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0년, 한겨레 보도-9]
2001년 한겨레21 의제화 이후 끈질기게 기획·추적 보도
2001년 한겨레21 의제화 이후 끈질기게 기획·추적 보도
헌법재판소가 6월 28일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위헌 여부를 결정한다. 종교적 신념이나 양심에 따라 입영, 집총 등을 거부하여 처벌받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1950년 이후 1만 9천여 명에 이른다. 병역법이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을 거부한 사람을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한 탓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대부분 징역 1년 6개월의 ‘정찰제 판결’을 받고 있다.
한겨레는 2001년 2월 국내 언론 가운데 처음으로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보도한 이후에 어떤 언론보다 앞장서 이와 관련한 기사를 써왔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가 특정한 종교가 아닌 인권의 문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앞두고, 지난 17년 간의 한겨레 양심적 병역거부 보도를 돌아본다.
2001년 2월 15일 발행한 한겨레21 345호에는 ‘차마 총을 들 수가 없어요’라는 제목의 2쪽짜리 기사가 실렸다. 집총을 거부해 감옥에 갇힌 여호와의증인 신도들을 인터뷰한 기사였다. 그동안 언론이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최초로 부각시킨 기사였다. 소수자 인권 문제에 눈 밝은 신윤동욱 기자가 발굴해낸 사회적 의제였다. ▶“차마 총을 들 수가 없어요” 기사 다시 보기
그 이후에도 한겨레21은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 보도를 끈질기게 이어갔다. 기사가 나간 뒤에 신윤동욱 기자의 메일 박스에는 하루 10여 통의 이메일이 차곡차곡 쌓였다. 여호와의증인들이 보낸 편지의 사연은 절절했다. 대기업에 합격했으나 병역거부 탓에 입사를 취소당하고, 출감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밀실공포증에 시달리는 청년과 가족들의 이야기, 그리고 종교와 상관없이 양심적 병역거부와 소수자의 인권을 다시 곱씹게 되었다는 독자들의 편지가 잇따랐다.
한겨레21은 양심적 병역거부 실태를 알리고, 대만과 터키 등 대체복무제가 시행 중인 다른 나라의 사례를 소개하는 등 심층적으로 이 문제를 보도했다.
2001년 12월, 불교 신자이자 평화운동가인 오태양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이제 양심적 병역거부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특정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천주교, 기독교, 불교 등 여러 종교를 가진 병역거부자들이 등장했다. 종교만이 아니라 평화주의, 생태주의, 성소수자 정체성 등의 여러 양심상의 이유로 병역거부를 선언하는 청년들이 늘어났다. 한겨레21은 다시 한 번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 2004년 ‘양심적 병역거부 2라운드’ 한겨레21 표지 기사 다시 보기
언론에 이어 법원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목소리에 응답했다. 2002년 1월 29일, 서울남부지법 박시환 판사는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하지 않은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도록 규정한 병역법 제88조 1항은 헌법 위반”이라며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박시환 판사는 훗날 대법관이 되었다. ▶‘헌재는 감옥 문을 열 것인가’ 2002년 한겨레21 기사 다시 보기
2002년 2월, 평화인권연대, 인권운동사랑방,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36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를 발족하고, 양심적 병역거부권과 대체복무제도를 알리는 다양한 활동을 시작했다. 국방부와 국회는 대체복무제를 대안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2004년 5월21일에는 서울남부지법 이정렬 판사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사법 역사상 최초의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판결이었다. 이정렬 판사는 “국가의 형벌권과 개인 양심의 자유권이 충돌하는 경우에는 형벌권을 한발 양보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이후 2018년까지 법원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양심적 무죄판결’ 한겨레21 기사 다시 보기
하지만 수십 년의 고통스런 침묵이 깨졌다고해서, 실제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삶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대체복무제를 추진하는 방안이 국방부와 국회에서 논의되다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없던 일’이 되었고,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대법원은 2004년 전원합의체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유죄로 판결했고, 헌법재판소도 2004년과 2011년 병역법 처벌조항이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겨레는 줄곧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한겨레21은 2007년 ‘양심을 따른 사람들’ 기획연재를 비롯해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한 깊이 있는 기획 보도를 이어갔다. 한겨레도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인터뷰, 기획 기사 등을 계속 쏟아냈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가 특정 종교인들만 겪는 고통이 아니라 보편적 인권의 문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 ‘감옥’이란 숙제를 끝낸 남자, 백종건 변호사 한겨레 토요판 기사 다시 보기
“아버지가, 그 아들이, 그 아들의 형과 동생과 다시 그 아들이 자신의 믿는 바 종교적 신념 때문에 징역 1년 6월의 형을 사는 사회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런 견해들이 다수의견이 되는 대법원을 보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으면서, 떠납니다.”
2012년 7월 10일 전수안 대법관은 이러한 퇴임사를 남겼다. 2014년 2월,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법원의 한 학술대회에서 전수안 대법관은 한겨레와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2001년 한겨레21 신윤동욱 기자의 시선을 통해 문제제기가 촉발된 이래, 이런 주제의 논의와 모임이 수없이 반복되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병역법을) 바꾸면 안 될 이유가 없습니다. 개인의 행복의 합계가 사회의 행복이라고 볼 때, 어느 개인의 행복이 증가하여도 다른 개인의 불행이 이를 상쇄하면 그 사회가 행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보다 어느 개인이 불행하면 그 자체만으로 이웃한 다른 개인이 온전한 행복감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파렴치범이나 반인륜적 범죄자를 일정기간 격리하여 그 범죄자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더 많은 다른 국민의 불행을 막기 위하여 부득이한 것이지만,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감금해 두는 일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국민이 불행해지거나 행복을 위협당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수백 명의 젊은이를 해마다 교도소에 보내지 않더라도 우리에게는 현역 60만에 예비군 300만의 병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자신의 양심에 따른 행동으로 처벌받아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파렴치범이나 일반 범죄인과 다른 특별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런 고통이 끝난 후에도 전과기록, 취업제한 등 고통은 길게 지속되고 오래 남습니다. 처벌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음도 처벌의 의미를 퇴색케 합니다.”
2001년 2월,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최초로 보도했던 한겨레21의 기사에서 감옥에 갇힌 병역거부자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의 바람이 2018년에는 이루어질 수 있을까.
자줏빛 미결수복을 걸친 청년은 고개를 돌려 잠시 방청석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응시한 뒤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판사님과 검사님, 저는 여호와를 숭배하는 백성으로서 성서적 양심을 지키고자 입영을 하지않고 자수하여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저는 국가적 관점에서 보면 처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의를 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월 11일 정오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 352호 법정. 병역법 위반으로 구속된 스물두살의 청년 이낙근씨가 최후진술을 하고 있었다. 짧은 최후진술을 끝으로 재판은 5분 만에 끝났다. 이날 검사는 2년형을 구형했고 일주일 뒤인 1월 18일 2년형이 선고되었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2001년 2월 한겨레21
2004년 7월 종교가 아닌 이유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한 사람들을 표지이야기로 다룬 한겨레21.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판사들의 잇따른 ’무죄’ 판결로 법관의 양심의 문제로까지 확장되었다. 이에 대한 한겨레 기사.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2017년 8월 1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옆 청와대 들머리에서 종교적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 904명의 서명이 담긴 청원서를 종로경찰서 보안과 직원에게 전달하기 앞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늦겨울 눈발이 안양교도소 담벼락에 흩날리던 2월 2일 오후 3시. 담 너머 접견실로 푸른 수의의 청년이 들어왔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낀 홍태규(23)씨는 “사동 청소일을 마치고 오는 길”이라며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유순한 인상과는 달리 홍씨의 죄명은 군법상 ‘항명죄’. 지난해 6월 논산훈련소에 입소한 홍씨는 집총을 거부해 항명죄로 군사재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장호원 육군교도소를 거쳐 이곳에서 9개월째 복역하고 있다.
앞선 이낙근씨가 입영 자체를 거부한 예외적 경우인 데 반해, 일단 입소 뒤 집총을 거부한 홍씨는 여호와의 증인 청년들이 걷는 전형적인 길을 보여주는 예다. 대부분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95년 이후 항명죄의 법정최고형인 3년형을 선고받고 있다.
힘들겠다는 위로에 홍씨는 “후회는 없다”면서도 “군복무를 대신할 대체 봉사제도가 마련돼 후배들은 이런 일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내비친다. 홍씨의 바람처럼 독일, 대만 등 많은 나라에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 봉사제도가 마련돼 있다.
-2001년 2월 한겨레21 ‘차마 총을 들 수가 없어요’
※ 한겨레 창간 30돌을 맞아, 한국사회를 바꾸는 데 기여한 특종이나 기획 기사의 뒷이야기를 <창간 30년, 한겨레 보도>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이 글은 디지털 역사관인 '한겨레 아카이브'에 소개된 내용의 일부입니다. 한겨레의 살아 숨쉬는 역사가 궁금하시다면, 한겨레 아카이브 페이지(www.hani.co.kr/arti/archives)를 찾아주세요. 한겨레 30년사 편찬팀 achiv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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