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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의료·건강

진짜 관계 알게 한 ‘암’…이다지 예쁜 딸에게 해줄 말

등록 2022-02-26 17:51수정 2022-02-26 18:05

[한겨레S] 양선아의 암&앎
암 진단과 관계의 재조정

“시간 흘러 엄마 죽을까 봐 슬퍼”
잠들기 전 중2 딸의 ‘사랑 고백’
암 진단 뒤 가족 외려 단단해져
시련이 삶 성찰 기회 가져다줘
일러스트레이션 장선환
일러스트레이션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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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는 지금도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게 너무 슬퍼.”

딸이 말했다.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민지는 잠자기 전에 엄마와 나누는 대화를 좋아한다. 야간 근무를 하는 남편은 따로 자고, 아들은 할머니와 함께, 민지는 나와 함께 잔다. 이날도 불을 끄고 민지와 이야기를 나누다 시간에 대한 이야기로까지 소재가 확장됐다. “슬프다고? 시간이 흘러가는데 왜 슬퍼?” 내가 물었다. 그런데 아이가 갑자기 울먹인다.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니 아이 눈에서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난데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없이 딸을 안아주고 등을 토닥토닥 해주었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많은 딸이 공부나 입시, 진로 걱정을 하나 싶었다. “시간이 흘러가면 왜 슬플까…. 지금이 너무 좋아서 그러는 건가? 시간이 정지했으면 하는, 아니면 시간이 흐른 뒤의 미래가 걱정되는 건가? 음, 엄마는 그 이유가 궁금하네….” 한참을 울먹이다 딸이 입을 연다. “엄마가 나보다 더 나이가 많잖아. 그러면 엄마가 나보다 더 먼저 죽는 거잖아. 나는 엄마가 좋아질수록 엄마가 나보다 더 먼저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슬퍼. 그러면 갑자기 눈물이 나와.”

‘중2’ 딸에게 받은 사랑 고백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도 울컥하며 내 눈물샘에서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 무섭다는 중2 올라가는 딸에게 느닷없는 이런 사랑 고백을 받다니. 나는 너무 행복한 사람 아닌가.’

딸이 엄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또 엄마와 얼마나 함께 있고 싶어 하는지, 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딸이 엄마가 암 진단 받았을 때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등등 여러 생각이 스치면서 가슴속에 뭔지 모를 감정이 벅차올랐다. 이날 나는 내가 아이들을 훨씬 더 좋아하고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어쩌면 아이들이 나를 더 좋아하고 사랑하고 의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아이들 곁에 내가 단단하게 서 있어야 한다고, 가슴 저 밑바닥에서 아이들에 대한 강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딸을 꼭 안아주면서 이 예쁜 마음을 가진 딸에게 무엇을 얘기해줄까 생각했다. 삶과 죽음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이야기, 또 사후세계에 대한 내 생각 등을 얘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참을 안아주고 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언젠가는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슬프구나. 맞아.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두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이별하니까 슬프지. 엄마도 외할머니가 돌아가신다고 생각하면 그저 눈물만 나와. 그래서 엄마도 민지의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아. 엄마는 40대니까 엄마랑 민지랑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그래도 많아. 그런데 외할머니는 60대이시고 엄마가 외할머니랑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더 짧아. 그래서 엄마는 할머니한테 더 잘해드리고 싶고 할머니랑 더 좋은 시간 보내고 싶고 그래. 그런데 우리 민지는 벌써 그런 생각 하다니 정말 많이 컸다.

그런데 민지야. 엄마 진짜 건강관리 잘해서 우리 민지 곁에 오래오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죽음을 생각한다면, 그래서 지금이 더 소중한 거야.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 언젠가는 죽잖아.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가 함께할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또 시간이라는 자원이 얼마나 한정된 것인지 알 수 있지. 그래서 살아 있을 때 더 좋은 시간을 많이 만들어야 하는 것 같아. 그리고 엄마는 예전에는 죽어버리면 이 삶이 끝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야. 엄마는 영적 세계를 믿어. 그래서 엄마가 죽더라도 엄마의 영은 항상 민지를 지킬 거야. 옆에서 잔소리도 할 것이고. 드라마 <고스트닥터> 봤지? 엄마는 고스트맘이 되는 거지. ㅋㅋ.”

딸은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다 ‘고스트맘’ 발언에 웃음보가 터졌다. 사춘기에 접어든 뒤 무엇이든 논리적으로 따지고 드는 딸은 ‘영적 세계’에 대해 나와 토론을 벌이다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잠들었다.

나의 암 진단은 우리 가족에게 큰 위기였다. 그런데 이 위기를 통해 우리 가족 관계는 많이 달라지고 재조정됐다. 가족 간의 관계는 더 깊어졌고, 좋은 방향으로 조금 더 명료해진 듯하다.

빚을 갚기 위해, 또 딸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기 위해 돈을 버느라 항상 바빴던 친정어머니는 내 투병 생활 때문에 강제적으로 나와 살게 됐다. 사업도 접고 많은 돈을 포기하게 됐지만, 대신 딸과 손주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아마도 내 병이 아니었다면, 친정어머니는 돈만 열심히 벌다가 돌아가셨을지도 모르겠다. 강사였던 남편은 내가 병가를 내고 쉬게 되자 투잡을 뛰게 됐다. 이전에 남편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가사와 양육을 했다. 나는 아이들도 많이 컸고 나와 친정어머니가 집에 있으니 남편에게 경제적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암 진단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된 건, 그동안 나와 친정어머니가 우리 집 경제에 대한 책임을 과도하게 짊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두 아이와 나는 암 진단 전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가진 불만이 무엇인지, 또 무엇을 원하는지 등을 상세하게 알게 됐다.

암이 알려준 가짜, 진짜 친구

주변 환우들 얘기를 들어보면 암 진단 뒤 가족 관계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변화하고 재편된다고 한다. 한마디로 가짜 친구, 진짜 친구를 구별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 내가 아플 때 진정으로 함께 슬퍼하고 도움을 주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자주 연락했다가 암 진단 소식 뒤 연락이 뜸해지는 친구도 있다. 또 이런저런 걱정을 하는 것처럼 이야기는 하지만 경솔하게 툭툭 내뱉는 말로 상처를 주는 친구도 있다. 심지어 어떤 환우는 암 진단 보험금을 빌려달라고 한 친구도 있었다고 하니, 암이라는 시련이 진짜 친구와 가짜 친구를 분별할 수 있는 기회임은 틀림없다.

행복은 통장 잔고 순도 아니고, 학벌이나 권력, 명예 순도 아니다. 많은 심리학자는 행복은 (좋은) 관계 순이라고 말한다. 암이라는 위기가 없었다면 나는 내가 맺어오던 관계 방식을 그대로 유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현재의 관계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편되겠지만, 이렇게 인생의 어느 길목에 멈춰 서서 한번쯤 자신의 관계를 탈탈탈 털어 괜찮은 관계인지 성찰해보고 재정비해보는 일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사회정책부 기자 anmadang96@kaka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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