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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평양 단독 취재 뒷이야기

등록 2018-07-03 17:49수정 2018-07-06 14:49

[창간 30년, 한겨레 보도-11]
북녘동포 돕기 캠페인 등 북한 실상 알리고
남북 첫 합동연주 공연 ‘윤이상음악회’ 개최도

1994년 9월, 한겨레는 또 하나의 금기를 넘었다. 정연주 워싱턴 특파원이 평양을 방문했다. 베이징을 출발해 고려항공편으로 9월 6일 오후 6시, 평양에 도착했다. 10일부터 평양에서 열리는 북미 전문가 회의와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현지 실상을 취재하려 했다. 그때까지 한국 기자들은 여러 언론사가 함께 구성한 기자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해 특정 행사만 취재하거나, 관광객 등으로 신분을 숨기고 비공식 취재를 벌이는 게 전부였다. 단독 취재를 위해 북한을 찾은 한국 기자는 정연주가 처음이었다.

1994년 9월 6일, 정연주 당시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이 중국 베이징발 평양행 고려항공에 탑승하기 직전 여객기 앞에 서 있다. 한겨레 자료
1994년 9월 6일, 정연주 당시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이 중국 베이징발 평양행 고려항공에 탑승하기 직전 여객기 앞에 서 있다. 한겨레 자료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정연주는 1982년 미국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가 그곳에서 한겨레 창간 소식을 듣고 한겨레 통신원이 되겠다고 나섰다. 1989년 한겨레의 첫 해외 특파원이 됐다. 정연주는 물밑 접촉 끝에 북한 당국으로부터 취재 승인을 얻었다. 곧바로 워싱턴 주재 한국 총영사관에 북한 방문 신고서를 냈다. 베이징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는 정식 비자를 발급받았다. 한국 정부는 정연주의 방북을 문제 삼지 않았다. 통일원은 “필요한 법적 절차를 모두 밟았으므로 법적인 문제가 전혀 없다”고 밝혔다. 1989년 4월, 한겨레 기자들의 방북 취재 계획을 트집 잡아 신문사 간부들을 연행 구속한 지 5년 만의 일이었다.

1990년 9월 6일, 남북 고위급회담 취재를 위해 서울에 온 북한 기자단이 서울 양평동 한겨레신문사 사옥을 방문했다. 북한기자단 단장인 김천일 로동신문 보도부장(오른쪽)은 송건호 대표이사를 만난 자리에서 “한겨레신문이 통일을 위한 노력과 의지를 실상대로 보도해준 데 대해 북한 언론과 인민들을 대표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겨레 자료
1990년 9월 6일, 남북 고위급회담 취재를 위해 서울에 온 북한 기자단이 서울 양평동 한겨레신문사 사옥을 방문했다. 북한기자단 단장인 김천일 로동신문 보도부장(오른쪽)은 송건호 대표이사를 만난 자리에서 “한겨레신문이 통일을 위한 노력과 의지를 실상대로 보도해준 데 대해 북한 언론과 인민들을 대표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겨레 자료

그러나 이번에는 북한 당국이 한겨레의 방북 취재를 막았다. 정연주는 방북 나흘 만인 9월 10일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사건의 발단은 연합통신의 보도였다. 정연주가 방북을 준비하던 9월 3일, 연합통신은 워싱턴발로 “북한이 언론인이 선별 입국을 통해 대남 선전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다른 신문과 방송이 이를 그대로 인용해 다시 보도했다. 악의적인 거짓 기사였다. 기사를 쓴 것은 워싱턴 특파원이 아니라 연합통신 편집국장이었다. 서울의 책상 앞에 앉아 한겨레의 방북 취재를 ‘대남 선전 활동에 넘어간 일’로 취급했다.

방북 이틀째인 9월 7일, 정연주는 취재에 협조할 수 없다는 북한 당국의 통보를 받았다. 한겨레 기자의 취재를 허락할 경우, 우호적인 매체만 선별 입국시켰다는 남쪽의 보도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는 이유였다. 정연주는 평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 고위 인사들을 만나고 나진·선봉 지구를 방문하는 등의 취재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휴대용 컴퓨터, 녹음기, 휴대용 마이크, 90분짜리 녹음 테이프 40개, 카메라 필름 30통, 휴대용 프린터, 변압기 등 정연주가 북한에 들고 간 취재 장비 목록이다. 그의 평양 방문 목적은 관광이 아니라 취재였다. 정상적인 취재를 허용하지 않는 상태에서 평양에 하릴없이 머문다면, 나중에 한국 정부가 엉뚱한 의혹을 제기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한국 최초의 평양 단독 취재는 결국 미완에 그쳤다. 정연주는 베이징으로 돌아온 직후인 9월 12일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닷새 동안의 체류 중 보고 느낀 평양의 모습을 기사로 썼다. 취재를 허락받지 못한 상태에서 평양의 겉모습을 주로 살핀 감상을 적었다.

마지막 편에서 정연주는 북한에 대해 이렇게 썼다.

“우리 사회 극히 일부의 교조주의자들이 생각하듯 그 사회가 이상적인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해서 가만 두면 금방 망하게 될 사회도 아니었다.”

같은 기사에는 김일성 사망 이후 궁핍에 처한 북한 주민들의 실상에 대한 언급도 있다.

“이런 이야기가 부분적으로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 주민들이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에 대한 한겨레의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1994년, 시베리아에서 일하고 있는 북한 벌목공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사진부 기자가 찍었다.
1994년, 시베리아에서 일하고 있는 북한 벌목공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사진부 기자가 찍었다.

1994년 5월 22일, 한겨레는 1면에 시베리아 북한 벌목 노동자들에 대한 심층 르포 기사를 내보냈다. 당시 보수 언론은 탈북자들의 입을 빌어 러시아 벌목장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들이 모진 착취를 견디지 못해 집단으로 탈주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한겨레의 양상우, 강재훈과 한겨레21의 박태웅은 그 실상을 파악하려고 5월 1일부터 19일까지 러시아에서 추적 작업을 벌였다.

간첩으로 몰려 북한 관리들에게 체포당할 뻔한 위기까지 넘기며 이들이 취재한 진실은 이랬다.

북한 노동자들은 강제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려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러시아 벌목공 일을 자원한 사람들이었다. 배급을 주지 않아 굶으면서 일한다는 풍설도 거짓이었다. 오히려 북한보다 식량 사정이 나았다. 다만 기름진 식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집단 탈주가 횡행한다는 다른 언론의 보도도 실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북한 노동자들이 돈을 더 벌어보려고 다른 일을 도모하다 문제를 일으켜 벌목장을 탈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1994년 시베리아에서 일하는 북한 벌목공과 관련한 심층 르포. 강재훈 기자가 사진을 찍었다.
1994년 시베리아에서 일하는 북한 벌목공과 관련한 심층 르포. 강재훈 기자가 사진을 찍었다.

수용소 간부들에게 뇌물을 주고, 자기들끼리는 호칭 없이 김일성과 김정일의 이름을 거론하고, 남쪽의 경제 사정에 큰 관심을 보이면서, 북쪽의 궁핍한 처지를 비관하는 이들의 증언이 생생하게 지면에 담겼다. 한겨레는 실상을 한껏 부풀리는 남쪽 언론의 과장 보도와 현실을 아예 숨기려는 북쪽 간부의 거짓말을 동시에 비판했다.

이 기사는 1990년대 중반 남북 관련 보도에 대한 한겨레의 의미심장한 변화를 웅변한다.

창간 초기 한겨레는 반공 이데올로기와 냉전 의식을 강하게 비판했다. 기사의 내용에 앞서 기사의 어휘가 더 화제가 되었다. 한겨레는 한국 언론사 가운데 처음으로 김일성 ‘주석’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전까지 모든 신문과 방송이 호칭 없이 김일성, 북괴, 중공 등으로 표기했던 것을 한겨레는 김일성 주석, 북한, 중국 등으로 썼다. 지금에 와서는 당연한 일이 되었지만, 북한을 북한이라 부르지 못한 시절이 길었던 탓인지 한겨레를 ‘좌경용공’ 매체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 사망 사실을 알린 1994년 7월 10일치 한겨레 1면. 다른 신문이 ‘김일성’이라고 지칭할 때 한겨레는 ‘김일성 주석’이라고 공식 호칭을 붙여썼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 사망 사실을 알린 1994년 7월 10일치 한겨레 1면. 다른 신문이 ‘김일성’이라고 지칭할 때 한겨레는 ‘김일성 주석’이라고 공식 호칭을 붙여썼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북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리는 일을 중시했다.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을 전후해 북한의 경제난이 심각해졌는데, 한겨레는 그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했다. 보수 언론이 충분한 확인 없이 북한 체제의 붕괴 위기를 거론할 때, 한겨레는 정확한 사실만 보도했다. 남북 관계에 대해서 가장 신뢰할 만한 매체라는 한겨레의 평판은 이 시절 더욱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1997년 내내 한겨레 지면을 장식했던 북한돕기 캠페인이 대표적이다. 1997년 4월 4일, 한겨레 1면에 ‘아, 굶주리는 북녘’ 연재 기획 기사의 첫 편이 실렸다. 배급은 끊겼고, 굶주리다 못해 석탄가루를 먹고, 한 마을에서 하루 3명꼴로 굶어 죽는다는 사실을 전했다. 김경무, 유창하 기자가 직접 두만강 국경 지대로 가서 취재했고, 조선족 동포 한 명을 북쪽으로 들여보내 실상을 파악했다. 북한 주민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외신에서 나오고, 보수언론이 이를 확인 없이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한겨레는 이를 직접 취재했다. 4월 22일까지 10편에 걸쳐 연재 기사가 나갔다.

1997년 4월 11일치 한겨레 지면에 실린 ‘북녘 동포를 도웁시다’ 캠페인.
1997년 4월 11일치 한겨레 지면에 실린 ‘북녘 동포를 도웁시다’ 캠페인.

북한의 어려움을 과장해 반공·반북 이데올로기에 편승하려는 보수 언론의 보도가 넘치던 때였다. 실상을 알리는 한겨레의 보도가 이런 흐름을 강화시키는 게 아니냐는 걱정도 있었다. 이를 일축한 것은 오귀환 사회부장이었다. 그럴 때일수록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박우정 편집위원장도 관련 보도에 과감히 지면을 할애했다.

보도가 나가자 북한 동포를 도울 길이 없겠느냐는 문의 전화가 폭주했다. 민간단체들이 성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에 착안한 한겨레는 북녘동포돕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1997년 12월 말까지 9개월에 걸쳐 ‘북녘동포를 도웁시다’, ‘북녘어린이에게 생명을' 등의 연재 기획을 실으면서 모금운동을 벌였다. 한겨레를 빌어 도움의 손길을 내민 이들이 100만 명이 넘었다.

1999년 한겨레21은 해방 뒤 지속된 대북 특수 임무의 실체를 최초로 밝혔다. 기사로 사회적 파문이 일자 그동안 숨죽여 지내온 북파공작원들의 공개 발언이 잇따랐다.
1999년 한겨레21은 해방 뒤 지속된 대북 특수 임무의 실체를 최초로 밝혔다. 기사로 사회적 파문이 일자 그동안 숨죽여 지내온 북파공작원들의 공개 발언이 잇따랐다.

이 분야에서 의미심장한 한겨레의 특종이 더 있다. 1998년 3월 18일, 한겨레 1면에 안기부의 ‘북풍 공작’의 실체를 폭로하는 기사가 실렸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 즈음해 안기부가 특수 공작원을 야당 진영에 침투시켜 북한과의 접촉을 유도하고 이를 빌미로 탄압을 시도했음을 단독 보도했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정치 공작의 실상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1999년 8월 5일, 한겨레21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보낸 북파 공작원의 실상을 특종 보도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 파견되어 비밀 공작 등을 수행하다 숨지거나 실종된 북파 공작원이 모두 7726명에 이른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확인했다. 접근 불가의 영역으로 봉인되어 있던 군 정보사령부의 정보를 단독으로 빼내었다.

1989년 4월 7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당 비서국 비서 시절, 김일성 주석 등과 함께 한겨레에 실린 김일성 주석과 문익환 목사의 접견 기사를 보는 모습. 한겨레 자료
1989년 4월 7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당 비서국 비서 시절, 김일성 주석 등과 함께 한겨레에 실린 김일성 주석과 문익환 목사의 접견 기사를 보는 모습. 한겨레 자료

한겨레는 창간 초기부터 북한 관련한 보도 뿐만 아니라 남과 북을 잇는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1996년 1월 9일, 한겨레 1면에 서태지와아이들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북한에 가서 통일 염원을 담은 <발해를 꿈꾸며>를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곳 젊은이들과 자유에 대해서 한 번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통일에 힘을 보태려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한다는 내용이었다. 한겨레는 그해 1월 4일부터 매일 1면에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설립 캠페인’ 기사를 싣고 있었다. 패닉, 안성기, 임권택 등 문화예술인, 김수환, 송월주, 서영훈, 한완상 등 각계 원로를 포함해 모두 3만 2000여 명이 재단 발기인이 되었다.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은 통일을 위한 연구·학술 사업, 이산가족 생사 및 주소 확인 작업, 통일교육 사업, 남북 간 학술·문화교류 사업을 벌여나갈 참이었다. 1997년 6월에야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 정부 허가를 받아 정식으로 출범했다. 이후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은 남북 민간 교류의 개척자 역할을 했다.

1998년 10월 31일, 한겨레신문사와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 함께 처음으로 북한 땅에 발을 디뎠다. 북한 윤이상음악연구소와 함께 11월 3일 평양에서 음악회를 공동 개최하기로 되어 있었다. 분단 이후 남북의 음악인이 합동 연주하는 공연은 처음이었다. 11월 3일은 3년 전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이 독일 베를린에서 눈을 감은 기일이기도 했다.

1998년 11월, 평양에 있는 윤이상음악당에서 열린 윤이상통일음악회 모습. 한겨레신문사와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 북한 윤이상음악연구소와 공동 개최했다.
1998년 11월, 평양에 있는 윤이상음악당에서 열린 윤이상통일음악회 모습. 한겨레신문사와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 북한 윤이상음악연구소와 공동 개최했다.

윤이상은 1967년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38년 동안 고향을 오매불망 그리워했지만, 고향 통영 땅을 밟지 못한 채 외국 땅에 묻혔다. 평양에는 1984년 설립된 윤이상음악연구소가 있었다. 윤이상은 김일성 주석의 초대로 1979년 평양을 찾은 이후로 종종 평양에 머물면서 윤이상관현악단을 교육시키곤 했었다.

한겨레가 윤이상의 고향 남한과 음악의 제자들이 있는 북한을 잇는 가교가 되었다.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사무총장이었던 최학래가 윤이상 유족, 북한 쪽과 접촉해 일을 도모했다. 김일성 주석 사망과 조문 파동 이후 얼어붙은 남북의 마음을 녹이려면 음악밖에 없다고 최학래는 생각했다. 최학래는 그로부터 2년 뒤인 2000년 8월 46개 남한 언론사 사장단을 이끌고 북한을 다시 방문하게 될 운명이었다.

2000년 8월 12일, 최학래 한겨레신문 대표이사(당시 한국신문협회 회장)가 평양 목란관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2000년 8월 12일, 최학래 한겨레신문 대표이사(당시 한국신문협회 회장)가 평양 목란관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그런데 평양으로 떠나기 며칠 전, 통일부가 방북을 불허했다. 권근술 대표이사와 최학래가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며 백방으로 뛰었다. 다행히 하루 만에 결정이 번복되었다. 최학래 단장을 필두로 김덕수 사물놀이패, 박범훈 국립국악관현악단장, 바이올리니스트 김현미 등으로 구성된 서울연주단, 김보협 기자 등은 고려항공을 타고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 11월 3일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제1회 윤이상통일음악회에는 500여 명이 참석했다.

역사적인 공연이었다. 아쉽게도 윤이상통일음악회는 1회 공연에 그쳤다. 하지만 이 공연은 한겨레의 남북 관련 사업에 중요한 물꼬를 틔워줬다.

며칠 뒤인 11월 10일 권근술 대표이사와 리영희 이사, 신현만 비서부장, 곽병찬 편집국 정치부장 등이 다시 북한을 방문했다. 권근술은 남북어린이어깨동무 이사장을 겸하고 있었는데 7박 8일간 평양에 머물며 북한 당국자들과 민족의 화해와 상호이해를 위한 인도적 지원 및 사회문화 교류 방안을 협의했다.

한겨레와 남북어린이어깨동무 대표단은 남한 어린이들이 북한 어린이들을 생각하며 그린 그림 500점을 전달했다. 11월 17일 한겨레는 북한 통일신보와 ‘통일을 위한 협력관계를 발전시켜나간다’는 내용의 협력 의향서를 교환했다.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언론 협력 의향서였다.

2003년 8월 24일, 대구 시민운동장에서 유니버시아드대회 여자축구 북한과 프랑스의 경기가 열렸다. 북한팀이 골을 넣자 한겨레남북평화응원단원들이 기뻐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
2003년 8월 24일, 대구 시민운동장에서 유니버시아드대회 여자축구 북한과 프랑스의 경기가 열렸다. 북한팀이 골을 넣자 한겨레남북평화응원단원들이 기뻐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

이후에도 통일문화재단은 남북경협아카데미(1999년), 금강산 자전거 평화대행진(2001년), 평양어린이학습장공장 준공(2007년)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친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등 남북이 함께 출전하는 국제 체육경기가 열릴 때마다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은 남북공동응원단을 꾸려 남북선수들을 함께 응원했다. 한겨레가 벌이는 통일 관련 사업들은 대부분 수익과는 무관하다. 한겨레 창간사에 명토 박았듯이 “민주화를 위해 불가결의 조건이 되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한겨레의 역사적 임무라고 여겼다.

2018년 4월 27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한 땅을 밟았다. 북한 최고 지도자가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은 분단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판문점 평화의집 앞에 나란히 서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을 공동 발표했다.

평화를 향한 한반도의 대격변이 주는 무게감에 걸맞게, 한겨레 역시 ‘역사적인 지면’을 선보였다. 남북정상회담 다음 날인 4월 28일 치 한겨레 1면은 평소 신문의 두 배 크기로 제작되었다. 1면과 마지막 면을 연결하는 편집을 시도했다. 한국 언론 역사상 유례없는 편집이었다. 사진 크기만 가로 80센티미터, 세로 50센티미터에 이르렀다. 한겨레는 파격적인 편집을 선택하는 대신에, 마지막 면에 실리는 전면 광고를 포기했다. 어떤 종이신문보다도 돋보이는 편집이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난 다음날인 2018년 4월 28일치 한겨레 1면은 신문 1면과 마지막 면을 연결해 사상 최대 크기의 1면을 만들어냈다. 한겨레 자료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난 다음날인 2018년 4월 28일치 한겨레 1면은 신문 1면과 마지막 면을 연결해 사상 최대 크기의 1면을 만들어냈다. 한겨레 자료

한겨레는 4월 27일 홈페이지 문패를 ‘한겨레’에서 ‘우리는 한겨레입니다’로 바꿔 걸었다. 산뜻한 하늘색 수채화 느낌의 배경 위에 글씨를 얹었다. 문패 양쪽 끝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마주보며 웃는 모습을 일러스트로 배치했다. 제호가 ‘한겨레’였기에 가능한 실험이었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018년 4월 27일 한겨레 홈페이지. ‘한겨레’라는 제호를 ‘우리는 한겨레입니다’로 바꿨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018년 4월 27일 한겨레 홈페이지. ‘한겨레’라는 제호를 ‘우리는 한겨레입니다’로 바꿨다.

한겨레21 1210호도 표지 앞면과 뒷면을 연결하는 색다른 편집을 시도했다. 한겨레 자료
한겨레21 1210호도 표지 앞면과 뒷면을 연결하는 색다른 편집을 시도했다. 한겨레 자료

※ 한겨레 창간 30돌을 맞아, 한국사회를 바꾸는 데 기여한 특종이나 기획 기사의 뒷이야기를 <창간 30년, 한겨레 보도>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이 글은 디지털 역사관인 '한겨레 아카이브'에 소개된 내용의 일부입니다. 한겨레의 살아 숨쉬는 역사가 궁금하시다면, 한겨레 아카이브 페이지(www.hani.co.kr/arti/archives)를 찾아주세요. 한겨레 30년사 편찬팀 achiv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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