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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을 인터뷰하겠다고?…취재 계획만으로도 ‘죄’ 였던 시절

등록 2018-06-11 17:32수정 2018-07-06 14:43

[창간 30년, 한겨레 보도-4]
1989년 북한 관련한 취재로 인한 기자 구속·편집국 압수수색
1989년 7월 12일, 안기부 수사요원과 백골단, 경찰 등이 한겨레신문사 양평동 사옥의 철문을 부수고 편집국에 진입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7월 12일, 안기부 수사요원과 백골단, 경찰 등이 한겨레신문사 양평동 사옥의 철문을 부수고 편집국에 진입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4월 12일 새벽 6시 10분, 리영희 한겨레 논설고문의 집에 공안합동수사본부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3월 25일에 평양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 일행의 방북을 주선한 정경모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게 이들의 요구였다. 리영희는 순순히 연행에 응했다. 안기부에 도착한 뒤부터 요원들은 리영희가 계획했던 북한 취재에 대해 캐물었다.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에게’라며 인터뷰를 요청하는 편지를 쓴 일을 트집 잡았다. 당국은 14일 새벽, 연행 43시간 만에 리영희를 전격 구속했다.

리영희 구속 직후인 4월 14일 새벽 6시, 안기부 요원 7명이 한겨레 부사장인 임재경의 집에 들이닥쳤다. 공책, 편지, 도서 등을 압수한 뒤 임재경을 연행했다. 같은 시각, 장윤환 편집위원장의 집에도 수사요원들이 들이닥쳐 압수 수색을 펼쳤다. 장윤환은 이미 신문사에 출근한 뒤여서 현장에서 연행되는 것을 피했다. 합수부는 이날 오전 10시, 밤 11시 등 두 차례에 걸쳐 신문사 편집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장윤환에게 임의동행에 응해줄 것을 요구했다. 한겨레는 이를 거부했다.

합수부는 리영희 등이 반국가단체의 수괴를 찬양·고무하고, 사전 허락 없이 반국가단체의 지배 아래 있는 지역으로 탈출을 예비 음모했으므로, 국가보안법 6조 5항 ‘탈출예비’ 및 7조 1항 ‘찬양·고무·동조’에 해당되는 죄를 지었다고 주장했다.

리영희 논설고문, 임재경 부사장 연행 사실을 알린 1989년 4월 15일치 한겨레 1면.
리영희 논설고문, 임재경 부사장 연행 사실을 알린 1989년 4월 15일치 한겨레 1면.

탄압은 석 달 전의 일 때문에 시작되었다. 1989년 1월 초, 양평동 사옥 2층 논설위원실에 리영희 논설고문, 임재경 부사장, 장윤환 편집위원장, 정태기 개발본부장 등 네 사람이 모였다. 한 해 사업과 지면운용 계획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당장 창간 첫돌 기획 사업이 필요했다. 장윤환이 소련, 중국, 동유럽 등 공산권 기획 취재 구상을 밝혔다. 취재 대상에는 북한도 포함되어 있었다.

참석자 모두가 크게 찬성했다. 그 자리에서 리영희는 북한 취재단이 구성되면 이를 직접 인솔하겠다고 말했다. 이날부터 한겨레의 북한 취재 준비가 시작되었다. 사내에서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한겨레의 북한 취재 계획은 다른 언론사에 한발 뒤처진 것이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7월 7일 이른바 ‘7·7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남북 간 평화공존 원칙을 밝힌 이 선언에는 “정치인, 경제인, 언론인 등 남북 동포간의 상호교류를 적극 추진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여기에 고무된 신문사들이 경쟁적으로 북한 취재를 시작했다.

1988년 12월 9일, 한국일보와 중앙일보가 각각 미주지사 소속 기자들을 평양에 보냈다.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었던 이들은 주미 동포 북한 관광단에 섞여 북한에 들어갔다. 중앙일보는 12월 12일부터, 한국일보는 12월 17일부터 각각 평양발 기사를 연재했다. 조선일보도 1989년 1월 9일 미국 시민권자인 미주지사 기자를 평양에 보내 관련 기사를 실었다.

김일성 주석 인터뷰 추진

다른 신문사의 발 빠른 대응에 한겨레 사람들은 황망해졌다. 창간 때부터 겨레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내세웠던 한겨레가 정작 북한 취재 경쟁에서 뒤쳐진 것이다. 이제는 북한 취재를 하더라도 조금 다른 기획을 준비해야 했다. 관광단에 섞여 들어가 평양 거리를 스케치하는 기사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한겨레는 북한 최고위 당국자, 특히 김일성 주석 인터뷰에 공을 들였다. 리영희가 나섰다.

1989년 8월, 임재경 편집인이 법정에 들어서는 리영희 논설고문을 격려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8월, 임재경 편집인이 법정에 들어서는 리영희 논설고문을 격려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1월 12일, 리영희는 일본으로 건너가 야스에 료스케를 만났다. 야스에는 이와나미 서점의 상무이자 유명 잡지 세카이의 편집장을 지낸 인물이다. 편집장 시절 야스에는 네 차례 방북해 그때마다 김일성 주석과 단독 회견을 가졌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지했던 그는 리영희와도 교분이 있었다. 리영희로부터 한겨레의 북한 취재 계획을 들은 야스에는 일이 성사되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리영희에게 구체적인 취재 의도와 계획을 서면으로 써줄 것을 부탁했다.

리영희는 1월 17일 한글과 일본어로 각각 편지를 써서 야스에한테 전했다.

“…이제 민족 내외의 조건과 정황의 변화에 발맞추어 북의 동포 및 사회와의 보다 적극적인 이해의 확대 및 촉진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남한의 여론을 선도하는 신문이 그 개척자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북의 당·정부의 일정한 책임 있는 분들과 면담이 수락된다면 논설위원급을 단장으로 하는 취재기자단을 인솔하겠습니다. …바람직한 것은 남북 간에 전개되는 상황 변화의 종합적이고 전반적 방향과 정책의 이해 촉진을 위해서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 각하와 잠시라도 직접 대화하는 귀중한 시간을 허락받는 것입니다.”

나중에 공안 당국은 이 편지를 결정적 증거물로 내세웠다. 특히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 각하”라는 표현을 물고 늘어졌다. 사상 첫 김일성 주석 인터뷰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쓴 ‘의전 용어’를 두고 공안 당국은 국가보안법상 고무·찬양죄에 해당된다고 우겼다.

1989년 3월 5일, 일본의 다카사키 쇼오지 교수가 서울에 왔다. 그는 야스에 료스케와 친분이 있었고, 창간 직후인 1988년 11월 ‘일본 어디로 가나’라는 제목의 연재 기사를 보낸 한겨레의 필자이기도 했다. 다카사키는 리영희에게 전화를 걸어 방북 취재가 가능할 것 같다고 전했다.

당시 한겨레 편집국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방북 취재단은 리영희 논설고문 외에도 권근술 편집위원장 대리, 문학진 민권사회부 기자, 그리고 민족국제부 기자 1명, 사진부 기자 1명 등 모두 5명이었다. 방북 시기는 5월 초로 정했다. 이런 내용을 다카사키를 통해 야스에 료스케에게 전하고, 북한의 반응을 기다렸다.

1989년 4월 7일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당시 당 비서국 비서가 한겨레에 실린 문익환 목사 방북 관련 기사를 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4월 7일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당시 당 비서국 비서가 한겨레에 실린 문익환 목사 방북 관련 기사를 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러나 일이 틀어졌다. 19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 일행이 평양을 전격 방문했다.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트는 역사적 사건이었지만, 적어도 한겨레 방북 취재에는 악영향을 미쳤다. 각 언론사의 평양 취재를 문제 삼지 않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1989년 1월 24일)까지 허용했던 당국은 이제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공안 정국을 조성했다. 노태우의 7·7특별선언으로 남북 평화 무드가 조성될 것이라는 기대도 사라졌다.

한겨레 역시 방북 취재를 접었다. 민간 교류를 용공세력의 발호로 규정한 정부가 한겨레의 방북 취재를 승인해줄 리 없었다. 일본 쪽에서도 취재 요청에 대한 응답이 오지 않고 있었다. 임원회의에서 정식으로 논의 한번 못해보고, 한겨레는 방북 취재의 꿈을 접어야 했다.

안기부의 노골적인 탄압

리영희와 임재경이 연행되었지만, 한겨레는 전혀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미 3월 초, 취재 계획 자체를 접은 상태였다. 취재팀장을 맡을 예정이었던 권근술은 사건이 터지던 4월까지도 여권을 마련하지 않았다. 리영희 등이 연행된 4월 14일 아침에야 장윤환 편집위원장은 방북 취재를 추진했던 일을 임원회의에서 처음으로 설명했다.

방북 취재를 포기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중간 연락을 맡았던 야스에로부터 3월 5일 이후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방북 경로, 비자, 취재인원, 면담 일자 등 구체적 사실을 협의하지 못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당시 야스에 등은 리영희가 전한 편지를 북쪽에 전달하지 못하고 그저 보관만 하고 있었다.

문익환의 방북도 결정적이었다. 북한이 긍정적 답변을 보낸다 해도 한국 정부가 방북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북한이 취재를 거부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방북 승인을 먼저 얻는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었다. 원래 한겨레 방북 취재단이 구상했던 시나리오는, 일단 북한의 취재 승인을 받은 뒤 우리 정부가 입북 허가를 내주지 않으면, 취재를 계획했다 좌절된 일련의 과정 전체를 보도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방북 취재를 성사시킨 다른 신문사에 대해서는 “미국 시민권자를 보냈다”며 눈감았던 당국은 “한겨레는 국내 기자를 보내려 했으니 다르다”고 이중 잣대를 들이밀었다. 신문사 최고 간부를 국가보안법으로 다스리겠다는 선전포고인 셈이었다.

1989년 4월 22일, 장윤환 편집위원장(오른쪽)은 안기부에 연행됐다가 풀려났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4월 22일, 장윤환 편집위원장(오른쪽)은 안기부에 연행됐다가 풀려났다. 한겨레 자료사진

리영희가 구속되고 임재경이 연행된 4월 14일부터 한겨레 임직원은 철야 농성에 들어갔다. 그날 밤에 바로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공안 당국이 정태기, 장윤환에 대한 임의동행과 출두를 재촉했지만 이를 거부했다. 임의동행에 응하면 스스로 범죄를 인정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었다.

4월 16일 새벽 불구속 입건된 뒤에 풀려난 임재경은 곧바로 양평동 사옥으로 달려왔다. 임재경의 불구속 입건은 다소 희망적인 일이었다. 공안 당국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쉽게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1989년 4월 20일, 장윤환과 정태기에 대한 구인영장을 발부받은 안기부 요원들이 한겨레신문사 양평동 사옥을 찾아왔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4월 20일, 장윤환과 정태기에 대한 구인영장을 발부받은 안기부 요원들이 한겨레신문사 양평동 사옥을 찾아왔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4월 20일 오전 11시, 장윤환과 정태기에 대한 구인영장을 발부받은 안기부 요원들이 양평동 사옥을 찾아왔다. 이들은 30여 분 동안 현관 안내실 소파에서 기다렸다. 그동안 한겨레 임직원은 ‘민주언론수호결의대회’를 열었다. 전체 임직원 명의의 성명서를 낭독했다.

“한겨레신문에 대한 탄압은 현 정권이 저지르고 있는 재야·노동계·교육계 등에 대한 탄압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며 언론계 전체에 대한 중대한 도전 행위다.”

낮 12시 30분께, 장윤환과 정태기가 스스로 편집국을 나왔다. 2층 사무실을 내려오는 계단 끝에서 잠시 멈췄다. 둘러선 한겨레 임직원과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두 사람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마침내 장윤환과 정태기가 국가안전기획부에 연행되었다.

안기부 요원들은 두 사람을 검정색 로얄살롱 승용차와 검정색 소나타 승용차에 각각 태웠다. 사진 기자 두 명이 자동차 앞에서 촬영을 하려는데, 안기부 요원들이 그대로 차를 출발시켰다. 순간 흥분한 기자 2~3명이 안기부 차량의 유리창을 깨뜨렸다. 안기부 차량은 뒤쫓는 취재진을 따돌리려고 도로 중앙선을 넘어 달리다, 마주 오던 승용차와 부딪히기도 했다.

1989년 4월 방북 취재 계획을 빌미로 한겨레신문사 간부들이 구속, 연행되자 기자들이 편집국에서 항의 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4월 방북 취재 계획을 빌미로 한겨레신문사 간부들이 구속, 연행되자 기자들이 편집국에서 항의 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임재경의 연행 사실 등을 처음으로 알린 4월 15일치 한겨레는 서울 시내 모든 가판대에서 매진되었다. 방북 취재 계획을 빌미 삼은 정부의 한겨레 탄압으로 한국 사회 전체가 들끓었다. 각계각층의 규탄성명과 시위가 잇따르면서 노태우 정부의 정당성을 문제 삼는 반정부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한겨레 임직원들이 철야 농성을 벌인 4월 14일부터 일주일여 동안, 양평동 사옥은 민주세력의 본산이 되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한국기자협회 등 언론단체는 물론 한국방송, 문화방송, 기독교방송, 한국일보 등 거의 모든 언론사 노조가 정부를 규탄하고 한겨레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각계를 대표하는 원로 89인의 시국선언을 비롯해 140여 개의 민주·재야단체들도 성명을 내놓았다.

편집국에는 독자들의 격려 방문이 이어졌다. 하루 평균 50여 명이 신문사를 직접 찾았다. 각 언론사 영등포서 출입기자들이 야근 취재를 핑계 삼아 집단으로 양평동 사옥을 찾았다. ‘영등포 출입기자 일동’ 명의로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한겨레, 동지애로 너를 지켜보리라.”

1989년 방북 취재 계획으로 인한 한겨레 탄압에 항의하는 뜻으로 많은 시민과 언론계 동료들이 한겨레를 지지 방문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방북 취재 계획으로 인한 한겨레 탄압에 항의하는 뜻으로 많은 시민과 언론계 동료들이 한겨레를 지지 방문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노동조합, 동문회, 학생회 등의 집단 방문도 많았다. 음식을 내놓는 이도 있었고, 농성장에 앉아 기자들과 토론을 벌이는 이도 있었다. 매일 같이 100여 통의 격려 전화가 빗발쳤다. 신문에는 시민들의 격려 광고가 이어졌다. 외신들도 앞다퉈 한겨레 탄압사태를 보도했다. 4월20일 임재경이 외신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교도통신, DPA 통신,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마이니치신문, 아사히신문, CBS, NBC, NHK 등 세계 유력 언론사 기자들이 대부분 참석했다.

장윤환과 정태기는 서울 중구 예장동 안기부 청사로 끌려간 지 하루 만인 4월 21일, 불구속 입건되어 풀려났다. 4월 22일 저녁 7시, 사원총회가 열렸다.

리영희는 여전히 영어의 몸이었지만, 9일 동안 계속된 밤샘농성을 일단 풀고 중장기 투쟁 체제로 전환하기로 했다. 이후 리영희 석방을 위한 대대적인 서명운동이 펼쳐졌다. 두 달 만에 2만 2451명이 여기에 서명했고, 각계각층의 석방 요구가 이어졌다. 리영희는 구속 5개월만인 1989년 9월 25일,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 후 1993년 6월, 리영희는 사면 복권되었다.

북한 취재 계획을 빌미 삼은 정부의 한겨레 탄압으로 한국 사회가 들끓었다. 리영희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에는 두 달 만에 2만여 명이 참여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북한 취재 계획을 빌미 삼은 정부의 한겨레 탄압으로 한국 사회가 들끓었다. 리영희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에는 두 달 만에 2만여 명이 참여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 가운데서 남몰래 마음 졸이던 이들이 있었다. 김두식 사회교육부 편집위원, 고희범 경찰팀장, 문학진 기자 등이었다. 세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하나 갖고 있었다. 1989년 초에 추진했던 방북 취재 계획과는 별개로 이들은 1988년 여름, 독자적인 방북 취재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노태우의 7·7 선언 직후였다. 고희범과 문학진이 방북 취재를 추진해보겠다고 나섰다. 김두식은 의욕에 충만한 후배 기자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장윤환 편집위원장에게만 귀띔했다.

“알고는 계시되, 선배는 전혀 몰랐던 일로 합시다. 일이 터지면 내가 잡혀가지요.”

1988년 8월, 고희범과 문학진이 출국했다. 일본과 홍콩을 다니며 북한 당국과의 접촉을 도모했다.

두 명의 기자가 오랫동안 편집국에 나타나지 않아 행방을 궁금해하는 동료 기자들이 있었다. 김두식은 “4·3 항쟁 취재하러 제주도에 장기 출장 갔다”고 둘러댔다. “다시 못 만날 수도 있겠다”며 김두식과 비장한 인사를 나눴던 고희범과 문학진은 보름 뒤에 서울에 돌아왔다. 허탕이었다. 북쪽과 접촉이 되지 않았다. 결국 1989년1월, 리영희, 장윤환, 정태기, 권근술 등이 도모한 방북 취재 계획은 ‘2차 시도’였던 셈이다.

세계 언론사에 유례 없는 편집국 압수수색

방북 취재의 꿈을 꾸었던 한겨레 기자들은 일단 한숨을 돌렸다. 사소한 일을 꼬투리 잡아 자유언론을 탄압하는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탓에, 정권에 탄압의 빌미를 줄 일을 피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안기부는 멈추지 않았다.

1989년 6월 28일, 평민당 서경원 의원이 구속됐다. 서경원은 한 해 전인 1988년 8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 등을 만난 사실을 스스로 고백하고 당국에 자수했다. 노태우의 ‘7·7선언’으로 고무된 그는 당 지도부와 사전 상의 없이 돌출적으로 방북을 감행했다. 서경원은 농민운동가이자 한겨레 창간 발기인이기도 했다.

당국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구속과 함께 공안 정국을 강화했다. 서경원의 방북 사실을 알고도 수사기관에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주변 인물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구속했다. 윤재걸 한겨레 민권사회부 편집위원보도 안기부의 과녁이 되었다. 윤재걸은 1989년 2월, 평민당 김대중 총재 일행의 유럽 순방을 동행 취재했었다. 이때 서경원과 대화를 나누다 그의 방북 사실을 듣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제대로 알기 위해, 귀국 이후인 1989년 3월 말, 윤재걸은 국회 의원회관에서 서경원을 단독 인터뷰했다.

다만 서경원 또는 평민당이 그 사실을 공식 발표하기 전까지 보도를 미루기로 했다. 어쨌건 민감한 문제였고, ‘엠바고’ 요청을 수락하지 않을 경우 보안법을 빌미 삼은 당국에 의해 취재원인 서경원이 곤란에 처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윤재걸 기자의 집을 압수수색 하는 안기부 요원들. 한겨레 자료사진
윤재걸 기자의 집을 압수수색 하는 안기부 요원들.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7월 2일, 안기부는 윤재걸의 자택과 입원 중인 병실을 압수수색 했다. 서경원의 방북 사실을 알고서도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으니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에 해당한다는 게 당국의 주장이었다. 당시 윤재걸은 허리 수술을 받고 3주째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윤재걸은 실정법 위반과 취재원 보호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취재원 보호가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이는 세계 모든 언론인이 공감하는 취재윤리의 기본이기도 했다.

한겨레는 7월 3일, 다시 한 번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사원총회와 밤샘 농성에 들어갔다. 격려 방문, 격려 광고, 규탄 성명 등도 다시 이어졌다. 안기부는 7월 3일 밤, 송건호에게 전화를 걸어, 윤재걸이 서경원으로부터 받은 사진 서너 장과 취재수첩 등을 제출해달라고 요구했다. 한겨레는 이를 거절했다. 보도를 위해 얻거나 작성한 자료 및 기록은 보도 이외의 목적으로는 공개 또는 제공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아무리 안기부라지만 공개를 거부한 취재 자료를 구하려고 편집국을 압수 수색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게 세간의 중론이었다. 법률 조언을 해주던 조영래 변호사도 “직업윤리에 따라 제공하기 곤란한 자료에 대해, 그것도 신문사 편집국을 상대로 하는 압수수색 영장을 법원이 발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공안 당국은 상식을 뒤엎었다. 7월 10일, 한겨레 편집국에 대한 압수 수색 영장이 발부되었다. 한겨레 사옥 전체가 수색 대상이었다.

1989년 7월 12일, 안기부 수사요원과 백골단, 경찰 등은 한겨레신문사 편집국을 압수수색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7월 12일, 안기부 수사요원과 백골단, 경찰 등은 한겨레신문사 편집국을 압수수색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국은 물론 세계 언론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편집국 압수 수색이 1989년 7월 12일 새벽 6시부터 시작되었다. 리영희에 대한 첫 재판이 열린 지 일주일 되는 날이었다. 안기부 수사요원 70여 명, 전투경찰 450여 명, 사복체포조 300여 명 등이 동원되었다. 백골단이라 불리던 사복 체포조는 정예로 꼽히는 서울시경 기동대에서 차출되었다. 안기부 수사과장이 현장을 지휘했고, 영등포서장이 이를 거들었다.

이들은 사옥 주변을 에워싸고 차량 진입을 통제했다. 포위가 끝나자 안기부 요원이 편집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비대위원장인 이종욱을 찾았다. “7시 정각 정문에서 만납시다.” 밤샘 농성에 참여했던 임직원들끼리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다. ‘몸으로 막되 폭력은 절대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다시 확인했다.

이종욱이 사옥 정문으로 나갔다. 안기부 수사과장이 압수 수색 협조를 요청했다. 이종욱은 거절했다. 이때 긴급 연락을 받고 신문사에 출근하던 임희순 편집위원이 나타났다. 그가 사옥 안으로 들어가려고 정문을 조금 여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사복 체포조, 전투경찰, 안기부 요원들이 양평동 사옥 앞마당으로 밀려들어 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1989년 7월 12일, 한겨레신문사 양평동 사옥 압수수색을 나온 안기부 요원과 경찰이 미리 준비해온 장비로 편집국으로 향하는 유리문을 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7월 12일, 한겨레신문사 양평동 사옥 압수수색을 나온 안기부 요원과 경찰이 미리 준비해온 장비로 편집국으로 향하는 유리문을 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날 새벽 사옥 ‘경비조’를 맡았던 사원들이 2층 편집국으로 향하는 철제문을 닫았다. 그러자 경찰이 쇠망치와 전기톱으로 2층 철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철문이 열리자 이번엔 유리문이 나타났다. 경찰이 대기시킨 열쇠 전문가가 만능열쇠로 금세 열었다. 아침 7시 16분께, 한겨레 편집국을 지키던 모든 문이 열렸다.

직원들이 스크럼을 짜고 경찰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기부 수사과장이 말했다.

“영등포서장 어딨어? 장애물을 제거해야겠어.”

사복체포조가 직원들을 한 사람씩 연행했다. 당시 편집국 안에는 야근자 및 취재기자 몇 명만 남아 있었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경찰은 유유히 편집국 서류함을 뒤지기 시작했다. 안기부 요원이 손을 치켜들고 외쳤다.

“성공했다.”

윤재걸의 취재수첩과 서경원이 건넨 사진이었다.

압수수색이 끝났는데도 사복 체포조들이 행패를 부렸다. 당직 근무 중이던 권오상을 연행하려던 것을 김성걸 등이 격렬히 항의하며 간신히 말렸다. 압수 수색 상황을 취재하던 다른 방송사 기자도 끌고 가려했지만, 역시 기자들의 제지로 실패했다. 아침 7시25분께 안기부 요원들이 편집국을 떠나자 경찰들도 사옥을 빠져 나갔다. 경찰 버스로 끌려가 갇혀 있던 직원 12명도 풀려났다.

“×할 놈들, 두들겨 패야 돼.”

어느 사복 체포요원의 폭언이 이들의 귀에 생생했다. 양평동 사옥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한겨레 편집국 문을 연 경찰은 스크럼을 짜고 있던 한겨레 사원들을 끌어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편집국 문을 연 경찰은 스크럼을 짜고 있던 한겨레 사원들을 끌어냈다. 한겨레 자료사진

긴급임원회의, 비상대책회의 등이 연이어 열렸다. 오전 9시, 편집국에서 ‘언론자유유린 규탄대회’가 열렸다. 내외신 기자회견을 겸했다. 사상 초유의 편집국 압수 수색을 규탄했다.

정해진 발언이 모두 끝나자 장윤환 편집위원장이 개인 성명서를 읽었다. 애초 순서에 없던 일이었다.

“한겨레신문 편집국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신문사의 심장인 편집국의 존엄성을 끝까지 수호하지 못하고 독재정권의 군홧발에 짓밟힌 데 대하여….”

장윤환은 울먹였다. 그러나 준비한 글을 마저 읽었다.

“주주와 독자, 한겨레 사원에게 깊이 사죄하며 이에 본인은 책임을 통감하고 편집위원장직과 이사직을 사퇴합니다.”

장윤환은 한국 언론 사상 처음으로 사원들의 직선으로 뽑힌 편집위원장이었다. 격렬하게 구호를 외치던 임직원들이 순간 침묵했다. 뒤이어 이종욱도 편집부위원장직을 사퇴하겠다고 말했다. 침통한 가운데 임재경이 만세삼창을 제안했다.

“한겨레신문 만세, 민주언론 만세, 민주주의 만세.”

편집국 압수수색 이후 안기부는 윤재걸에 대한 수사를 사실상 중단했다. 병원에 입원 중인 윤재걸에게 안기부는 사전 구속영장 시한이 끝날 때마다 거듭 새 영장을 청구했지만, 1989년 12월 30일을 끝으로 더 이상 영장을 청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별일이 아니었지만, 노태우 정부는 어떻게 해서건 한겨레를 으르대려 했던 것이다.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1989년 12월 27일에는 이주익 한겨레 도쿄 통신원이 김포국제공항에서 안기부 요원들에게 영장 없이 불법 연행되었다. 이주익은 결혼 준비를 위해 귀국하는 길이었다. 안기부는 이주익이 1989년 3월 23일 방북 직전의 문익환 목사를 도쿄에서 만나 인터뷰한 뒤 이를 한겨레에 보도한 일을 뒤늦게 트집 잡았다.

당시 이주익의 기사는 문익환의 평양 방문을 알리는 외신 보도 이후에 한겨레에 실렸다. 인터뷰 직후 기사를 썼다면 세계적 특종이 되었겠지만, 자신의 방북 때까지 보도를 미뤄달라는 문익환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이주익 역시 취재원과의 신의를 더 중시한 셈이었지만, 방북 계획을 사전에 알고도 당국에 알리지 않았다며 안기부가 트집 잡았다. 이주익은 불법 감금 25시간 만에 풀려났다.

1989년 7월 12일, 한겨레신문사 편집국을 압수수색하려는 백골단, 경찰들.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7월 12일, 한겨레신문사 편집국을 압수수색하려는 백골단, 경찰들. 한겨레 자료사진

※ 한겨레 창간 30돌을 맞아, 한국사회를 바꾸는 데 기여한 특종이나 기획 기사의 뒷이야기를 <창간 30년, 한겨레 보도>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이 글은 디지털 역사관인 '한겨레 아카이브'에 소개된 내용의 일부입니다. 한겨레의 살아 숨쉬는 역사가 궁금하시다면, 한겨레 아카이브 페이지(www.hani.co.kr/arti/archives)를 찾아주세요. 한겨레 30년사 편찬팀 achiv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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