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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의료·건강

‘존엄사’는 되지만 ‘웰다잉’은 못하는 사회

등록 2017-11-13 18:43수정 2017-11-13 23:49

[밥앤법] 연명의료결정법 내년 2월 시행

전문의가 판단한 말기환자
연명의료 중단 가능해져
매일 노인 30~40명 상담
대부분 “경제적 부담” 이유

법 취지는 ‘좋은 죽음’이지만
삶의 마지막 길 보살펴주는
호스피스 시설·홍보는 부족
“공익재단 만들고 인식 전환을”
경기 포천 모현호스피스를 다룬 다큐멘터리 <목숨>(2014년)의 한 장면. 고 김정자(가운데)씨는 10년 만에 장만한 새집으로 이사한 지 한달 만에 담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여생을 위해 마련한 아파트에서 김씨는 가까운 이들과 마지막 집들이를 했다.  영화 화면 갈무리
경기 포천 모현호스피스를 다룬 다큐멘터리 <목숨>(2014년)의 한 장면. 고 김정자(가운데)씨는 10년 만에 장만한 새집으로 이사한 지 한달 만에 담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여생을 위해 마련한 아파트에서 김씨는 가까운 이들과 마지막 집들이를 했다. 영화 화면 갈무리

내년 2월부터 불필요한 연명의료 대신 ‘합법적인 존엄사’를 가능하게 할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된다. 좀더 시간을 갖고 영원한 이별을 준비하려는 ‘웰다잉’이 아직 우리한테는 낯설다. 법 시행 뒤 어떤 변화가 있을까. 보건복지부가 지난달부터 시작한 관련 시범사업의 안과 밖을 살펴봤다.

“저도 암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준비할 기간이 있으니까. 생의 마무리도 준비하고 가족들과(의 이별)도 준비할 수 있으니까.”

아내는 자신도 암으로 죽길 바란다. 남편은 위암 말기다. 친정 엄마도 한 해 전 암으로 세상을 떴다. 엄마가 머물던 호스피스(완화의료기관)에 남편이 입원했다. 아내는,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강릉으로 마지막 가족여행을 떠난다. ‘예정된 죽음’은 시간과 관계의 밀도를 키운다. 남편은 말한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다. 가족들이 서로를 진심으로 대하고 사랑한다고 느낀다.”

경기 포천시에 있는 ‘모현호스피스’(모현의료센터)를 다룬 다큐멘터리 <목숨>(2014년)의 일부다. 다큐멘터리는 “호스피스에 입원하는 환자들의 평균 생존기간은 21일”이란 자막으로 시작된다. 21일 동안 등장인물은 각자의 방식으로 생과 이별한다. 영화는 ‘영원한 이별’을 준비하는 이들의 모습을 담담히 기록한다.

<목숨>의 등장인물은 모두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를 택했다. 관련 법이 내년 2월 시행된다.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이다. 2016년 초 제정돼 예고기간 2년을 채웠다. 보건복지부가 지난달부터 시범사업을 벌이고 있지만, 세간의 관심은 합법적인 ‘연명의료 중단’에 쏠렸다. 법안의 핵심이라 할 호스피스엔 외려 관심이 적다. 호스피스에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모습이 아직 우리한테는 많이 낯설다.

법이 만들어진 배경엔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과 2008년 ‘김 할머니 사건’이 있다. 두 사건 모두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켰다. 보라매병원 사건에선 퇴원을 요청한 보호자와 이를 허락한 의사가 각각 살인죄와 살인방조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반면 김 할머니 사건에선 대법원이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한 보호자의 손을 들어줬다. 한국에서 ‘존엄사’를 인정한 첫 판례였다.

그때 만들어진 ‘연명치료 중단 기준’은 다듬어져 법이 됐다. △환자가 회생이 불가능한 임종기이거나, 수개월 안에 사망할 ‘말기환자’여야 하고 △이에 대한 전문의 2명의 의학적 판단이 있어야 하며 △연명치료를 하지 말아달라는 환자의 사전의료지시(‘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연명의료계획서’)가 있거나 △사전지시가 없는데 환자 의식이 없는 경우, 환자의 평소 가치관·신념에 관한 가족 2명 이상의 일치된 진술, 혹은 가족 전원의 합의가 있으면 연명의료를 합법적으로 중단할 수 있다. 시범사업이 시작된 지난달부터 이 ‘의향’을 국민 누구나 미리 밝혀둘 수 있게 됐다.

*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지난 1일 서울 중구 을지로 국립중앙의료원 내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실천모임’ 사무실에서 만난 이인자 사무국장은 “시범사업 이후 70~80대 어르신들이 하루에도 30~40명씩 찾아온다”고 했다. 이곳에선 사전연명의료의향서 관련 상담을 받고, 이를 작성해 등록할 수 있다. 등록한 문서는 시범사업이어도 법적으로 유효하다. 이 국장이 보여준 의향서 등록 대장엔 153번까지 순번이 기록돼 있었다. 상담만 한 뒤 돌아간 이들도 있었다.

찾아오는 이들 중엔 홀로 사는 노인이 많았다. 그들은 대개 가족에게 경제적 부담을 지우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임종기’나 ‘말기’에 대한 지식도 없다. 한 노인은 이 국장에게 “치료가 어려우면 괜한 돈 들이지 말고 그냥 죽여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루게릭병 환자인 듯한 이는 전화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자연스레 생을 마감하는 존엄사와 죽음을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안락사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실천모임에선 이미 2010년부터 의향서를 받았다. 벌써 30만명분이 작성돼 있다. 이곳에선 새 법정 양식에 맞춰 다시 쓰는 일도 돕는데, 이 국장은 “상담 인력과 공간이 빠듯하다”고 했다. 정부 예상보다 일반인의 관심이 높은 것이다. 특히 호스피스 홍보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의향서에 ‘호스피스 이용 여부’를 묻는 항목이 있는데, 이 국장은 “많이들 망설이거나 고민하다 번복한다”고 했다. 호스피스는 지난 8월부터 기존 말기암에 더해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 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 만성간경화 등으로 대상 질환을 확대했다. 해당자라면 호스피스 비용의 5~10%만 부담하면 되지만, 이를 아는 이가 드물고 상당수는 ‘괜한 비용’으로 여긴다.

일반인의 인식과 달리 연명의료결정법의 핵심은 호스피스다. 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펴낸 ‘죽음의 질’ 보고서(2015년)에서 조사 대상 80개국 가운데 1위를 기록한 영국은, 50년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호스피스 개념을 도입했다. 완화의료에 대한 건강보험 지원은 2001년(한국은 2015년)부터 이뤄졌다. 영국이 2008년 만든 ‘좋은 죽음’ 개념을 보면 ‘익숙한 환경에서 존엄한 인격체로 존중받으며,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고통 없이 죽어가는 것’이다. 가족들과 제대로 된 이별도 못한 채 차디찬 병원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는 우리한테는 먼 나라 얘기다. 실제 우리 국민 대다수는 병원에서 숨진다.

2014년 전국 성인남녀 1500명을 대상으로 한 국민건강보험공단 조사에서 원하는 임종 장소를 ‘가정’이라 답한 이는 전체의 57.2%였다. 이어 19.5%가 호스피스, 16.3%가 병원, 5.2%가 요양시설이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실제 임종 장소는 가정이 줄고 병원이 는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1991년까지만 해도 임종 장소의 74.8%가 가정이었다. 2014년엔 단 16.6%만 가정에서 숨졌다. 반면 1991년 15.3%에 불과했던 병원은 2014년 73.1%로 급증했다. 선진국과도 차이가 크다. 2011년 기준 호스피스를 이용하는 말기환자(13개 질환 기준)는 미국이 52%, 캐나다 40.8%, 영국 46.6%, 대만 39%였다. 한국은 5.6%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로 알려진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는 호스피스 인프라 구축을 통한 ‘웰다잉’ 문화 조성, 곧 ‘국가웰다잉책임제’를 강조한다. “핵심은 연명의료 중단 결정을 둘러싼 의학적·법률적 문제가 아닙니다. 치료가 불가능해져 죽어가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돌봐야 한다는 겁니다.”

윤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면, 호스피스는 질병보다는 ‘질병을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사회적·심리적 보살핌이 가능한 곳이다. 가족과 친구 등 남은 이들과의 관계나 경제적 문제를 정리할 수 있게 돕고, 자서전 작성이나 심리치료 등을 통해 환자가 스스로 삶을 돌아보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남은 가족도 보살핀다. 하지만 지금은 호스피스 환자의 50%가 입원 2주 안에, 75%는 한달 안에 숨진다.

좀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생의 마무리’를 준비하려면 사회 전반의 인식과 인프라가 바뀌어야 한다. 연명의료 중단 결정 합법화는 이 ‘전환’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윤 교수는 “호스피스 확충을 위한 공익재단이 필요하다.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닌 ‘완성’이 되도록 우리 사회의 사고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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