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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베트남

등록 2018-06-26 15:13수정 2018-07-06 14:47

[창간 30년, 한겨레 보도-8]
한국군의 베트남전 양민 학살을 처음 알리다
한국은 1965년에서 1973년까지 연인원 30만여 명의 전투 부대를 베트남에 보냈다. 당국의 공식 통계를 보면, 참전 한국군 가운데 4960여 명이 죽었고, 한국군은 베트남인 4만 1450여 명을 죽였다. 1999년 한겨레와 한겨레21은 그 실체를 처음으로 알렸다. 한국 사회를 넘어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베트남 퐁니촌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 현장에서 총상을 입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응웬 티 탄이 한겨레21 취재진에게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베트남 퐁니촌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 현장에서 총상을 입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응웬 티 탄이 한겨레21 취재진에게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첫 보도는 1999년 5월 6일, 한겨레21의 ‘움직이는 세계’라는 꼭지에 실렸다(▶한겨레21 당시 기사 보기). 한겨레21의 베트남 통신원이었던 구수정이 기사를 썼다. 구수정은 월간 사회평론에서 기자로 일하다 1993년 베트남 호치민 대학에 유학을 떠났다. 베트남 현지 기사를 한겨레21에 보내고 있었다.

그는 베트남 정부의 전범조사위원회가 작성한 기록을 입수했다. 그 기록에는 한국군의 양민 학살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기록에 나온 곳 가운데 베트남 남부 란팡이라는 마을을 찾아 증언을 들었다. 베트남 여성을 희롱하는 한국 군인을 마을의 승려가 제지했고, 격분한 이 군인은 부대 병사들을 데려와 승려 4명을 죽였으며, 이 마을 인근 지역에서 한국군 맹호부대가 1966년 1월부터 한 달 동안 1200여 명의 주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베트남 전범조사위원회 보고서의 다른 기록을 보면, 한국군은 주민들을 한데 모아 기관총을 난사해 몰살하고, 한 집에 몰아넣고 총을 난사한 뒤 집을 통째로 불태우고, 마을의 땅굴에 주민을 몰아넣고 독가스를 분사해 질식시켰다. 아이의 머리를 깨뜨리거나 사지와 목을 자르고, 여성을 윤간한 뒤 살해하는 등의 잔혹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 보고서가 사실일까? 구수정은 그 의문을 풀기 위해 본격적인 취재에 나섰다.

그 결과가 ‘베트남의 원혼을 기억하라’는 제목으로 1999년 9월 2일 한겨레21에 실렸다(▶기사 보기). 구수정은 베트남 수십 곳의 현장을 취재했다. 현지인 100여 명의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보고서는 대부분 사실이었다. 오히려 더 극악한 학살을 자행했던 사실을 확인했다. 한겨레도 한겨레21의 취재 내용을 지면에 실었다.

한겨레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보도는 1999년 시작되었다. 2000년에는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김기태 예비역 대령의 인터뷰를 표지이야기로 다뤘다.
한겨레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보도는 1999년 시작되었다. 2000년에는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김기태 예비역 대령의 인터뷰를 표지이야기로 다뤘다.

관련 보도는 이듬해인 2000년에도 이어졌다. 한겨레21은 고경태와 황상철 등을 베트남에 보내 후속 기사를 썼다. 2000년 4월에는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김기태 예비역 대령의 인터뷰(▶“엄청난 일들 34년 만에 말한다” 기사 보기)를 한겨레와 한겨레21에 함께 실었다. 그는 베트남전 양민 학살에 대해 증언한 최초의 한국 장교였다. 이후 로이터, 뉴스위크,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등이 이를 인용 보도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한겨레21은 1999년 10월부터 한국군에게 피해를 입은 베트남인 가족을 돕는 캠페인을 벌였다. 캠페인은 39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1억 5000여 만 원의 성금을 종자돈 삼아 2003년 1월 21일, 베트남 푸옌성에 한-베 평화공원을 지었다. 베트남에 파병된 청룡, 맹호, 백마 등 한국군 3개 전투부대가 모두 거쳐 간 격전지였다. 한겨레21의 보도는 여론을 움직이고 정부를 나서게 했다. 2001년 이후 정부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통해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토벌을 맡았던 중부 5개 성 지역에 5개의 병원과 40개의 초등학교를 건립했다.

2003년 1월 21일, 베트남 푸옌성에서 한겨레-베트남 평화공원 준공식을 마치고 한겨레 관계자들과 시민사회단체 대표 등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뒤에 보이는 것은 한-베 평화공원의 상징물이기도 한 ‘진실과 우정의 둥지’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3년 1월 21일, 베트남 푸옌성에서 한겨레-베트남 평화공원 준공식을 마치고 한겨레 관계자들과 시민사회단체 대표 등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뒤에 보이는 것은 한-베 평화공원의 상징물이기도 한 ‘진실과 우정의 둥지’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0년 6월 27일 오전 11시께 한겨레신문사 공덕동 사옥 앞에 군복을 입은 중년의 남성들이 무리 지어 나타났다. 대한민국 고엽제후유의증 전우회 회원들이었다. 1999년 5월부터 한겨레와 한겨레21은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꾸준히 보도했다. 전우회 회원들은 이런 보도가 고엽제 손해배상 소송에 나쁜 영향을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언론사 앞에는 시위대가 가끔 출몰한다. 보도에 항의하는 사람들이다. 한겨레도 다르지 않다. 크고 작은 일로 항의 방문하는 사람들이 늘 있다. 이날도 한겨레 사람들은 간혹 있는 시위대라 여기며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집회 소식을 듣고 아침 8시부터 경찰 10여 명이 신문사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지나자 분위기가 심상찮게 변했다. 점심때 술을 마신 일부 시위대의 얼굴이 불콰했다. 근처 효창공원 쪽에 집결했던 회원들이 사옥 앞으로 밀려들었다. 100여 명이었던 시위대 인원이 순식간에 2200여 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한겨레 정문을 가로막았다. 때마침 식사를 마치고 신문사로 들어오려던 한겨레 사원들을 못 들어가게 했다. 이 과정에서 몇 명이 폭행을 당했다. 같은 시각, 경찰이 저지선을 만들었다. 16개 중대 2240명의 경비경찰을 배치해 사옥을 지켰다.

오후 3시, 전우회 대표자 5명이 신문사 5층 회의실에서 현이섭 출판국장을 만났다. 요구 사항을 전달하겠다며 신문사를 찾았으면서도, 계속 욕설만 퍼부었다. 인내심을 갖고 설득한 끝에 협상 문안을 만들었는데, 그만 소용없는 일이 되었다. 바깥의 전우회원들이 신문사 난입을 시작한 것이다.

2000년 6월 27일, 서울 한겨레신문사 공덕동 사옥 앞에서 고엽제후유의증 전우회 회원들이 사옥 안에서 끌어낸 사무용지 등을 불태우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0년 6월 27일, 서울 한겨레신문사 공덕동 사옥 앞에서 고엽제후유의증 전우회 회원들이 사옥 안에서 끌어낸 사무용지 등을 불태우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시위대는 전경들을 밀어붙이며 사옥 진입을 시도했다. 퇴역 군인들은 왕년의 지략을 발휘했다. 사옥 앞쪽에서 시위대와 전경들이 몸싸움을 벌이는 동안, 수십여 명이 사옥 뒤편 주택가로 몰려들었다. 신문사의 옥외주차장과 면해 있던 민가의 담을 허물어버렸다. 경찰도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무너진 담을 딛고 시위대가 옥외주차장으로 몰려들었다. 주차되어 있던 승용차들을 부쉈다. 2층 주주센터 사무실 바깥에 나와 있던 환기구를 부쉈다. 독자용 지로용지 등 서류를 빼앗아 불을 질렀다. 불붙은 서류 뭉치를 다시 사무실 안으로 던져 넣었다.

오후 3시 30분께, 경찰이 옥외주차장으로 신경을 돌린 틈을 타고 이번에는 시위대가 사옥 정문 쪽에 붙어 있는 발송장에 몰려들었다. 내려 잠근 철제문을 부수고 난입했다. 발송장에 주차된 차량을 부쉈다. 발송용 컨베이어도 부쉈다.

2000년 6월 27일 고영제후유의증 전우회 회원들이 떠난 직후, 경찰이 한겨레신문사 사옥 4층 옥외주차장에서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지키고 있다. 시위대는 주차되어 있던 승용차들을 부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0년 6월 27일 고영제후유의증 전우회 회원들이 떠난 직후, 경찰이 한겨레신문사 사옥 4층 옥외주차장에서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지키고 있다. 시위대는 주차되어 있던 승용차들을 부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발송장에는 사무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있었다. 이들의 진입을 막으려고 한겨레 직원들이 철제 비상문을 닫아걸었다. 몰려든 시위대는 몽둥이와 발로 철문을 두들기며 욕설을 퍼부었다. 사무실 진입이 힘들어지자 사옥 주변 나무와 전신주에 올라가 돌을 던져 창문을 깨트렸다. 무너진 민가 담장의 벽돌을 빼서 던졌다. 유리창 20여 장이 이들의 손에 박살났다. 7층 편집국까지 돌이 날아들었다.

편집국은 큰 화를 면했지만, 논설위원실이 있던 8층과 출판국이 있던 5층은 시위대에 의해 쑥대밭이 되었다. 시위대는 비상구 문틈으로 쇠파이프를 쑤셔 넣어 문을 열었다. 닥치는 대로 집기를 부쉈다. 오후 4시 50분께 시위대 중 1명이 사옥 옆 전신주에 올라가 전력 차단기를 내렸다. 신문사 전체가 정전이 되었다. 한국전력 긴급복구반이 달려와 복구에 들어갔다. 오후 5시 50분께 신문사에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

신문사 안까지 들어와 난동을 피운 이는 수십여 명이었다. 피해가 막심했다. 컴퓨터 등 사무용품, 발송 장비와 윤전시설 같은 신문 제작 설비가 파손되었다. 직원 10여 명이 몽둥이 등으로 폭행을 당했다. 취재용, 발송용 차량 21대가 파손됐다. 7000여 만 원의 재산 피해가 났다.

경찰은 현장에서 40여 명을 연행하고, 4명을 구속했다. 시위대는 밤늦도록 해산하지 않고 사옥 주변을 에워쌌다. 예정보다 30분가량 늦게 나온 신문 발송을 위해 경찰들이 도로를 틔웠다. 밤 9시께 시위대는 해산했다.

일부 시위대가 주주센터 옆 환기통을 깨고 불붙은 서류뭉치를 집어던져 한겨레신문사 사무실에 방화를 시도했다. 타다남은 서류조각이 창틀에 뒹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일부 시위대가 주주센터 옆 환기통을 깨고 불붙은 서류뭉치를 집어던져 한겨레신문사 사무실에 방화를 시도했다. 타다남은 서류조각이 창틀에 뒹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들은 이튿날에도 사옥 앞에 밀려와 회사 진입을 시도했다. 눈앞에서 시위대에게 저지선을 뚫렸던 경찰이 이날은 단단히 막았다. 그다음 날인 6월 29일에는 “전우회원이 사복 차림을 하고 한겨레신문사에 들어가 건물을 폭파하려 한다”는 제보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은 특수견을 동원해 사옥 안팎을 수색했으나 별다른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7월 13일, 전우회 임원들이 신문사를 다시 찾았다. 최학래 대표이사를 만나 공식 사과했다. 경찰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취지의 탄원서를 써줄 것을 부탁했다. 최학래는 사과와 부탁을 함께 받아들였다.

베트남전 양민 학살 보도와 별개로 한겨레는 고엽제후유의증 환자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보상을 가장 먼저 그리고 꾸준히 보도한 매체였다. 당시 베트남전 양민 학살 취재를 맡은 고경태는 시위 사건 직후 ‘고엽제전우회원들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겨레21이 베트남전 보도를 계속 이어가는 이유를 다시 설명했다.

“우리는 여러분 사이를 지나면서 위장 전투복으로는 가릴 수 없는 여러분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건 분명 우리의 아버지·삼촌·형이자, 이웃집 아저씨의 얼굴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야말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살벌한 이국의 전장에서 공포와 고독에 몸부림치며 피흘렸던 분들이 아닙니까. 지금도 그 악몽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압니다. 참전군인들의 참다운 명예를 찾는 첫걸음은 당신들이 이유 없이 전장에서 피흘려야 했던 역사적 맥락을 직시하는 일입니다. 이제 부디 30년 동안 당신들을 괴롭혔던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한겨레21이 함께 하겠습니다.”

2018년 4월 2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미안해요, 베트남' 릴레이 마감 기자회견에서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민간학살 피해자인 하미마을의 응우옌티탄(왼쪽)씨와 퐁니마을의 응우옌티탄 씨가 회견 참석자들로 부터 사과와 위로의 꽃을 전달받고 있다. 2명의 응우옌티탄 씨들은 한국군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민간법정에 원고로 출석하기위해 방한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2018년 4월 2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미안해요, 베트남' 릴레이 마감 기자회견에서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민간학살 피해자인 하미마을의 응우옌티탄(왼쪽)씨와 퐁니마을의 응우옌티탄 씨가 회견 참석자들로 부터 사과와 위로의 꽃을 전달받고 있다. 2명의 응우옌티탄 씨들은 한국군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민간법정에 원고로 출석하기위해 방한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 한겨레 창간 30돌을 맞아, 한국사회를 바꾸는 데 기여한 특종이나 기획 기사의 뒷이야기를 <창간 30년, 한겨레 보도>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이 글은 디지털 역사관인 '한겨레 아카이브'에 소개된 내용의 일부입니다. 한겨레의 살아 숨쉬는 역사가 궁금하시다면, 한겨레 아카이브 페이지(www.hani.co.kr/arti/archives)를 찾아주세요. 한겨레 30년사 편찬팀 achiv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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