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 1일 ‘북한 원전 건설 문건’ 관련 자료를 공개했다. 산업부가 ‘북한 원전 건설 추진 논란’과 관련해 “아이디어 차원에서 검토한 검토 자료”라고 해명했음에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논란이 계속되자 원문을 전격 공개한 것이다. 사진은 이날 산업부가 공개한 6쪽짜리 문건. 연합뉴스
보수야당과 보수언론이 “이적행위”의 근거로 내세운
산업통상자원부의 ‘북한지역 원전건설 추진방안’ 문건이 북한 비핵화를 상정한 산업부 내부검토 자료인 것으로 굳어지고 있다.
연일 ‘북한 원전 극비 추진 의혹’을 부추기던 보수언론은 슬그머니 논조를 바꾸며 발을 빼는 모양새다. ‘북한 원전 추진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문건을 삭제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해 왔는데, 정작 산업부에 해당 문건이 남아있고 원문까지 공개되자 ‘북한 원전 건설을 계속 추진하려고 문건을 남겨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새로 제기하고 있다.
월성원전 관련 산업부 공무원들의 감사방해죄 등에 대한 검찰 공소장을 보면, 이 문건은 산업부 김아무개 서기관이 감사원 감사 직전인 2019년 12월1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 사이 업무용 컴퓨터에서 삭제한 530개 파일 가운데 하나다.
산업부는 김 서기관이 월성원전과 무관한 듯 보이는 이 문건을 삭제한 이유에 대해서는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함구하고 있다. 문건이 남겨지게 된 경위와 삭제한 이유에 따라 감사방해죄와 공용기록물손상죄 등의 적용과 형량도 달라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청와대 쪽에서는 김 서기관이 해당 문건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이 아니라 실수로 삭제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최재성 청와대 정무수석은 2일 <문화방송> ‘김종배의 시선집중’ 인터뷰에서 “(김 서기관이) 개별 항목들을 전부 점검하면서 문제가 될만한 것을 삭제했다고 보기 힘들다. 폴더 전체를 삭제하는 과정에 (북한 관련 문건이) 끼어들어 간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실제 삭제된 문건 파일 가운데는 장관이 참석한 행사사진 파일 등 월성원전의 조기 폐쇄와는 무관한 파일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굳이 삭제할 필요가 없는데도 다른 파일들에 끼어 삭제됐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검찰의 공소장에 첨부된 530개 파일 삭제 현황 자료를 보면 문제의 문건이 의도적으로 삭제됐을 가능성도 있다. 이 문서는 핀란드어로 북쪽을 뜻하는 ‘뽀요이스(Pohjois)’라는 이름의 폴더에 있던 다른 16개 파일과 함께 2019년 12월2일 새벽 1시16분30초에 삭제됐다. 시간 순으로 보면 530개 파일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이뤄진 삭제였다. 검찰 수사에 앞서 이뤄진 감사원의 감사보고서를 보면, 김 서기관은 당시 매우 급하게 삭제 작업을 진행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마지막에 굳이 해당 폴더를 삭제한 것에 비춰볼 때 단순한 ‘전체 삭제’가 아닐 수도 있다.
지난달 31일 신희동 산업통상자원부 대변인이 정부서울청사에서 북한 원전 추진 의혹 관련 주장에 관해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와 관련해 산업부가 지난 1일 공개한 문건 내용에서 다른 가능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문건에서 검토한 북한 원전 추진 방안은 3가지이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케도) 부지인 함경남도 금호에 건설 △비무장지대에 건설 △신한울 3·4호기 건설 후 북한으로 송전이다. 이중 세번째 방안인 신한울 3·4호기 건설은 이미 백지화된 신한울 3·4호기를 계속 지어 북한에 송전하는 안인데, 탈원전을 위해 건설을 중단시킨 원전을 다시 짓는 것이라 문재인 정부 정책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산업부가 이런 방안을 검토한 것이 공개되면 야당보다 먼저 청와대에서 화를 낼 일이고, 어떤 식으로든 논란이 일 수 있다. 산업부 원전 업무 담당자가 이런 우려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문건에는 이 방안의 단점으로 “북한용 원전을 남한에 건설하고 사용후 핵연료도 남한에 저장하는 것에 대해 (여론의) 반발 가능성이 있음”이라고 적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외교안보수석을 지낸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의 해석도 이런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천 이사장은 1일 페이스북과 <한겨레> 인터뷰를 통해 “비핵화 보상 차원에서 원전 건설을 검토한 것이라면 호들갑 떨 일은 못 된다”며 보수진영의 ‘이적행위’ 주장을 반박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가 추진해온 탈원전 정책의 명분과 정당성을 부정하는 증거를 인멸하려는 시도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고 말했다.
검찰 공소장을 보면, 산업부에서 이 내부검토 문건을 작성한 날짜는 2018년 5월14일이다. 얼어붙어 있던 남북 관계가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급반전하면서 전례 없는 평화 무드에 빠져 있던 때였다. 3월5일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가 전격 발표되고, 4월27일 이뤄진 회담에서는 연내 종전선언을 천명한 판문점 선언까지 나왔다. 5월11일에는 6월12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개최 발표까지 나와 남북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안팎의 기대가 한껏 높아진 상황이었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을 전후로 한 시기에 북한에 원전을 지어주자고 보도했던 언론 기사 제목들 모음. 양이원영 더불어민주당 페이스북
북한에 원전을 지어주자는 취지의, 2018년 5월10일치 <중앙일보> 지면에 실린 칼럼
원전산업계와 친원전 언론에서는 이런 분위기를 틈타 북한에 원전건설을 추진하자는 목소리를 높였다. 원전 관련 산업, 학계, 노동계 등에서는 남북정상회담 개최 발표가 나오고 보름 뒤 ‘원전수출 국민행동’을 출범시키고 “북한에 한국형 원전을 짓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보수 언론에는 “북한의 심장을 한국형 원전이 뛰게 할 때 진짜 평화 온다”며 북한에 원전 건설을 주장하는 칼럼이 등장했다.
이런 국내외 상황에서 당시 산업부의 원전산업 담당 부서가 북한지역 원전건설 추진 방안을 검토한 것을 전혀 엉뚱한 일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에 따른 탈원전 정책까지 수정해야 하는 내용까지 포함된 것은 아무리 아이디어 수준의 기초적 검토라고 해도 정부 내에서도 논란이 될 수 있는 일이다. 이 문건은 원전담당 부서 내부검토로 끝나 청와대는 물론 산업부 장관에게도 보고가 안 된 것으로 알려졌다. 백운규 당시 산업부 장관은 이 문건에 대해 “금시초문”이라고 말했다.
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