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쉴레, ‘죽음과 소녀’ (1915).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2010년 칠레 광부 매몰사건을 기억하시는지요. 광산에서 일하던 광부 33인이 69일을 버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기적적으로 구조된 사건. 칠레 대지진의 여파로 갱도가 무너지면서 광부들은 대피 구역에서 살아남았지만, 열악한 조건에서 이들의 생존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하지만, 국제 협력이 이뤄지면서 이들은 살아남았지요. 칠레 기술로는 구조를 위해 넉 달 이상이 필요했지만, 미국 기술자들이 투입되어 기간을 석 달로 단축했고 나사는 특수 음식을 투입, 이들의 생존을 도왔습니다. 볼리비아와 칠레는 전쟁으로 사이가 틀어져 있었어요. 갇힌 33인 중에 볼리비아인이 한 명 포함되어 있었고, 볼리비아가 이들을 돕는 데 손을 내밀면서 두 국가의 관계가 회복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구조 과정은 생중계되었고 칠레 전역과 전 세계의 인류애를 달구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아름다운 협력과 무사 귀환의 이야기는 책과 영화로 만들어졌죠.
칠레 광부 33인의 이야기는 2015년 영화 ‘33’으로 만들어졌다. 감동적인 실화를 다룬 영화는, 그러나 영웅주의에 적당히 기대어 관습을 반복한다는 평을 들으며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감독과 제작진의 미숙함을 탓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실화가 주는 ‘감동’이라는 부분이 무엇인가’라는 생각 말이다. 출처: 아이엠디비
하지만, 하나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이들의 구조 비용은 약 100억~200억원으로 추산되었는데,[1] 이 비용은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이 전 세계 에이치아이브이(HIV)나 말라리아 퇴치를 위해 2018년 동안 들인 비용 각각에 상응합니다.[2] 물론, 이 비용이 거의 연구비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에이치아이브이로 인한 사망자가 70만명, 말라리아로 인한 사망자가 1년에 40만명으로 추산되는 상황에서[3, 4] 33명을 살리기 위해 백만명을 살릴 수도 있는 비용을 들이는 것은 정당할까요?
더 쉬운 비교를 위해 국내 보건의료재정을 살펴볼게요. 2015년도 ‘의료기관 소재지 및 유형별, 수술 입원 환자수, 총재원일수, 총진료비’ 통계에 의하면 서울 강북구나 은평구 등 환자가 1만5000명 정도 발생한 지역이 소비한 총진료비가 200억원 정도입니다.[5] 비용으로만 비교해 보자면, 칠레 광부 33인을 구조하는 데 드는 비용이면 우리나라에서 1년 동안 1만5000명이 진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1만5000명을 치료하는 대신 33인을 살리는 데 비용을 지출한 것은 타당할까요?
어떻게 사람 목숨을 비용으로 계산하냐고 하지만, 여기에서 비교하는 것은 각자의 목숨값이 아닙니다. 각 사람이 비할 데 없이 소중한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을 살리는 게 낫겠죠. 그렇다면 33명을 살리는 것보다는 1만5000명을 살리는 게 더 좋은 일 아닐까요? 33명을 살리는 것보다 백만명을 살리는 데 투자하는 게 더 정당한 일이 아닐까요?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불쾌함 또는 어색함을 느끼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칠레 광부를 돕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당장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인간의 의무죠. 그 원천으로 동양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말했고 서양은 연민(pity)을 가리켰습니다. 비정부 기구가 기부를 요청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소년 또는 소녀의 사진입니다. 시급한 변화를 증명하는 통계자료보다는 도움을 요청하는 한 소녀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지갑을 열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요.[6]
스탈린은 말했다지요.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명의 죽음은 통계다.” 이 말에는 어떤 전도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과 백만명의 죽음 중 더 심각한 사태는 무엇일까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비극과 통계 중 더 심각한 것은 무엇일까요? 보통 통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문학과 과학에 일반적으로 배정하는 신뢰의 수준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죠. 하지만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한 사람의 죽음과 비극입니다. 더구나 한 사람의 죽음을 중요시하는 것은 결코 심리적 착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유명해진 경차 문제는 돌진하는 기차를 놓아두어 다섯 사람을 죽일 것인가 아니면 진로를 틀어 한 사람을 죽일 것인가를 물었죠. 이 문제를 놓고 사람들은 의무론과 공리주의라는 윤리 이론의 오랜 대립을 떠올렸어요. 하지만 이 문제를 연구하면서 사람들은 알게 됩니다. 수치 비교는 사람들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요. 오히려 사람들은 내가 어떤 일을 일으키는지, 그 일이 나와 얼마나 밀접한지를 더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따졌어요.
식별 가능한 생명 대 통계적 생명의 문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눈앞 한 사람의 죽음과 저 멀리 백만명의 죽음 중 어느 쪽을 막을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양쪽을 택할 수 있는 근거가 모두 존재합니다. 눈앞 한 명의 죽음을 막으려 하는 사람은 측은지심에 호소합니다. 당장 살릴 수 있는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반면, 저 멀리 백만명의 죽음을 막아야 한다는 사람은 그 의도와 결과에 호소합니다. 백만명의 죽음을 막으려는 의도가, 결과적으로 한 명 대신 백만명을 살린다는 결과가 더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생각보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심리학에선 위험에 처한 사람 수에 따라 목숨의 가치가 변하는 현상을 놓고 여러 모형을 제시한 바 있다. 전통적인 기준(“모든 생명은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나 “대량의 인명 손실은 큰 비극이다”)에선 사망자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생명 손실의 가치는 일차함수나 지수함수를 따라 증가한다. 그러나, 인간 심리는 받아들일 수 있는 자극에 한계가 있기에 사람 수가 늘어나면 자극도, 그 가치도 작아짐을 관찰하게 된다. 이것을 심리신체적 감각마비 현상이라고 부른다. 한편, 폴 슬로빅은 생명의 가치가 더해지지 않으며, 오히려 위험에 처한 사람의 수가 많아질수록 느끼는 감정이 줄어드는 현상을 관찰했다. 대재앙 앞에서, 우리 동정심은 붕괴한다. 출처: 논문[7]. 시각화는 필자
이것을 의료윤리에선 식별 가능한 생명 대 통계적 생명의 문제라고 부릅니다. 훨씬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 방법과 당장 눈앞에 들어온 사람의 목숨을 구할 방법 중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코로나19 사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은 코로나19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평소 보지 못했던 보건의료의 몇몇 지점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온몸이 마비되어 왼팔만 쓸 수 있는 지체장애인이 자가격리되었을 때, 그는 보급품으로 받은 생쌀, 생배추, 라면을 먹을 수 없어 하루에 한 번 배달음식을 시켜야 했고, 대충 물로 몸만 훑고 옷을 갈아입는 데도 한 시간 반이 걸렸습니다.[8] 그가 대구에서 살고 있었고, 대구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취약계층을 돌볼 여력이 없다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지요.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무의식중에 결론을 내리고 있지요. 코로나19에 자원을 먼저 투여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이 감염될 것이기에 이런 선택은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선택은 우리에게 강렬하게 인식된, 손에 잡히는 문제를 다른 문제보다 우선한 것일 뿐인 건 아닐까요? 저 멀리 있는 백만명의 목숨 대신, 눈앞 한 명의 목숨을 구하는 게 당연하듯 말입니다.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닐 거예요. 그것은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와 같이 놓고 생각해봐야 합니다. 위 질문을 따질 때 중요한 것은 결국 ‘몇 명이냐’가 아니라 ‘누구의 죽음이냐’가 문제이기 때문이죠. 현재 우리가 가진 죽음에 관한 생각은 그 자체로 따져보는 것보다, 우리 이전 세대의 생각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잘 보이기 마련입니다. 이전 세대의 죽음을 보여주는 소설로 저는 주저하지 않고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꼽아요.
이반 일리치가 보여준 근대의 죽음
러시아의 대문호 중 하나인 톨스토이가 1886년 발표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이반 일리치라는 한 관료의 죽음을 다룬 경장편이에요. 일리치는 세상의 관점에서 뛰어난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학교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내 법률가가 되었고, 일 처리도 뛰어났으며 대인관계나 수완도 좋았죠. 재기발랄하고 부유한 아가씨를 아내로 맞은 그는 아이를 기르는 과정에서 가정에 관한 관심을 끊고 일에 집중하지만, 그것은 근현대 사회가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것으로 주입해 온 가치가 아니었던가요. 어려운 기회에 승진까지 거머쥔 일리치는 자신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새로 산 집을 꾸미기 시작해요. 하지만, 일리치는 집을 꾸미는 와중에 옆구리를 다칩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긴 일리치는 점차 고통이 심해짐을 알게 되며, 어떤 의사도 치료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비록 톨스토이가 계속 제동을 걸지만, 일리치는 사회적으로 볼 때 흠잡을 데 없는 인물입니다. 예컨대, 그가 업무를 처리하면서 공과 사를 구별하는 모습을 볼까요.
그러나 대체로 이반 일리치의 생활은 그의 신조대로 <편안하고 유쾌하며 품위 있게> 흘러갔다. 그는 아침 9시에 침대에서 일어나 커피를 한잔 마시고, 막 배달된 신문을 읽은 다음 제복을 갖춰 입고 법원으로 출근했다. 사무실에는 그를 꿰어 갈 업무라는 이름의 고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곧장 고삐에 뛰어들었다. 청원자들, 질의 문서들, 일반 서류 업무, 공판과 공판 준비 회의 등이 그의 고삐였다. 이런 일을 할 때는 업무의 순조로운 흐름을 방해하는 모든 날것들과 살아 있는 것들을 배제시킬 줄 아는 요령이 필요했다. 공무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과 그 어떤 관계도 갖지 말아야 했으며, 어떤 관계가 발생할 경우 그 동기와 결과가 모두 공적인 것이어야 했다.[9]
공무원으로서 그는 당대 사회의 요구를 철저하게 따르는 인물이었어요. 그가 맺은 사회적 관계도, 가정도, 집도, 어느 하나 벗어남이 없었습니다. 그는 지방에서부터 점차 중앙으로 승진해 올라가며, 그에 따라 만나는 사람도 바뀌지요. 그가 사적인 욕심을 부렸다거나 하는 모습은 어디에도 표현되어 있지 않아요. 그만의 성실함으로, 이 모든 것을 담아가지요. “<그래도 최소한 이유는 알아야 할 거 아냐? 그런데 그게 불가능해.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한다면 설명이 가능하겠지. 그렇지만 그건 인정할 수가 없어.> 그토록 반듯하고 올바르고 품위 있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떠올리며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1908년의 톨스토이. 그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가 중 한 사람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생의 진실을 깨닫기 위해 끝까지 경주한 흔적이 소설 안에 켜켜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초기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로 유명 소설가의 반열에 오른 톨스토이는 자기 삶을 회의하면서 재산을 포기하고 농부로 돌아가겠다고 선언, 금욕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러던 그가 다시 소설 집필을 시작했던 것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며, 그는 여기에서 죽음을 마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고 씨름한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톨스토이는 이런 일리치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비판합니다. 그는 천박한 자로 ‘속물’일 뿐,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 줄 모른다는 거지요. 이를테면, 위에서 인용한 일리치의 업무적 태도는 톨스토이가 보기엔 잘못입니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는 현명한 법학자이기라도 한 듯이 올바른 결정에 도달하기 위해 특수한 사실들을 추려내고, 관계없는 것들은 모두 배제하고, 규범을 적용한다.”[10] 이런 식의 법과 윤리는 판단에서 정말 중요한 사건의 구체적인 요소를 무시하기에, 결코 올바른 결정에 도달할 수 없음에도 ‘공평무사함’이라는 외피가 그것을 올바른 것처럼 꾸밉니다.
외피, 그것이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아온 일리치의 잘못입니다. 흠잡을 데 없는 삶임에도 그것이 ‘잘못’인 이유는, 그것이 진짜 삶을 가렸기 때문이라고 톨스토이는 강변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살아온 삶 전체가 <그게 아닌 것>이었다는 사실을, 모든 게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가려 버리는 거대하고 무서운 기만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침상의 고통 중에서 문화, 사회, 심지어 의학마저도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제도라는 것을 발견한 것인데요. 톨스토이는 일리치를 통해 정말 중요한 건 “지난 삶에 대한 정당화”를, ‘속물’적 태도를 버리고 진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외치죠.
저를 가르쳐 주신 여러 선생님은 이반 일리치로부터 자기 세대의 죽음을 보았어요. 한 예로 고(故) 김진영 선생님의 경우, 프랑스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가 정리한 죽음의 역사 마지막에 놓인 ‘현대의 죽음’에 일리치의 죽음을 겹쳐 놓습니다. 죽음은 소외되고 타인의 것(“나는 죽지 않아, 죽는 것은 저들이야”)이 되며, 심지어 시장에서 처리되게 되었다고 김진영 선생님은 생각합니다. “전 재산인 집 한 채를 날려서라도 돌아가시는 분이 병원에서 품위 있는 죽음을 맞도록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우리를 꼼짝 못 하게 만듭니다. 죽음 장사인 의료 행위를 정당화하는,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고 비판할 수 없을 만큼 견고한 이데올로기 장치가 지금 작동되고 있습니다.”[11] 톨스토이의 진짜 삶을 향한 외침을, 김진영 선생님은 “죽음에 대한 권리 되찾기”로 해석합니다. 죽음에 대한 권리를 의학에, 기업에 빼앗긴 우리는 이제 다시 죽음에 대한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죠.
맞아요. 죽음은 우리 손에서 빠져나갔습니다. 우리는 다른 손들에 의해 죽음을 좌우 당하는 느낌을 받곤 하죠. 노쇠한 몸을 거칠게 다루는 병원 침상을 보며, 상조 회사에 점령당한 장례식장을 보며 죽음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죽음이 언제 우리 것이었던 적이 있었나요? 그렇지 않지요. 우리는 죽음을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자살이 아니라면, 개인이 죽음을 좌우할 수 있던 적이 있었을까요? “죽음에 대한 권리 되찾기”는 안타깝게도 자살 담론이 되고 맙니다.
죽음 앞에서 삶을, 타인의 손에서 죽음을 되찾아야 함을 외쳤던, 그리하여 해방을 꿈꿨던 세대가 바라본 죽음. 개인의 삶을 완성하는 죽음. 하이데거가 말했던 것처럼, 죽음을 잊어버리는 보통 사람들의 자세에서 벗어나, 죽음을 적극적으로 껴안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전 이런 죽음에 대한 태도를 이전 세대의 것으로 생각해요. 그것은 실존하는 개인의 눈으로 직시한 죽음이었을지언정, 함께하는 죽음은 아닙니다. 개인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일 뿐, 우리가 함께 죽음이라는 사태를 만나는 방식은 될 수 없다는 거지요.
어떤 생명을 우선하시겠습니까?
일리치가 질병 앞에서 내지르는 비명은 “알 수 없다”는 거였어요. 어떤 의사도 자신의 상태를 명확하게 말해주지 못하고, 자신이 살지 죽을지 확답을 해주지 않는 상황 앞에서 절망하지요. 하지만 현대 의학은 비록 100%는 아니라 해도, 상태를 명확하게 말해주고 살지 죽을지 알려주는 데에 도달했어요. 장기이식은 죽음의 정의를 바꿨고, 생명유지장치는 의식이 없더라도 신체는 유지할 수 있으며, 이제 태어날 아기의 특징도 바꿀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요. 죽음은 달라졌어요. 완전히 통제할 수 없더라도, 죽음은 예측할 수 있고 심지어 개입 가능한 현상이 되었어요. 그것이 이반 일리치가 마주한 고전 시대의 의학과 우리가 처한 현대 의학의 차이예요. 이를 우리의 물질적 상황이 달라졌다고 표현해 볼 수 있겠지요.
죽음을 예측할 수 있는 시대, 우리는 죽음을 공공의 비용으로 껴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죽음은 이제 개인이 혼자서 당면해야 하는 과제 또는 적이 아니에요. 우리 시대, 죽음은 사회가 결정합니다. 누가 더 쉽게 죽을지, 누가 더 죽음에 멀리 있을지를 결정하는 것은 사회지요. 가깝게는 개인의 식생활과 주거의 선택에서부터, 멀리는 어떤 목숨을 먼저 살릴지의 선택에까지. 그것은 단독자로서의 개인이 결정하는 문제를 넘어섰어요. 죽음은 공공의 문제며, 우리의 이슈이고, 함께 마주하는 서로의 일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떤 목숨을 살릴지 결정해야 해요. 우리가 결정하지 않아도, 이미 사회는 특정 목숨을 우선하고 있지요. 유력자의 목숨, 경제적으로 부유한 자의 목숨. 가끔 사회는 “눈에 잘 들어오는” 목숨을 살리고는, 그것을 사회가 우리를 지키고 있다는 증거로 내놓곤 합니다. 그 뒤에 가려져 있는 수많은 죽음을 남겨놓은 채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으로 글을 시작했어요. 코로나19 사태를 마주하고 있는 우리는, 가까운 한 사람의 목숨과 먼 여러 명의 목숨 중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할까요? 이 질문이 답하기 무척 어려우며 불편함에도 대답을 같이 논의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떤 목숨을 살릴지 결정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틀 자체를 비판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노력도 필요해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이를 결정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며, 정당한 이유를 찾아봐야 한다는 거예요. 사회가 그저 관성대로 누군가의 목숨을 우선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데에, 우리는 질문을 던져봐야 해요. 그 결정은, 정의로운가요?
김준혁 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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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nnual Report 2018. 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 [Internet]. N. D. [cited Mar 9, 2020]. Retrieved from: https://www.gatesfoundation.org/Who-We-Are/Resources-and-Media/Annual-Reports/Annual-Report-2018.
3. Number of deaths due to HIV/AIDS. World Health Organizations [Internet]. N. D. [cited Mar 9, 2020]. Retrieved from: https://www.who.int/gho/hiv/epidemic_status/deaths_text/en/.
4. Malaria. World Health Organizations [Internet]. Jan 14, 2020 [cited Mar 9, 2020]. Retrieved from: https://www.who.int/news-room/fact-sheets/detail/mal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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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Västfjäll D, Slovic P, Mayorga M, Peters E. Compassion Fade: Affect and Charity are Greatest for a Single Child in Need. PLoS ONE. 2014;9(6):e100115. https://doi.org/10.1371/journal.pone.0100115.
7. Slovic P. “If I look at the mass I will never act”: Psychic numbing and genocide. Judgm Decis Mak. 2007;2(2):79-95.
8. 김유나, 정현수, 임주언, 김판. [이슈&탐사] 중증장애인, 왼팔로만 버틴 11일의 자가격리. 국민일보 [Internet]. 2020년 3월 6일 [cited at 2020년 3월 9일]. Retrieved from: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26608&code=11132000.
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석영중, 정지원 옮김. 이반 일리치의 죽음•광인의 수기 [전자매체본]. 열린책들; 2018.
10. 게리 솔 모슨, 캐릴 에머슨 공저. 오문석, 차승기, 이진형 공역. 바흐친의 산문학. 책세상; 2006. 66쪽.
11. 김진영. 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 읽기 [전자매체본]. 메멘토;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