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S] 기획 _ 5주년 ‘직장갑질119’ 상담 참여해보니
게티이미지뱅크
‘권고사직 원해? 그럼 해고’ “대표가 권고사직을 권했고, 청년내일채움공제 중도 해지할 때 상실 코드 23번으로 퇴사 처리를 해주신다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퇴직 처리하는 날 갑자기 말을 바꿔, 권고사직으로 하면 대표님이 지인들을 임의로 직원으로 등록해 받고 있는 청년일자리 도약 장려금이 끊기기 때문에 자진 퇴사로 처리하겠다고 합니다. 지원금 부정수급으로 신고를 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또, 자진 퇴사 처리하겠다며 소리를 지르고 언어 폭행을 했는데 5인 미만 사업장이어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한 청년 노동자의 분노와 답답함이 채팅창을 가득 메웠다. 권고사직이냐 자진 퇴사냐는 노동자가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을지를 가르는 기준이다. 상실 코드(고용보험) 23번 역시 ‘경영상 필요 및 회사 불황으로 인한 인원 감축으로 인한 퇴사’를 뜻하므로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장치다. 자신의 의사에 반해 퇴직을 하는 노동자라면 당연히 권고사직으로 처리를 해야 한다. 하지만 사업주 쪽에선, 특히 이 사례처럼 각종 정부 지원금을 받고 있다면 회사의 귀책 사유로 퇴사시킨다는 흔적을 남기는 게 불리하다. “정부에서 고용 관련한 여러 지원금을 주는데, 권고사직으로 인한 퇴사에는 지급을 끊거든요. 그래서 회사에선 권고사직 처리를 안 해주려고 하는데, 문제는 5인 미만 사업장은 근로기준법 적용이 안 되니까 해고가 자유롭잖아요. 그러니 ‘권고사직 원해? 오케이, 그럼 넌 해고’ 이렇게 되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윤 변호사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며 옆에 앉은 기자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채팅창엔 “권고사직으로 퇴사하는 것이니만큼 실업급여를 받으셔야죠. 당연히 지원금 부정 수급도 신고하시고요”라고 응답했다. 또 “전남 인권위원회가 5인 미만 사회복지시설의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한 적이 있지만, 5인 미만은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으로 사업주를 처벌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명백한 괴롭힘이므로 법원에 불법행위에 따른 위자료 청구는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직장갑질119가 지난 1일로 창립 5주년을 맞았다. 서울 중구 정동 직장갑질119 사무실에서 사진 취재에 응하고 있는 오진호 집행위원장(왼쪽부터), 권남표 활동가, 윤지영 변호사, 신지영 활동가, 정현철 사무국장, 박점규 언론담당.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시말서 함부로 쓰지 마세요 시말서는 단골 상담 주제 가운데 하나다. 이날도 <한겨레>가 참여한 1시간30분 동안에만 두 사람이 시말서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 오늘 당장 그만두는 사람에게 시말서 수정을 요구했다는 제보에 박점규 직장갑질119 언론담당은 “임금 체불 같은 회사 쪽 잘못을 감추고 ‘나가는 직원이 잘못해서 우리한테 손해를 입혔다. 체불임금 지급 등을 요구하면 손해배상 소송을 하겠다’는 식으로 노동자의 입을 막으려고 시말서를 요구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말했다. 윤 변호사가 채팅방에 “시말서는 어떤 사정의 자초지종, 경과를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쓰는 것이므로 그 누구도 수정을 지시할 수 없으니 그에 응할 필요가 없다. 퇴사하면서 시말서를 쓰게 하지는 않는데, 일부러 쓰게 하고 이걸 회사가 악용할 수도 있다”고 조언하자, 비슷한 경험을 한 다른 노동자가 하소연했다. “저 또한 시말서 수정 지시를 받아 제출했는데, 징계위원회에서 시말서를 악용해 정직 3주 처분을 받았다”는 것이다. 윤 변호사는 “노동위원회에 부당징계 구제 신청을 할 수 있다”고 안내했다. 동시에 여러 사람이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이야기를 읽고 핵심을 재빨리 파악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단문이나 몇 단어씩 끊어 메시지를 올리는 경우엔, 다른 이들이 올린 글과 뒤엉켜 몇번이나 스크롤을 오르내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울분에 차서 상담에 필요한 사실관계보다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게 우선인 사람도 있고, 글로 상황을 정리해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메시지를 올리는 사람이 많다 싶으면 조금 지켜보다 채팅방을 나가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전화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지켜보기에도 전화 상담이 더 편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전화를 놓으면 업무가 마비된다”(박점규)고 했다. 상근 활동가 4명, 반상근 활동가 1명으로 꾸려가는 단체 사정을 생각하니 이해가 됐다. 전국 곳곳에 노동조합과 노동법률상담소, 노동자 지원센터 등 전화 상담을 하는 데가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렇게 5년 동안 받은 오픈채팅방 제보가 10만건이다. 한림대성심병원의 선정적 장기자랑 요구 갑질이 오픈채팅방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대표적인 사례다. 신원이 확인된 전자우편(1만7807건)까지 합치면, 직장갑질119는 그동안 12만건에 가까운 노동자들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었다. _______
모든 노동자가 ‘갑질’ 해방되려면 직장갑질119 오픈채팅방엔 1200명 넘는 사람이 들어가 있다. 돌아가며 상담을 하는 활동가들과 변호사, 노무사를 제외하고도 약 1천명이다. 상담을 하러 온 이들은 대체로 자기 이야기를 끝내고 필요한 답변을 받으면 채팅방을 나가지만, 물어보고 싶은 게 남았거나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연대하려는 이들은 그냥 남는다. 그렇게 5년 동안 모인 이들의 수가 그렇게 늘었다. 정현철 사무국장은 “채팅방 상담 시간(오전 10시30분~밤 9시, 토요일 오전 10시30분~낮 12시)이 아닐 때 새로운 분이 들어와 질문을 하면, 오래 계셨던 분들이 상담 시간을 안내하거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을 표하거나, 사견을 전제로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참고 의견을 내곤 한다”고 말했다. 상담 사례 중엔 분통을 터트리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경우도 흔하다. 잔돈으로 급여를 지급한 경우가 그렇다. 법으로 처벌할 수 있다 해도 직장생활을 계속해야 한다거나, 법적 대응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고려하면 차라리 포기하는 게 낫겠다 싶을 때도 있다. 이 때문에 윤 변호사는 “법대로 하는 게 능사는 아니고, 오히려 그게 더 사람을 피곤하고 힘들게 할 때가 있다. 상담을 계속하다 보니, 원칙대로 싸우라는 말이 점점 하기가 어렵다”고 고충을 털어놓으며 “좀 더 현실적인 해결책을 고민하고 제안할 때도 생긴다”고 말했다. 5인 미만 사업장, 간접고용노동자(파견·용역 등)와 특수고용노동자 등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이 아니어서 노동권·인권 침해를 당해도 구제받기 어렵고 직장 내 괴롭힘 인정도 받기 힘든 경우는 상담과 공감이 아니라, 근본적인 법 개정이 필요한 대목이다. 직장갑질119는 “국무회의에서 근로기준법 시행령만 개정하면 모든 사업장에 법을 적용할 수 있다. 또,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이 발의한 근로기준법 개정안대로 법에 ‘제3자에 의한 괴롭힘’, 즉 직장과 이해관계가 있는 도급인, 고객 등의 괴롭힘을 막는 조항을 넣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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