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18일 경남 함안군 함안면 ㄱ마을에서 혼자 살던 근육장애인이 혹한으로 얼어 터진 수도꼭지에서 새어나온 물에 젖어 동사했다. 11년 뒤인 지난 10월31일 그의 집이 철거된 집터엔 공사장에서 내보낸 돌덩이와 검은 대형 파이프들이 쌓여 있다. 함안/이문영 기자
▶ <한겨레> 토요판이 독자들과 <恨국어사전>을 편찬합니다. 국가가 국민의 표준을 지정할 때, 표준에서 배제된 국민에게 ‘韓국’은 ‘恨국’이 됩니다. 韓국어가 ‘뼈를 깎는 구조조정’이라 쓸 때, 恨국어는 ‘뼛가루들의 고통’이라고 읽습니다. <恨국어사전>은 표준어에 외면당한 표정 있는 언어들(은어·속어·조어)로 ‘恨국의 다층’을 봅니다. 독자들의 恨국어 제보(moon0@hani.co.kr)를 기다립니다. 그 언어들이 모이고 쌓여 ‘韓국이 가린 恨국의 정면’이 포착되길 기대합니다.
복지 누수
[정치] ‘복지 재정 낭비’를 뜻하는 박근혜 정부식 표현. 복지 재정이 새고 있거나 불필요한 지출이 이뤄지고 있다는 시각을 전제로 한다. 불가피한 예산을 동결·삭감하거나 복지 수급자를 ‘예비 범죄자(부정수급자 적발)’로 취급한다는 지적이 있다.
[비슷한 말] 복지 군살
[사용례] 필제(가명·84) 아재가 손가락으로 내 집을 가리켰다.
“저기, 저그.”
낯선 남자에게 내 집(경남 함안군 함안면 ㄱ마을) 위치를 알려주며 아재는 말했다.
“잘 보래. 보이능교?”
남자가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해 두리번거렸다.
“커다랗고 시커먼 파이프 쌓인 데 있제. 거기라.”
남자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집이 없는데요.”
아재가 재차 확인했다.
“거기라.”
그새 필제 아재도 고령의 할배가 됐다. 몸집이 야위었고 주름은 깊어졌다.
“거기 있었니라.”
그래, 나, 여기 있소.
“인자는 엄따. 암것도 엄따.”
아재요, 나 광식(가명·1964년생)이, 여기 아직, 있다꼬요.
“바쁘다”며 필제 아재가 등 돌려 갈 길을 갔다. 혼자 남은 남자가 파이프 더미 앞에서 서성였다. 파이프 위로 후드득 비가 떨어졌다. ‘그날’(2005년 12월18일) 나를 습격했던 차가운 물이 오늘(2016년 10월31일)은 차가운 하늘에서 떨어졌다.
치치 치지직.
그날 밤(당시 영하 10도 추정) 물이 찢어지던 소리를 잊을 수 없다. ‘억수로 추웠던 그해 겨울 함안에서도 엄청난 동파’(광식씨의 5촌 조카)가 있었다. 조용한 밤을 깨고 수도꼭지에서, 치치치 치릭치릭, 물이 앓았다.
좁은 방 두 칸, 재래식 부엌, 낡은 마루, 삭은 슬레이트 지붕. 그때 나의 세계는 그 작고 곤궁한 집의 크기로 줄어 있었다. 근육장애(5급)가 악화된 스무살 무렵부터 나는 집에 갇혔다. 자주 넘어지고 혼자 걷기 힘들어진 뒤부터 그 집이 나의 지구였다. 날이 좋으면 마루로 기어나가 볕을 쪼였고, 날이 흐리면 방에 누워 사라진 해를 기다렸다. 동네 사람이 건강을 물을 땐 다만 희미하게 웃기 위해 사력을 다해 얼굴 근육을 당겼다.
치치칙 치치치칙 취취취骨.
물이 울었다. 창원(경남)에서 직장을 다니던 친형이 혼자 사는 나를 생각해 부엌방을 개조했다. 거동이 힘든 내게 재래식 부엌은 불편하고 위험했다. 부엌방에 형이 싱크대를 놓고 수도꼭지를 달았다. 그 수도꼭지가 얼어 터져 물을 뱉기 시작했다. 수도꼭지가 시린 이빨처럼 물을 놓치며 우는 소리를 냈다.
“뭐라꼬?”
사촌 형수(86)가 남자의 얼굴을 고요하게 쳐다봤다. 내 집 바로 뒤에 있는 형수의 집 앞에서 그 남자가 소리 지르며 내 이야기를 물었다.
“사촌 시동생 광식씨 말인데요.”
남자의 고함은 형수의 고막을 울리지 못했다. 형수에게 남자의 목소리는 음성이 아니라 입모양일 뿐이었다.
“안 듣기요.”
형수가 귀에서 보청기를 빼 보였다. 머리카락이 검은 기운 없이 새하클다.
형수요. 언제부터 소리를 잃었소?
손으로 자기 머리를 짚으며 형수가 남자에게 혼잣말 같은 말을 했다.
“올봄에 아프고 났디마 정신이 한 개도 없는 기 소리가 확 가부뮌제.”
조용한 마을보다 더 조용할 형수의 외딴 세계가 나는 애처로웠다.
“춥으요. 한잔 자시소.”
형수는 끝내 누구인지 모를 남자에게 믹스 커피를 끓여 건넸다.
형수요. 나도 추웠소.
그날 나도 못 견디게 추웠다. 부엌방에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내게도 두 발로 땅을 걷고 두 눈에 밖을 담던 때가 있었다. 중학교 졸업 뒤엔 울산으로 나가 일도 했다. 더는 임금 노동자로 고용되지 않는 몸이 됐을 때 나는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의탁했다. 마을은 집성촌이었다. 일가의 땅을 빌려 어머니는 밭을 갈았다. 키운 채소를 뜯어 장에 내다 팔아 나를 먹였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뒤 홀로 남은 어머니가 나를 돌봤다. 나보다 딱 하루 더 살게 해달라고 빌었을 어머니는 나를 남겨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위암). 물이 차올랐다. 새다 말 물이 아니었다.
팔토시가 뚫렸다. 바닥을 짚고 벽을 밀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토시로 수도꼭지를 감았다. 어머니가 떠난 뒤 9년 동안 나는 혼자였다. 형이 창원에서 올 수 없을 땐 마을 친지들에게 전화해 나를 들여다보게 했다. 창원 형수가 반찬을 만들어 한 달에 서너 번씩 찾아왔다. 직접 찾아 쓰지 못하는 수급(생계급여+장애수당=21만1100원) 통장은 형이 관리했다. 수도(水道)를 막은 줄 알았던 토시는 꼭지에 걸렸을 뿐이었다. 물이 토시를 밀고 나왔다.
물이 부엌방을 넘어 내가 있는 방으로 건너왔다. 그 징그러운 물을 바라보며 나는 배가 고팠던 것 같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자활후견기관에서 도시락도 오지 않는 날이었다. 도시락이 없을 때 나는 굶거나, 마른 빵을 씹거나, 밥을 지으려다 쌀을 쏟곤 했다. 해보지 않아 할 줄 모르는 것이 많았다. 나는 이미 5급 장애(1994년 진단)보다 나빠졌으나 재진단이 가능한지 몰라 등급(현재 장애인단체들은 등급제 폐지 요구)을 상향하지 못했다. 혼자인 나는 내 몸 안팎에 뚫린 구멍들이 무서웠다. 구멍은 채우지 못한 허기였고, 통제하지 못하는 배설이었고, 붙들지 못하는 눈물이었다. 채워 넣는 것도, 쏟아져 나오는 것도, 내 뜻대로 조절되지 않았다.
남자가 우산을 폈다.
빗소리가 파이프에 튕겨 퉁퉁 울렸다. ㄱ마을은 갈수록 조용해졌다. 사람이 줄어드는 만큼 소리도 줄어들었다. 비가 오면 비 떨어지는 소리가 사람 소리를 이기고 마을 안으로 자박자박 스며들었다. 골목마다 버려져 방치된 집들이 비와 바람에 파손되고 마모됐다. 벽 뚫린 잿빛 건물로 빗물이 뛰어들어 사람 없는 집 안의 공기를 깨웠다. ‘그날’로부터 11년 동안 60여가구 중 절반이 자물쇠를 채우고 공가(空家)가 됐다. 마을 이름을 딴 유일한 가게도 문을 닫았다. 나와, 나의 집, 나의 시간, 나의 흔적, 나의 마을 전체가 그 시간 위에서 옅어지고 지워졌다.
그 밤 물이 악어처럼 기어왔다. 분명 내게도 꿈이 있었을 텐데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옷을 끌어당겨 방 안에 둑을 만들었다. 집 뒤 언덕엔 두 그루 굵은 소나무가 있었다. 근육 튼튼한 아이처럼 나도 나무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고 싶었다. 물이 둑을 통과했다. 마을 맞은편에 기차역(함안역)이 있었다. 들어오고 나가는 기차를 타고 나도 이동하고, 여행하고, 탈출하고 싶었다. 물이 몸에 도착했다. 마을 오른쪽에 성산산성(사적 제67호)이 있었다. 가야·신라시대 산성터에서 터를 닦은 사람들처럼 나도 내 삶을 새로 닦고 싶었다.
전기패널이 누전돼 방바닥이 얼음이었다. 몸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집엔 전화기가 없었다. 전화기를 빌릴 이웃이 있다 해도 전화기를 찾아 움직일 수 없었다. 전화기를 찾아 움직일 수 있다 해도 전화 버튼을 누를 만큼 손가락이 자유롭지 못했다. 전화 버튼을 눌러 통화가 이뤄진다 해도 제대로 통화할 자신이 없었다. 굳은 혀가 만들어내는 내 발음은 이미 독해가 힘들 만큼 엉클어져 있었다.
고인 물(40㎜)이 얼기 시작했다. 평소 성가시던 놈들도 곁에 없었다. 입에 넣지 못해 흘린 밥과 반찬을 쥐가 동거하며 먹었다. 쥐가 먹고 남긴 찌꺼기에선 구더기가 번성했었다. 물 앞에서 무서웠던 것은 내가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보다 움직일 수 없는데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몸이 방바닥에 달라붙고 있었다. 물에 젖은 이불을 당겨 덮었다. 이불이 돌덩이처럼 나를 눌렀다.
“죽고 나서 여내(이내) 엄써졌어.”
임례(가명·70) 아지매가 남자에게 알려줬다.
“광식이 가고 폐가가 된께 지붕이 확 내리앉아 욈어.”
아지매도 참 많이 늙었소.
“3년 뒤인가 군청에서 비용 대서 철거했제.”
집이 철거된 자리에서 나는 비를 맞는다. 집 뒤 공사장에서 던져놓은 돌덩이와 대형 파이프가 내가 누웠던 방과 내가 기댔던 마루 자리에서 뒹굴고 있다. 비를 막아줄 낡은 지붕이 이제 내겐 없다.
“얼굴이 언 방바닥에 붙어 있었다 카데. 밖에 나오지도 몬하고 병들어 혼자 있었응께네.”
화장된 나는 부모님 묘소 앞에 가루로 뿌려졌다. 가난한 농가에 숨겨져 있던 나의 존재는 얼어 죽고서야 세상에 드러났다. 노숙인도 아닌 나는 거리가 아니라 집에서 동사했다. 나는 수돗물 누수로 죽은 것이 아니다. 나는 움직이지 못해 죽은 것이 아니라 움직이도록 도와준 사람이 없어 죽었다.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나의 장애지만 움직일 수 없는 나를 혼자 둔 것은 나의 장애가 아니었다. 고장난 것은 내가 아니었다. 제대로 작동해본 적 없는
복지는
누수로 망가진 것이 아니라 한 번도 샐 만큼 차본 적 없어 고장났다. 바짝 마른 나의 삶에 빼야 할 살은 없다.
군살이 있을 만큼
복지가 살쪄본 적도 없다.
임례 아지매가 남자에게 말했다.
“사고사는 사고사인데 어디서부터 사고가 난 기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박경석 상임공동대표(왼쪽)와 회원들이 2012년 11월8일 국회 정론관에서 김주영씨(10월26일 활동보조인이 퇴근한 뒤 화재로 사망)의 죽음에 항의하며 24시간 활동보조서비스 도입을 요구하던 중 얼굴을 묻고 눈물을 삼키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내가 죽은 지 2504일째(2012년 10월26일) 김주영(34·뇌병변장애)이 죽었다. 활동보조 현실화를 요구해온 운동가가 활동보조인이 퇴근한 뒤 화재로 숨졌다. 내가 죽은 지 2507일째(2012년 10월29일) 박지우(13·발달장애)·지훈(11·뇌병변장애) 남매가 죽었다. 활동보조·돌봄지원 없이 부모가 일하러 간 뒤 화재로 숨졌다. 내가 죽은 지 3040일째(2014년 4월17일) 송국현(53·중복장애)이 죽었다. 자립생활을 준비하며 활동지원을 받지 못한 채 홀로 화재로 숨졌다. 내가 죽은 지 3054일째(2014년 5월1일) 오지석(32·근육장애)이 죽었다. 호흡기 없인 숨 쉴 수 없는 그가 활동보조인이 퇴근한 뒤 호흡기가 빠져 숨졌다.
나의 집터를 빙빙 돌던 남자는 요약될 수 없는 나의 약사(略史)를 수첩에 적었다.
“조광식은 2005년 12월18일 홀로 얼어 죽었다. 그의 죽음은 2007년 활동보조 전국 시행의 계기가 됐다. 조광식이 죽은 지 3908일째(2016년 8월30일) 활동보조 예산을 동결·삭감한 2017년도 예산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그와 그들은 여전이 꽁꽁 얼거나 활활 타는 집에 갇혀 있다.”
나, 우리, 아직 여기 있소.
함안/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2005년 12월 함안 장애인 동사 당시 경찰 발표와 언론보도, 11년 뒤 현장 취재(친지와 마을 주민들)를 토대로 재구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