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봉 농가는 국내 최대 밀원식물인 아까시나무가 개화하는 5월에 최대한 많은 양의 꿀을 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남쪽부터 서서히 찾아올라오던 봄이 남북을 가리지 않고 한 번에 찾아오면서 일할 수 있는 날도 줄고 있다.
“평소엔 남쪽 지방부터 순차적으로 꽃이 피니 남쪽에서 중부·강원도 쪽으로 이동하면서 한 달 정도 아까시꿀을 딸 수 있었어요. 한데 이제는 전국적으로 동시 개화해 버려서 양봉할 수 있는 날도 줄었어요. 더욱이 올해는 4월 말이 추웠고, 5월에는 비가 많이 와서 예년의 20%밖에 꿀을 수확하지 못했습니다.”
28일 한국양봉협회 김종상 전무는 기후변화로 양봉 농가들의 시름이 깊다고 전했다. 양봉 농가는 국내 최대 밀원식물인 아까시나무가 개화하는 5월에 최대한 많은 양의 꿀을 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남쪽부터 서서히 찾아올라오던 봄이 남북을 가리지 않고 한 번에 찾아오면서 일할 수 있는 날도 줄었다. 봄이 빨라지는 것은 기후변화의 대표적 현상이다.
과실나무의 개화 시기도 빨라진다.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배연구소가 제공하는 ‘과수생육·품질관리시스템’을 보면, 전라남도 나주의 배나무(신고) 꽃이 만개한 시기는 평년(1981~2010년) 평균 4월16일이었지만, 2018년에는 4월7일, 지난해에는 4월11일, 올해는 4월4일로 빨라졌다. 발아 시점도 평년 평균 3월15일이었지만, 2018년 3월14일, 지난해엔 3월12일, 올해 3월9일이었다. 40년 전인 1980년에는 발아 3월25일, 만개한 날은 4월19일이었다. 배연구소 이한천 연구관은 “1981년부터 2010년까지 배꽃 피는 시기를 조사해본 결과, 10년 기준 1.21일씩 총 3.6일가량이 빨라지는 경향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개화기가 4월 초중순으로 앞당겨졌는데 올해와 같이 봄추위가 닥치면 과실 농가는 저온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올해 4월엔 평년보다 따뜻했던 지난겨울에 데워진 공기층이 중국·몽골에 고기압을 형성하면서 한반도로 북서풍이 불어와 일시적인 추위가
발생했는데, 이 역시 기후변화의 여파였다.
식물의 변화는 일종의 ‘경고음’이다. 이처럼 기후변화 때문에 개엽·개화 등 식물의 생장 시점이 평년보다 빨라지면, 인간이 자연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다양한 혜택들을 누리지 못할 수 있다. 식물의 개엽, 개화, 열매 생성 시기의 변화는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이다. 생태계는 오랜 시간에 걸쳐 식물의 개화에 맞춰 벌이 날고 열매 생성에 맞춰 곤충이 부화하는 것으로 약속해왔다. 이 ‘생태시계’가 고장 나면 먹이사슬의 불일치가 발생해 생태계 교란이 일어날 수 있다.
서창완 국립생태원 생태평가연구실장은 “대부분 동물들이 얻는 에너지의 기본은 식물의 광합성 작용부터 시작된다. 그런 식물을 먹고 사는 곤충, 조류와 다른 생물들로 연결되는 생태계 질서가 있는데, 이 시점이 틀어지면 질서가 무너진다”며 “생물다양성이 유지되지 못하면 인간이 생태계를 통해 누리는 각종 서비스를 더 이상 이용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조제되는 약품의 25%가 식물 성분을 포함하고 있고, 동양에서는 5100여종의 동식물을 치료약의 재료로 쓰고 있다. 제주 생물자원 300종 이상이 화장품 원료로 쓰인다.
다만 기후변화로 개엽·개화 시기가 빨라지고 단풍 시기가 늦어져 식물 생장 기간이 길어지면 적어도 국지적으로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식물이 광합성하면서 흡수하는 이산화탄소의 양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기온 상승으로 사막화되는 다른 지역을 고려하면 지구 전체적으로 긍정적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늘어 식물 생장 시기가 변하고 있다는 가설도 있다.
글·사진/최우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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