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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권·복지

‘익명출산’ 추진하는 정부·국회, 안전한 임신중지 보장은 뒷짐

등록 2023-07-11 06:00수정 2023-07-11 15:30

‘낙태죄 헌법불합치’ 이후 4년간 입법 공백
피임·임신중지·출산 포괄 재생산권 보장 손놔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주최로 지난 4월 9일 오후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국가는 임신중지를 건강권으로 보장하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주최로 지난 4월 9일 오후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국가는 임신중지를 건강권으로 보장하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스무살 무렵인 2021년 7월 임신 사실을 알게 된 ㄱ씨는 아이 아빠를 명확히 알 수 없었다. 인공임신중절을 고민했지만 형편이 어려워 병원에 가지 못하고 임신 35주차가 돼서야 인터넷에서 임신중지(낙태)를 할 수 있다는 약을 사서 복용했다. ㄱ씨는 이듬해 3월 자신의 집 화장실에서 출산했는데, 이미 숨졌을 거라 여긴 아기는 살아 있었다. 아기를 화장실에 방치해놓고 외출하는 등 영아살해미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그는 지난 4월 항소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정부와 국회가 ㄱ씨처럼 위기 상황에 놓인 여성과 아동을 돕겠다며 익명 출산이 가능한 보호출산제 도입을 강하게 추진하고 있으나, 막상 원하지 않는 임신을 예방하기 위한 피임, 임신중지, 출산과 양육 등 재생산권 보장을 위한 제도 마련엔 손 놓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생산권은 차별·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성관계·피임·임신중지·양육 등 출산 관련 과정에 대해 모든 사람이 스스로 결정하고 필요한 정보·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한겨레>가 10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남인순 의원실을 통해 확보한 보건복지부의 ‘인공임신중절 관련 임신·출산 상담체계 구축 방안’(2020년 10월)을 보면 인공임신중절 고민 사례 3만5315건, 23살 이하이거나 미혼모 등 사회경제적 취약층 임신·출산 7만630건에 대한 상담, 시설보호아동(0~2살) 1320명과 베이비박스 167건의 사례관리 계획이 담겨 있다. 헌법재판소가 2019년 4월 사회경제적 사유로 인한 갈등 상황까지 예외 없이 모든 임신·출산을 강제하고, 이를 위반한 여성과 의료진을 처벌하는 형법의 ‘낙태죄’ 조항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결정한 지 1년 반가량이 지나서야 나온 조처였다.

복지부는 2020년 11월 원치 않는 임신으로 위기·갈등 상황에 놓인 이들에 대한 긴급상담, 의학적으로 안전한 인공임신중절 허용, 성·피임 교육을 비롯한 임신·출산 정보 접근성 강화 등을 담은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3년 가까이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헌재 결정으로 낙태죄 처벌 조항은 2021년 1월부터 효력을 상실했으나 국회가 필요한 후속 입법을 회피하는 상황이다. 남인순 의원실 관계자는 “그동안 (낙태죄 조항이 있던) 형법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자보건법 개정도 소관 상임위에서 논의되지 못했고, 상담체계 구축 등 형법과 관계없는 사안을 먼저 논의하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진척이 안 됐다”고 설명했다. 복지부도 형법에서 임신중지 요건을 정해야 모자보건법 개정을 통해 임신중지를 포함한 임신·출산 지원 및 상담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먹는 임신중지 약물(미프진)의 정부 허가도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최근 아동의 친부모 알 권리를 침해하고 자칫 양육 포기를 부추길 수 있다는 보호출산제 반대 여론을 의식해 정부 차원의 수정법안을 국회에 제시한 적극적 행보와 대비되는 대목이다.

원하지 않는 임신·출산을 경험하는 여성은 아이와 자신 모두에게 해로운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가족이나 아이 아빠 등과의 대립과 갈등, 직장·학교에서의 고립, 경제적 어려움, 정보 부족 등의 문제를 겪기 때문이다. 오영나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는 “10대 임신부 중에는 인터넷에서 부정확한 정보를 보고 임신중지를 시도하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익명출산제를 도입한 국가로 꼽히는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여성 요청에 따라 임신중지(착상 12주 이내)가 가능하다. 독일은 임신갈등지원법에 따라 임신갈등상담소에서 피임과 가족계획, 임신중지, 입양, 출산 등에 대한 상담을 포괄적으로 하고 있다. 임신중지를 비롯한 여러 선택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더 나은 결정을 하도록 돕는 데 목적이 있다. 프랑스의 경우 출생아 62% 가량(2020년 기준)이 결혼 제도 밖에서 태어나고 있어, 한부모 가족 등에 대한 편견이 뿌리 깊은 한국과는 사뭇 다른 환경이다.

낙태죄 헌법소원 공동대리인단의 단장을 맡았던 김수정 변호사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피임 주도권이 대체로 남성들에게 있고,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할 경우 임신중지 비용도 천차만별인데다 정확한 정보도 찾기 어려운 현실은 열악한 한국의 재생산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짚었다. 또 “미혼모 등 취약층에 대한 양육 지원이 부족함에도 보호출산제만 이야기하는 건 재생산권도 아동 인권도 외면하는 졸속 입법”이라고 비판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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