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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의 황태자, 김현철과 맞서다

등록 2018-06-25 14:44수정 2018-07-06 14:46

[창간 30년, 한겨레 보도-7]
문민정부 최후의 성역을 무너뜨린 한겨레 보도

1997년 5월 17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가 법원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신문을 받기 위해 검찰 직원과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법원으로 가고 있다. 김봉규 기자
1997년 5월 17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가 법원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신문을 받기 위해 검찰 직원과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법원으로 가고 있다. 김봉규 기자

1994년 5월, 한겨레 기자들은 하루 종일 차만 타고 다녔다. 24시간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의 승용차를 뒤쫓았다. 김현철의 측근으로 통하는 주변 인물들도 추적했다. 그들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는지 알아내려 했다. ‘한겨레’ 로고가 박힌 신문사 취재 차량 대신 개인 승용차를 구해 타고 다녔다. 놓칠까 우려해 두 대의 차에 사회부와 사진부 기자가 나눠 탔다.

어느 날, 청와대 수석 비서관이 최학래 편집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

“어떻게 스물네 시간을 따라다닙니까. 신경이 쓰여서 (김현철의) 눈 실핏줄이 터졌답니다.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너무 심한 일을 먼저 벌인 것은 ‘황태자’ 김현철이었다.

1994년 5월 3일, 김현철은 <한겨레> 보도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2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명예훼손 사상 최고의 청구액이었다. 1994년 4월 27일 한겨레 1면에는 무자격 한약업사들이 김현철에게 1억 2000만 원의 정치자금을 건넸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엄밀히 말해 <한겨레>의 특종이 아니었다. 사건 관련 첫 보도는 세계일보가 했다. 1994년 4월 24일, 무자격 한약업사를 구제하는 일에 청와대가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이틀 뒤, 한약업사 정재중이 정치자금을 김현철 쪽에 건넸다고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겨레>가 보도한 것은 그 기자회견 내용이었다.

무자격 한약업자들이 김현철씨에게 로비했다는 내용을 보도한 1994년 5월 2일치 한겨레 1면
무자격 한약업자들이 김현철씨에게 로비했다는 내용을 보도한 1994년 5월 2일치 한겨레 1면

이 기사를 <한겨레>만의 특종으로 만들어 준 것은 다른 언론이었다. 각 언론사 기자 20여 명이 기자회견에 참석했지만 누구도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한겨레>를 제외한 나머지 언론 가운데 최초 보도를 했던 <세계일보>만 초판에 기사를 내보냈는데, 그나마 밤새 기사를 빼버렸다. 이 신문사 부사장은 “미안하다. 외압이 왔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첫 기사와 달리 김현철의 이름이 거론된 것이 문제였다. 이후 언론계에선 ‘한겨레적 특종’이란 말이 회자되었다. 알면서도 누구도 쓰지 않는 기사를 한겨레만이 소신 있게 쓰는 경우를 일컫는 말이었다.

1994년 한겨레21 창간호(왼쪽)과 8호 표지이야기로 실린 김현철 관련 보도. 한겨레 자료
1994년 한겨레21 창간호(왼쪽)과 8호 표지이야기로 실린 김현철 관련 보도. 한겨레 자료

1994년 3월 24일자로 발행된 <한겨레21> 창간호 표지 기사도 그런 의미에서 한겨레적 특종이었다.

‘황태자 김현철은 성역인가’라는 제목으로 김현철을 둘러싼 여러 의혹을 짚었다. 그런데 <한겨레21>보다 먼저 이를 다루려 했던 주간지가 있었다. 경향신문사가 발행하는 <뉴스메이커>였다. 그해 초 김현철의 정치권 인맥에 대한 취재를 마치고, 2월 초에 기사를 내보내려 했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기사를 싣지 말라고 했다. <뉴스메이커>는 김현철 관련 보도를 접었다.

1997년 5월 열린 김현철씨 청문회에서 민주당 이규정 의원이 김현철씨 금전수수를 보도한 <한겨레21> 8호(94년5월12일자)를 들이대며 '3년 전 그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였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추궁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7년 5월 열린 김현철씨 청문회에서 민주당 이규정 의원이 김현철씨 금전수수를 보도한 <한겨레21> 8호(94년5월12일자)를 들이대며 '3년 전 그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였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추궁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21> 기자들도 이런 일을 알고 있었다. 그 상황이 오히려 <한겨레21> 기자들을 자극했다. 창간호에서 김현철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기로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연락이 왔다. 청와대 비서관이 취재를 맡은 곽병찬에게 연락했다. 안기부 간부는 고영재 <한겨레21> 편집장에게 연락했다. 기사를 쓰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한겨레21>은 그래도 썼다. 기사 가운데는 기업인 장명호가 김현철을 등에 업고 서울 강남지역 유선방송 사업권을 따내려 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장명호는 기사가 나온 지 일주일 뒤에 곽병찬을 상대로 1억 원의 명예훼손 소송을 걸었다.

1997년 국회 청문회에 나온 김현철씨. 한겨레 자료사진
1997년 국회 청문회에 나온 김현철씨. 한겨레 자료사진

김현철은 김영삼 대통령의 둘째 아들이다. 공식적으로는 아무 직함도 권한도 없는 자연인이었다. 그러나 문민정부의 실세들이 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김현철은 ‘소통령’으로 불렸다. 개인 사무실과 비선조직을 운영하면서 비밀스럽게 권부를 조정했다. 아버지인 대통령은 그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냈다. 여러 권력기관들이 앞 다투어 김현철을 보호했다. 언론은 그 이름 석자를 거론하는 일조차 피했다. <한겨레>의 김현철 보도는 그래서 특별했다.

1994년 봄부터 <한겨레>와 <한겨레21>은 김현철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연달아 보도했다. 김현철의 비밀 개인 사무실을 찾아내고, 그가 동원한 사조직의 실상을 드러내고, 그의 정·재·관계 커넥션을 폭로했다. 1994년과 1995년에 걸쳐 <한겨레>의 정치부, 사회부, 경제부 소속 기자 가운데 김현철 관련 기사를 써보지 않은 이가 드물었다. <한겨레>와 <한겨레21>의 크고 작은 보도가 이어지면서 김현철의 전횡이 정국의 핵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잘못했는지가 드러나지 않았다. <한겨레>도 좀체 결정적인 치부를 캐지 못했다. 권력기관이 앞장서 지키는 김현철의 주변을 파고드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 사이 김현철이 제기한 소송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법부가 대통령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비판이 들끓었다. 원고인 김현철은 한 차례도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를 눈감았다. 반면 <한겨레> 쪽이 제기한 증인 신청은 기각했다. 충분한 심리를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1995년 1월 16일, 1심 재판부가 한겨레의 패소를 판결했다. 4억 원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 <한겨레>는 즉각 항소했다.

김현철씨가 주요 국정 현안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특종 보도한 한겨레 1997년 3월 10일치 1면 기사.
김현철씨가 주요 국정 현안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특종 보도한 한겨레 1997년 3월 10일치 1면 기사.

항소심이 진행되던 1997년 3월 10일, <한겨레> 1면에 결정적인 특종 보도가 나왔다. 김현철이 YTN 사장 인사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내용이었다. 김현철이 그의 상담의사 박경식의 사무실에서 전화 통화하는 내용을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를 정치부 김성호 기자가 입수했다. 김현철은 정부 고위 인사들로부터 수시로 보고를 받으며 주요 공직자의 인사 문제까지 관여했음을 전화 통화를 통해 스스로 털어놓았다. 김현철이 국정에 개입했다는 결정적이고도 구체적인 증거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를 보도한 김성호는 1994년부터 김현철 문제에 관심을 두고 오랫동안 추적 취재를 벌이고 있었다. 제보자인 박경식과 돈독한 관계를 맺으며 공을 들였고, 결국 결정적 제보를 받아냈다. 보도가 나간 지 일주일 만인 1997년 3월 17일, 김현철은 대국민 사과문을 냈다. <한겨레>를 상대로 한 명예훼손 소송도 취하했다.

1997년 2월 “아들의 허물은 아비의 허물”이라며 대국민담화에서 고개 숙인 김영삼 대통령. 한겨레 자료사진
1997년 2월 “아들의 허물은 아비의 허물”이라며 대국민담화에서 고개 숙인 김영삼 대통령. 한겨레 자료사진

앞서 1997년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도 “아들의 허물은 아비의 허물”이라며 대국민담화에서 사죄의 뜻을 밝혔다. <한겨레>는 이후 김현철이 권영해 안기부장을 만나 국정을 논의한 사실 등을 추가로 특종 보도했다.

두 달 뒤인 1997년 5월 15일, 김현철은 피의자 자격으로 검찰에 출두했다. <한겨레>가 창간된 지 19주년 되는 날이었다. 문민정부 최후의 성역이 <한겨레>에 의해 무너졌다. 김현철씨는 1심에서 조세포탈 혐의 등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군사정부 시대가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2년 이후, <한겨레> 보도는 중요한 변화를 겪는다. 초창기 주요 특종과 기획 기사들은 군사정부의 인권유린에 주목했는데, 문민정부 이후에는 권력형 비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취재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초기에는 내부 제보자의 양심선언에 많이 기댔지만, 문민정부 이후에는 끈질긴 추적에 의한 심층 보도 또는 발굴 특종이 주를 이뤘다.

1997년 6월 죄수복을 입은 채 검찰에 재소환되는 김현철씨. 강재훈 기자
1997년 6월 죄수복을 입은 채 검찰에 재소환되는 김현철씨. 강재훈 기자

※ 한겨레 창간 30돌을 맞아, 한국사회를 바꾸는 데 기여한 특종이나 기획 기사의 뒷이야기를 <창간 30년, 한겨레 보도>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이 글은 디지털 역사관인 '한겨레 아카이브'에 소개된 내용의 일부입니다. 한겨레의 살아 숨쉬는 역사가 궁금하시다면, 한겨레 아카이브 페이지(www.hani.co.kr/arti/archives)를 찾아주세요. 한겨레 30년사 편찬팀 achiv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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