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낮 가습기살균제 참사 공론화 10주년을 맞아 피해자와 유가족이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사망자 유품 200여점을 공개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2011년 8월31일 이명박 정부가 가습기살균제 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참사가 공론화됐다. 그로부터 딱 10년 뒤, 피해자 단체들과 제조·유통 기업들이 피해 문제를 논의할 조정위원회를 꾸리기로 했다. 조정위원장으로는 김이수 전 헌법재판관이 추천됐다.
한정애 환경부장관은 31일 오후 2시 정부서울청사 합동브리핑실에서 브리핑을 열고 “최근 피해자 단체들과 관련 기업들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 문제를 조정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합의를 하고, 환경부 장관에게 조정위원장 추천을 요청했다”며 “고심한 끝에 김이수 전 헌법재판관님을 조정위원회 위원장으로 추전한다는 의견을 드렸다”고 밝혔다. 김 전 재판관이 위원장으로 위촉되면 조정위 구성과 협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김 전 재판관은 이날 <한겨레>와 통화에서 “기업 간 이해관계가 다르고 다양한 피해자 형태가 있어서 쉬운 조정은 아니겠지만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일이고 누군가는 맡아야 하는 일”이라며 “해볼 생각을 가지고 조정 작업을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조정위 구성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단체들과 관련 기업들이 이달 초 환경부에 조정 의사를 공식적으로 전달하며 이뤄졌다. 조정위에 참여하는 기업은 현재 피해 분담금을 납부하고 있는 가습기살균제 제조·유통업체 18곳 중 6곳이다. 옥시RB, 롯데쇼핑, 애경산업, 이마트, 홈플러스, SK케미칼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6개 기업의 피해 분담금 기여 비율은 전체의 98%에 이른다.
조정에는 합의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조정 대상과 조정 완료 시기, 예산 마련 방안 등은 확정되지 않았다.
한 장관은 이날 “(예산의 경우) 다른 사적 조정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며 “삼성전자, 에스케이(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관련한 사례에서는 기업이 조정위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100% 분담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가습기살균제 조정위원회는 공정성 시비를 고려해 참여 기업의 비용 지원을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
조정위가 선례로 삼고 있는 ‘반도체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삼성반도체백혈병조정위원회)’도 2014년 12월에 구성된 뒤 한 차례 결렬된 후 4년 만에 2차 조정안을 통해 중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의 경우 해당 기업이 18개이고 피해단체가 28개이기 때문에 조정안을 내기까지 더 복잡하고 오래 걸릴 것이라는 분석이다. 조정위에 참여한 한 기업 관계자는 “아직 시작 단계라 구체적인 조정이 어떻게 이뤄질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말을 아꼈다.
이번 조정 과정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에 대한 폭 넓은 인정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연구해온 임종한 인하대 보건대학원장은 “현재는 전체 피해 중 일부에만 국한돼 피해 구제가 이뤄지고 있다”며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면역기능이 약해져서 2,3차 질환이 발생한 경우 등을 폭넓게 포괄하는 쪽으로 구제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정위원장을 맡는 김 전 재판관은 지난 2011년부터 2018년까지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지냈다. 2009년 서울남부지방법원, 2010년 특허법원, 2011년 사법연수원에서 법원장을 지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시절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한 소수의견을 지속적으로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정위는 공적 피해구제 기구가 아닌 사적 협의 기구로, ‘가습기살균제 피해 구제를 위한 특별법’에 따라 운영되는 피해자 구제지급 정책과는 별도로 운영된다. 환경부는 “조정이 시작되더라도 법령에 따른 피해자 구제 지원 절차는 기존과 같이 진행된다”고 밝혔다. 그동안 정부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로 인정된 이들에게 요양급여, 요양생활수당, 장의비, 간병비 등 구제급여를 지급해왔다.
김민제 최우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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