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참사 12주기인 지난 8월31일 오전 서울역 들머리 계단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의 눈물: 유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옥시와 한빛화학이 김씨의 질병이 가습기살균제가 아닌 다른 원인으로 발생했다는 점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대법원이 9일 가습기살균제 ‘3단계 피해자’ 김아무개(71)씨에게 제조·판매사 옥시레킷벤키저와 한빛화학이 위자료를 배상해야 한다는 원심의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확정하며 밝힌 이유다. 정부가 김씨에 대해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폐 질환 가능성이 낮다’(3단계)고 판정했지만 “(이는)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말단 기관지 부위 중심 폐 질환 가능성을 판정한 것일 뿐”이며 “옥시 등이 제조·판매한 가습기살균제에는 설계상 및 표시상의 결함이 존재하고, 그로 인하여 원고가 신체에 손상을 입었으므로 손해를 입은 김씨에 대해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설명한 것이다.
환경보건단체들은 ‘가습기살균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지 12년 만에 “법원이 기업의 배상 책임을 묻는 첫 확정 판결을 내놓은 것”이라고 환영했다. 특히 2017년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특별법’ 시행으로 피해 인정 범위가 넓어졌지만, 기업이 인정하지 않았던 피해자가 위자료를 받을 길이 열렸다는 데 의미를 부여했다. 이들은 이번 판결을 계기로, 사건 발생 10년이 넘도록 가해 기업에 제대로 된 책임을 묻지 못하고 피해자들이 제대로 배상·보상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김씨는 옥시가 판매한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하다 ‘상세 불명의 간질성 폐 질환’ 등 진단을 받았지만, 정부로부터 3단계 판정을 받아 가해 기업으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자 직접 민사소송에 나섰다. 김씨 등 3단계 판정자는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뜻하는 4단계 판정자와 함께 초기 정부지원금 대상에서 제외됐다가, 2017년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정부 지원을 받는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특별법은 가습기살균제 노출 뒤 피해가 발생한 사실과 질환의 일반적인 역학관계만 확인되면 피해자로 인정하며, ‘인과관계 없음’을 증명할 책임은 가해 기업에 두고 있다. 하지만 옥시 등은 특별법 시행 이후에도 김씨 등에 대한 배상을 하지 않고 버텨왔다.
김씨와 비슷한 이유로 수많은 피해자들이 가해 기업을 상대로 민사소송에 나섰지만 대부분 1심 판결조차 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들이 개별적으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까닭에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상황이다. 김영환 환경보건시민센터 연구위원은 “옥시는 불매운동이 일어나자, 일부에게만 배상해주고 그 이후로는 피해자들을 외면하고 있다”며 “수백명의 민사소송 수십건이 쌓여 있다”고 말했다.
특히 옥시를 비롯한 가해 기업들은 최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구제급여를 위한 사업자 분담금을 앞으로 내지 않겠다고 환경부에 통보하는 등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미적거리고 있다. 환경보건단체 등에서는 비슷한 시기 같은 제품에 노출돼 피해를 본 이들을 법적으로 집단 구제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강홍구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는 “이번 판결이 현재 피해자들이 개별적으로 진행하는 소송 결과에 영향을 줄 수는 있겠지만, 이번 판결 자체는 소를 제기한 김씨에게만 적용된다”며 “환경 사건의 특성을 반영할 수 있도록 집단소송제의 전면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소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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