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에서 한 임신부가 구조대원들 도움으로 홍수로 물에 잠긴 집에서 탈출하고 있다. 카본 브리프 제공
세계의 기후위기 관련 연구 논문들은 기상 이변과 감염병 확산 등 기후변화 영향에서 남녀가 평등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기후환경 관련 비영리단체인 ‘카본 브리프’는 1일 세계 기후위기 관련 논문 130건을 분석한 결과, 여성과 소녀들은 기후변화의 영향에서 남성이나 소년들에 비해 훨씬 더 높은 위험에 놓이는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혔다.
카본 브리프는 2007년 발리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회의에서 구성된 ‘국제성·기후연합’(GGCA)이 2016년에 발표한 보고서를 기초로 최근까지 진행된 관련 연구들을 총망라해 분석했다.(참고 :
130건 논문의 주제 및 지역별 분포도)
카본 브리프 분석 결과, 130건의 연구 논문 가운데 89건(68%)이 여성이 기후변화와 관련한 건강 영향에서 남성에 비해 많은 피해를 받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와 중국, 인도의 폭염 때와 방글라데시, 필리핀의 태풍 때 더 많은 여성과 소녀가 목숨을 잃었다. 또 세계 많은 지역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극한 기상 후유증으로 정신적 건강과 배우자의 폭행,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는다. 반면 남성에게 영향을 더 미치는 경우가 나타난 논문은 30건(23%)이었다. 나머지 11개 논문(8%)에서는 성별 차이가 없었다.
130건 가운데 한국 연구도 한 편 들어 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김호 교수 연구팀이 과학저널 <정신의학연구> 2011년 4월30일치에 발표한 것으로, 2001~2005년까지 일일 기온과 자살률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논문이다.
연구팀은 봄철과 여름철의 고온 환경이 자살률을 높이는 경향이 있으며, 일 평균기온이 1도 증가할 때마다 자살률이 1.4% 높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특히 자살 위험은 여성, 젊은이, 고학력자보다 남성, 노인, 저학력자에서 높았다.
방글라데시 보구라에서 여성들이 홍수로 잠긴 도로에서 전통의상인 사리를 입고 어렵게 물살을 헤쳐나가고 있다. 카본 브리프 제공
극한 기상에 따른 여성 사상자 많다는 논문이 남성의 2배
기후변화는 극한 기상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올해 대서양 열파는 기후변화에 의해 600배가 증가한 것으로 보고됐다. 2018년 북반구의 폭염은 기후변화가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기후변화는 태풍과 가뭄, 산불 등 다양한 기상 이변으로 표출되고 있다.
분석 대상 가운데 53건의 논문은 극한 기상 이변에서 남녀 사상자 비율을 분석했다. 이 가운데 34건(64%)은 여성이 극한 기상에서 사망하거나 부상할 확률이 남성보다 높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반면 13건(25%)은 남성이 여성보다 피해가 큰 것으로 분석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나 관습이 위험을 키우기도 한다. 지난 2월 의학저널 <랜싯>에 관련 논문을 발표한 킴 반 다알렌 영국 캠브리지대 연구원은 “여성들이 맞닥뜨리는 위험은 남녀의 신체적인 차이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에 의해서도 증폭된다”고 밝혔다.
한 연구 논문에서는 방글라데시에서 태풍이나 홍수가 닥쳤을 때 움직이기 힘들게 만드는 전통 옷(사리)을 입은 여성들은 물살을 헤치고 탈출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다른 연구에서는 1998년 방글라데시 수도인 다카에서 홍수가 발생했을 때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병원 치료를 적게 받은 원인을 분석했다. 여성들은 전통적 관습 때문에 남성 보호자가 있어야만 외출을 할 수 있었다.
85개의 중저소득 국가를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진행된 2016년 발표 논문에서는 남성에 비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은 국가들에서 극한 기상 이변에 의한 여성 사망률이 훨씬 높았다. 하지만 다른 연구들에서는 고소득 국가에서도 여성이 남성에 비해 극한 기상 이변 때 사망할 확률이 더 높았다.
한 연구에서 프랑스에서 폭염 사망률이 여성이 더 높았고, 런던, 파리, 로마 등 유럽 9개 도시를 대상으로 조사한 2012년 논문에서도 여성의 사망이 더 많았다. 유럽 여성의 폭염 사망률이 높은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부 논문들은 기저질환이 있는 여성 노인들이 폭염에 특히 취약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미국 캘리포니아 건빌의 물에 잠긴 도로에서 구조대원들이 커누를 타고 접근해 피난민을 구조하고 있다. 카본 브리프 제공
반면 미국과 호주의 일부 연구들은 남성의 폭염 사망률이 여성보다 높다고 보고했다. 미국 국민건강보고서는 2006~2010년에 극한 고온에 따른 남성의 사망률이 여성에 비해 2.6배 높다고 보고했다. 국제성·기후연합(GGCA)의 2016년 보고서를 작성한 샘 셀러스 미국 워싱턴주립대 연구원은 “미국의 폭염에 의한 남성 사망률이 높은 것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남성 노인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크리스티 에비 워싱턴주립대 교수도 “미국 등 고소득 국가에서는 남성들이 야외에서 노동을 하거나 여가를 보내는 일이 더 많기에 폭염에 노출될 확률이 높아서”라고 풀이했다. 2018년에 발표된 논문에서는 미국 50개 도시에서 남성들이 여성에 비해 실외에서 폭염에 더 많이 노출된다는 분석이 담겼다. 또 미국과 호주에서는 남성들이 여성에 비해 홍수로 인한 사망이 많았으며, 이유는 남성들이 구조 활동에 더 많이 투입되기 때문이라고 관련 논문들은 밝혔다.
미국에서 2005년 카트리나 허리케인이 기습한 뉴올리언스에서 배우자 폭력과 성폭력이 증가했다는 연구도 있으며, 2004년 뉴질랜들에서 홍수 피해 뒤 가정폭력이 늘어나고, 방글라데시에서 2007년 홍수 뒤 여성에 대한 폭력이 증가했다는 연구도 있다.
기후변화는 여러 형태로 ‘식량 불안정’(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식품을 구매하거나 섭취할 수 없는 상태)을 야기한다. 기온 상승과 강수량 변화는 식량 수확량에 영향을 끼치고, 가뭄같은 극한 기상 이변은 예상 못한 식량 감소를 낳는다.
중저소득 국가에서는 식량 불안정은 국민 건강과 직결된다. 논문들은 중저소득 국가에서 기후에서 유발된 식량 불안정이 여성의 건강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고 밝히고 있다.
14건의 관련 논문에서 11건(79%)은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분석했다. 라만 프리트 스웨덴 우메오대 교수는 “기후변화가 유발한 식량 불안정이 여성에 더욱 심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중저소득 국가의 역사적인 사회적 지위체계를 이해해야 한다”며 “먹을 식량이 적을 때 누가 더 많이 가져가겠는가? 많은 경우 남성이다. 새로운 것도 아니다. 이런 성 역할은 수천년 동안 내려온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연구 논문들은 인도, 이란, 남아프리카공화국, 가나, 니카라과 등에서 기후변화로 인한 식량 불안정 시기에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더 쉽게 음식을 포기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많은 지역에서 남자 아이에 비해 여자 아이들이 음식에서 배제되기 쉽다.
예를 들어 필리핀에서 진행된 한 연구는 태풍이 닥친 뒤 몇달 동안 여자 아이들의 영아 사망률이 남자 아이들보다 높았다. 이는 음식이 부족할 때 여자 아이보다 남자 아이한테 우선적으로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연구자들은 분석했다.
그린란드에서의 한 연구는 기후변화로 북극 사냥감들이 줄어들어 남성들이 사냥이 어려워지자 여성 배우자한테 경제적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이 연구에서는 사냥의 실패가 가정 폭력을 증가시켰다는 점도 드러났다.
130건의 기후변화 관련 논문을 주제와 지역별로 배치한 지도. 한국에서는 기온 변화에 따른 자살률 분석 논문이 인용됐다. 카본 브리프 제공
기온 상승으로 야생동물과 그들이 전파하는 감염병이 새로운 지역으로 퍼져나가 사람들이 매개 질병과 전염병에 잘 걸리게 된다. 지난해 발표된 한 논문은 기온 상승 결과로 2080년까지 10억명 이상의 인구가 모기 매개 질병에 노출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지난 5월 카본 브리프는 기온 상승은 코로나19 같은 수많은 동물 매개 질병(인수공통감염병)에 노출될 확률을 높일 것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여기에 더해 해수면 상승도 감염병 노출을 강화하는 구실을 한다. 일부 감염병원균은 저염수에서도 생존하는데, 해수면 상승은 저염수를 사람들이 사는 지역까지 가까이 접근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한 연구 논문들은 해양 온난화가 해양 박테리아의 확산을 돕는다고 분석하고 있다.
기후변화 유발 감염병 관련 논문 14건 가운데 9건(64%)은 남성이 여성에 비해 감염병에 노출될 위험이 큰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여성이 더 높다는 논문은 4건(29%)에 그쳤다.
이유는 남성들이 야외 노동이나 여가 활동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빌하르츠 주혈 흡충증’(아프리카와 남미 일부 지역에서 흔한, 작은 기생충이 혈관 속으로 파고드는 질병)은 오염된 물에서 사람간에 전파되는 기생충에 의해 전염되는, 신체를 쇠약하게 만드는 질병으로, 열대 아프리카에서 가장 창궐하는데 몇몇 연구들은 기온 상승이 이 질환의 발생을 높인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북미에서 진행된 연구들은 남성들이 라임병(진드기가 옮기는 세균에 의한 전염병)에 더 잘 걸린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유는 남성들이 야외 노동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 진드기에 노출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연구 논문들은 라임병 노출 지역이 지구온난화에 의해 미국과 캐나다에서 점점 더 북상하고 있다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다.
반면 여성들은 집 안에서 질병에 노출되기 쉽다. 일부 연구는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말라리아 위험이 크다고 밝혔다. 중저소득 국가에서 여성들은 집 안이나 주변에서 오염된 물과 접촉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니제르에서 한 여자아이가 밭에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카본 브리프 제공
기후변화와 정신건강의 관계는 복잡하다. 연구 논문들은 기상 이변이 가족과의 사별, 부상, 경제적 손실 등으로 인한 정신 질환 위험성을 증폭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헬렌 베리 호주 시드니대 교수는 “기후변화는 많은 사람들한테 영향을 미치지만 일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부상이나 주택 훼손, 일자리 상실, 심지어 생명의 박탈까지 피해를 더욱 자주 받는다”며 “이런 일들이 장기적으로 정신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데 이와 관련한 연구는 미미하다”고 말했다.
기후변화와 관련한 정신 질환과 성별 차이를 연구한 논문 28건 가운데 19건(68%)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밝혔다. 미국과 호주, 미얀마에서의 연구는 여성들이 태풍 이후 심리적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끔찍한 경험을 한 뒤 나타나는 우울증·초조감·죄의식·공포감·성격 변화 따위)를 더 겪는다는 것을 보여줬다. 영국과 중국에서의 연구는 홍수 뒤에 같은 현상을 분석했다. 논문들은 그 이유를 밝혀내지는 못했다.
다만 세계보건기구(WHO)는 여성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영향을 받는 가장 큰 단일집단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이는 성적 학대와 높은 상관성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일부 연구는 성폭력 위험이 극한 기상 이변 기간이나 이후에 상승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더해 여성들은 극한 기상 이변에 따른 우울증과 정신적 고통을 겪을 확률이 높다.
반면 일부 연구들은 남성이 여성에 비해 극한 기상 이변에 따른 자살률이 높다고 밝혔다. 인도와 호주에서의 연구는 남성 농장주들이 가뭄 등으로 피해를 입은 뒤 자살 위험이 극히 높아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호주에서는 성 역할에 대한 불균등한 의식과 역경에 맞서 싸워내야 한다는 남성주의 등이 원인으로 분석됐으며, 인도에서는 불공정한 곡물 가격과 부채가 원인이었다. 한국의 연구도 여기에 포함된다. 전 세계에 걸쳐 극한 기상 이변에 따른 남성의 자살률이 여성보다 2배 많았다.
기후변화는 임산부에게 영향을 끼친다. 기후변화는 한편으로는 산모와 태아의 잠재 위험을 키우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임신을 기피하거나 모성건강 보호 서비스 접근을 어렵게 한다. 논문 21건이 이 문제를 다뤘는데, 미국 텍사스와 플로리다에서 허리케인에 노출됐을 때와 아프리가 19개국과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폭염에 노출됐을 때 산모와 영아에게 건강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산모가 폭염에 노출될 경우 저체중 출산 등 태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이티와 태국에서의 연구는 임신부가 말라리아 등 감염병에 노출될 경우 유산을 하거나 임신부 건강에 심각한 영향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2007년 연구에서는 젊은 여성들이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지나간 뒤 출산 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밝혀냈다.
이근영 기자
ky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