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언 원장이 옹기의 형태를 잡기 위해 발로 물레를 돌리면서 옹기 안쪽에 조막을 대고 수레착으로 두드리고 있다. 제주 옹기는 이처럼 두드려서 모양을 내는게 특징이다.
강창언 원장의 제주옹기 복원 분투기 /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제주 전통가마에 대한 기록이 없었어요. 말을 듣고, 추정도 하고, 지형적으로 가마터가 있을 만한 곳은 수십 군데 넘게 찾아다녔죠. 늘 걸어다녀야 했기 때문에 그때 제 꿈이 중고 오토바이라도 한대 갖는 것이었습니다.”
강창언 원장은 “한두줄의 기록만 있었어도 그렇게 힘들게 방황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가마터 발굴을 위한 도보 탐사는 여러 가지 성과를 낳았다. 그는 80년부터 7년간 제주도를 발로 누빈 끝에 가마터 47군데를 찾아냈고, 서부지역인 대정읍과 한경면 일부 지역에 도요지가 집중되었던 사실 등을 처음 세상에 알렸다. 또 100곳 이상의 절터를 발견했고, 방사탑과 동자석, 환해장성 등 문화재와 사적도 찾아내 학계 등에 보고했다. 그런 인연으로 87년부터 10여년 동안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근무하면서 제주 전통가마와 제주옹기 복원에 대한 체계적 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시안게임에 이어 올림픽을 치르면서 제주도 곳곳에 새로 길이 나고 아스팔트 포장이 되면서 가마터를 비롯한 많은 유적들이 파괴되었습니다. 또 전통옹기를 만드는 도공들도 고령으로 한분 한분 세상을 떠나셨어요. 이러다간 제주 전통옹기의 맥이 완전히 끊겨버리겠다 싶더군요.”
94년초 사재를 털고 은행돈을 빌려 지금의 자리에 도예원 터를 마련한 뒤 노 도공을 찾아나섰다. 석요을 축조하는 굴대장, 옹기를 빚는 옹기대장, 흙과 땔감을 준비하는 건애꾼, 불을 태서 구워내는 불대장 등 4개 분야에서 90년대 초까지 40명이 넘었던 전통옹기 기능인은 모두 16명만 남아있었다. 그나마 고령 탓으로 실제 작업할 수 있는 이는 13명밖에 없었다. 그가 도공들에게 “전통가마와 옹기를 복원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사정했지만 “그 엄청난 일을 어떻게 하려느냐. 성공할 수 있느냐”며 손사래를 쳤다. 심지어 어떤이는 “내 손에 흙을 묻히게 하지 마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만큼 일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묵묵히 2년 동안 문을 두드렸다. “지금 복원하지 않으면 영원히 맥이 끊겨버린다”며 눈물로 호소하자 노 도공들의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시 제주도에서 굴대장은 홍태권(84) 옹 한분밖에 남지 않았지요. 지금은 거동도 못하시지만 당시에도 몸이 몹시 불편하셨습니다. 그런 분에게 현장 지도만 해달라고 매달려 겨우 전통가마를 복원할 수 있었죠.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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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11월부터 가마를 만들기 시작했다. 석요의 맥을 잇기 위해 유능한 석공인 김태수(당시 55살)씨를 데려와서 전수를 받게 했다. 한편으로는 가마를 만들면서 또 한편으로는 가마터를 실측하고 정밀도를 작성하고 영상에 담는 작업을 벌였다. 그렇게 3년을 걸려 98년 12월 남제주군 대정읍 영락리 5번지 4000여평에 60평 규모로 두개의 석요를 완성했다. 30여년 만에 제주 전통 석요가 복원된 것이다.
그로부터 1년뒤인 99년 12월, 마침내 석요에 불을 지폈다. 허벅과 항아리 등 전통 옹기 60종 400여점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강 원장은 이를 시작으로 노 도공들의 증언과 옹기조각들을 비교한 결과 전통옹기가 허벅류 36점을 포함해 200여종에 이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가운데 120여종을 복원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내 또다른 고민에 빠져야 했다.
“복원만 성공하면 너무 신비롭고 새로운 기술이어서 젊은 사람들이 달라붙을 줄 알았는데 2~3년을 못 버티고 떠나버립디다.”
그의 수하에서는 97년부터 도자기를 배우겠다고 와서 9년째 버티고 있는 허은숙(39)씨를 비롯한 전수생 4명이 전통옹기를 배우고 있다. 하지만 쉽게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다. 99년에는 석요 전수를 받았던 김태수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또 전통옹기 복원에 참가했던 옹기대장 네 사람 가운데 송창식(64) 옹과 고정대(73) 옹이 각각 2000년과 2003년에 잇따라 세상을 뜨면서 고원수(76) 옹과 신창현(67) 옹만 남았다.
옹기대장과 굴대장에 이어 어쩔 수 없이 불대장과 건애꾼의 기능까지 떠맡아 익혀두어야 했다. 해마다 도공들이 한분 두분 세상을 떠나는 마당에 전통옹기를 보전하는 일은 이제 그에게 ‘선택사항이 아니라 절박한 필수조건’이 되었다. 365일 도예원을 개방하고 2000년부터 해마다 2차례씩 전통도공들을 초청해 워크숍을 열고 자료를 공개하고 있지만 국내 전문가들이 도예원을 방문한 예는 한번도 없었다.
“저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불안합니다. 전통옹기의 맥이 끊겨서는 안된다고 아무리 외쳐도 당국과 학계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일본, 중국, 미국, 캐나다, 프랑스 등지에서 도예가와 학자 등 전문가만 40여명이 도예촌을 다녀갔습니다. 정작 국내에선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그런 무관심이 우리 작업을 암담하게 합니다.”
88년 이만해(46)씨와 결혼해서 얻은 두 아들 지승(19·제주공고3년), 유빈(13·제주서중1년)에게는 “워낙 힘든 작업이므로 강요하지는 않지만 관심을 부추기고는 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특히 초등학교 시절 가마를 지필 때마다 아빠를 거들며 관심을 가져왔고 옹기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큰아들에게 몰래 기대를 키우고 있다.
제주/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사진 강재훈 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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