참여한 국제공동연구팀은 전지구의 토지 이용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분석해 “인류가 지구를 ‘망치기’ 시작한 것은 1만년 전부터”라는 결론을 내렸다. 연구 논문은 과학저널 <사이언스> 최근호에 실렸다.
기후변화, 지구온난화, 재생에너지 등이 주요 사회 이슈로 떠오르면서 자칫 이런 주제들이 현대 세계에 국한한 것으로 치부되기 쉽다. 논문 저자 가운데 한 명인 미국 시카고 필드자연사박물관의 인류학전시책임자 게리 파인만은 “방대한 정보를 모아 분석한 결과 토지 이용에 따른 전지구적 환경 변화는 적어도 3000년 전에 일어났다. 이는 인간의 환경 훼손을 새로운 현상으로 보는 견해가 너무 가까운 과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현재 진행되고 있는 기후변화 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류가 환경을 훼손해온 역사를 파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미국 펜실베니아대 루카스 스테판과 메릴랜드대 에얼러 엘리스가 주도한 연구는 ‘아키오글로벌’(ArchaeoGLOBE)이라는 대형 연구사업의 하나로 추진됐다. 아키오글로브는 세계의 146곳의 토지 이용에 대한 지역 전문가들의 평가를 온라인 조사를 통해 통합하는 작업이다. 1300명의 인류학자들한테 80여 항목의 설문이 지난해 5월18일부터 6월30일까지 전달됐다. 설문에는 언제 수렵에서 농사로 전환했는지, 가축을 기르기 위해 초목을 개간했는지 등의 질문이 담겼다. 해당 지역의 토지 이용에 대해 기원전 1만년, 8000년, 6000년, 4000년, 3000년, 2000년, 1000년, 기원후 1500년, 1750년, 1850년 등 10개 시기별로 평가를 하도록 하고, 토지 이용을 크게 수렵·채집·사냥, 조방 농업(extensive), 집약(intensive) 농업, 유목 등 4가지로 분류하도록 했다.
페루 토라타계곡의 농지. 600년 전부터 개간돼 현재까지 농사를 짓고 있다. ‘사이언스’ 제공
255명의 인류학자들이 보내온 711개의 답변(한 전문가가 여러 지역에 대해 답변)을 수집해보니, 고대 인류가 토지를 이용한 많은 방법들은 많은 이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분석 결과 사냥과 수렵 활동이 감소한 시기는 1만년 전~3000년 전으로, 1000년 전에는 이미 모든 지역이 농사로 전환했다. 기존 모델들은 가설에 가설을 더해 인류의 농사 전환 시점을 500년 전으로 분석해왔다.
파인만은 “1만2천년 전 인류는 주로 수렵 활동을 했는데, 농민처럼 주변 환경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과는 달리 환경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3000년 전쯤에는 많은 인류가 지구의 곳곳에서 매우 환경 파괴적인 농업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시기 인류는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숲을 개간하고 작물과 가축이 인간에 의존하도록 재배하거나 사육하기 시작했다. 또 양치기들은 토지를 정리하고 동물을 선택적으로 사육함으로써 주변 환경에 변화를 가했다. 이런 변화는 매우 다양한 속도로 진행됐지만 사례들은 광범위하게 일어났고 이는 인류가 지구와 자연자원과의 관계를 어떻게 악화시켜왔는지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해준다.
논문 공저자인 필드자연사박물관 부전시책임자인 라이언 윌리엄스는 “환경 훼손의 악화 경로가 드러났다. 현재의 환경 변화 속도가 훨씬 빠르긴 하지만 이미 인간의 활동이 수천년 전부터 지구에 영향을 가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이런 결과들이 비관적이지만은 않다고 밝혔다. 연구자들은 환경 훼손의 시발에 대해 이해하게 됐고, 이들 데이터를 고대인들이 숲파괴와 식수 고갈 등의 부정적 영향을 줄이기 위해 적용했던 해결책에 대한 연구에 사용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파인만은 “오늘날 기후변화와 환경파괴가 전에 없이 빠른 속도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이번 연구는 오늘날의 문제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 과학은 현재가 과거와 어떻게 다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번 연구 역시 과거가 현재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또다른 균형추로서의 구실을 한다. 토지 이용은 오늘날 훨씬 가속화하고 있지만 인류는 오래 전부터 해온 일이다. 이런 현상은 이미 3천년 전에 시작됐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의 뿌리가 깊다는 것을 의미하고 해결책 또한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연구팀은 지적했다.
이근영 선임기자
ky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