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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하늘의 친구

등록 2016-06-19 13:45수정 2016-06-20 10:55

[토요판] 윤운식의 카메라 웁스구라
기아자동차지부 사내하청 노동자 전원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지난해 6월 서울시청 앞 옛 국가인권위원회 광고탑 위에서 고공농성에 들어간 최정명(모자 쓴 이)씨와 한규협씨가 지난 1년간의 농성을 풀고 내려오기에 앞서 8일 오전 그동안 키우던 콩잎에 마시던 물을 마지막으로 주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기아자동차지부 사내하청 노동자 전원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지난해 6월 서울시청 앞 옛 국가인권위원회 광고탑 위에서 고공농성에 들어간 최정명(모자 쓴 이)씨와 한규협씨가 지난 1년간의 농성을 풀고 내려오기에 앞서 8일 오전 그동안 키우던 콩잎에 마시던 물을 마지막으로 주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한규협(41·왼쪽)씨와 최정명(45)씨는 일 년 동안 하늘감옥에 갇혀 있었다. 누가 가라고 한 것도 아닌데 땅을 딛고 외치는 그들의 목소리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자 결국은 두 발을 하늘로 옮겼다. 예전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하늘을 오를 때도 그랬다. 아무리 소리쳐도 누구 하나 반응하는 자 없으니 그들도 위태로운 철탑 꼭대기로 올랐다. “죽는 거 빼고는 다 해봤다”고 절규하는 노동자들은 땅을 떠나 크레인으로, 다리 위로, 굴뚝으로 그리고 철탑 위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늘에서 외친다고 해도 누가 들어줄 리 없지만 그래도 그냥 죽을 수 없다는 심정으로 올랐으리라. 한 걸음 한 걸음 꼭대기로 올라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싸움을 시작하는 가슴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그래도 누군가는 들어주겠지 하는 심정으로 천근 같은 발걸음을 떼었을 것이다.

금속노조 기아차지부 화성지회 사내하청분회. 이름만큼이나 이들의 고용구조도 복잡하다. 실질적으로는 원청의 통제 아래서 일을 하면서도 사실상 차별적 대우를 받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이다. 같은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 전원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서울 중구 옛 국가인권위원회 광고탑에 오른 두 사람은 일 년이란 세월 동안 땅에 발을 딛지 못했다. 계절이 한 바퀴 돌 동안 얼기설기 엮어놓은 천막에서 비바람, 눈보라, 뜨거운 태양 다 견디고 버텼지만 성인 두 명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좁은 곳에서 생활하다 보니 육체적 고통이 뒤따랐다. 체력 저하와 건강 이상으로 더 이상 생존이 힘들었다. 결국 두 사람은 지난 8일 내려오기로 결정했다. 지난해 시작한 고공시위가 363일째로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내려오기로 맘먹은 날 오전 한규협씨가 마지막으로 콩 줄기에 물을 준다. 지난봄, 숨 쉬고 사는 생명체가 그리워 작은 공간에서 기를 수 있는 콩과 꽃씨를 올려 달라고 부탁해 우여곡절 끝에 오른 놈들이다. 사람들이 득실대는 서울의 한복판 높은 곳, 고개 한 번 쳐들면 보이는 곳이련만, 사람들은 땅바닥만 보며 다녔다. 삶에 쫓긴 사람들은 머리 들어 하늘 한 번 올려다볼 여유도 잊어버렸던가 보다. 사람 많은 대도시의 꼭대기에서 역설적으로 다가온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혹시나 하고 심었는데 생명은 위대했다. 여리게 싹을 틔웠던 콩 줄기가 어느새 무릎 위까지 자랐다. 날이 좋아지자 보라색 나팔꽃이 자태를 뽐냈다. 고통의 겨울을 보내고 봄바람이 산들산들 텐트 사이를 비집고 다닐 때부터 키웠던 놈들이다. 외롭고 힘들고 지칠 때 이들을 위로해준 벗들이다. 두 사람은 내려가면서 이들도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텐트의 기둥을 칭칭 감싸쥔 작두콩은 떼어낼 수가 없었다. 모진 곳에서 살아보겠다고 텐트 기둥 붙잡고 올라온 놈이다. 강한 삶의 의지를 보는 것 같아 많은 힘을 준 동지 같은 놈이었다. 수줍은 나팔꽃 하나와 씩씩한 콩 나무 하나만 같이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이번에 내려가면 다시는 올 수 없는 곳이기에 혼자서 이 자리를 지킬 작두콩 줄기에 먹다 남은 생수를 다 부어줬다.

두 사람이 땅에 발을 딛는 순간 경찰은 재빠르게 이들을 차에 태웠다. 다행히 데려온 식물 두 개는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 뒤였다.

“텐트 기둥을 감싼 줄기를 풀면 죽을 것 같아서 남겨놓고 왔어요. 위에서 마음의 평온을 준 유일한 친구였는데 같이 못 내려와서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한규협씨의 풀 죽은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

지금도 꼭대기엔 텐트와 콩 포기가 남아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 생명을 유지할지 의문이다. 그렇지만, 그런다고 삶은 끝나지 않는다. 이들이 내려왔다고 끝이 아니듯이 말이다.

사진에디터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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