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2015년
거꾸로 가는 민주주의
거꾸로 가는 민주주의
퇴행의 시간이다. 기본권이 억눌리고, 제도들은 역류한다. 정치적 자유는 위축되고, 꿈을 잃은 청년들은 박탈감에 몸을 떤다. ‘헬 조선’이란 절망적 아우성 속에 증오와 적대는 넘쳐나는데, 갈등을 풀어야 할 정치는 ‘가사상태’에 빠진 지 오래다. 민주주의 위기. 이 여섯 글자 말고는 오늘의 현실을 지칭할 다른 표현을 찾기 어렵다. 박근혜 정부 출범 2년10개월, ‘막무가내 세월’이 빚어낸 암울한 한국 사회의 풍경이다.
표현 자유 등 위기 내몰린 기본권
유엔, 한국 시민·정치적 권리
27개 분야 중 25개 ‘우려·개선 권고’ 지난달 5일 유엔 시민적 정치적 권리규약위원회(ICCPR)는 한국의 시민적·정치적 권리 전반을 심의한 뒤 27개 영역 가운데 25개 영역에서 ‘우려’ 및 ‘(개선)권고’ 판정을 내렸다. 특히 ‘집회 자유’와 관련해 위원회는 ‘실질적 허가제 운영, 과도한 무력 및 차벽 사용 등 평화로운 집회 권리의 심각한 제한’에 우려를 표명하며 “모든 이가 평화로운 집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하지만 권고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지난달 14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1차 민중총궐기 집회’에는 어김없이 차벽이 설치됐고,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 과정에서 직격 물대포를 맞은 60대 농민이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다. 집회의 배후로 지목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에게 수사기관은 30년 가까이 ‘법전상의 죄목’으로만 존재했던 ‘소요죄’ 적용을 검토하고 있다. 퇴행도 이런 퇴행이 없다.
‘아시아 민주주의 모범’서 인권후진국으로 추락 위기 민주주의 성숙도를 나타내는 지표들은 속절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국제 언론감시단체 ‘국경 없는 기자회’(RSF)의 언론자유지수 순위에서 한국은 지난해보다 세 계단 떨어진 60위에 그쳤다. 4년 연속 내리막이다. 국제 인권감시 단체 ‘프리덤하우스’는 한국을 ‘언론자유국’에서 ‘부분적 언론자유국’으로 등급을 낮췄다. 지난해 이 단체의 정치적 권리 수준 평가에서 한국은 9년 만에 2등급으로 주저앉았다. ‘아시아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불리던 한국 민주주의의 위상이 어쩌다 이렇게 추락했을까. 다양한 진단이 나온다. 적잖은 이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 부족과 제왕적 권위주의를 탓한다. 퇴행을 방조하고 심지어 가속화한 ‘야당과 진보세력의 무능’으로 책임을 돌리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총체적 퇴행을 어느 한 요인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가당찮은 일이다. 정치학자인 장은주 영산대 교수는 오늘날의 한국 민주주의를 ‘비자유 민주주의’라고 규정한다. 절차적 민주화는 성취했지만 삼권분립, 공정언론, 성숙한 시민사회라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토대가 취약하다 보니, 집권 세력의 성격에 따라 집회·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요소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한국이 일본의 보수 장기집권 모델을 닮아가고 있다고 걱정하지만 착각이다. 오히려 민주적 절차를 통해 새로운 권위주의 체제를 확립한 러시아, 헝가리, 터키 같은 나라와 가깝다”고 했다. ‘주기적인 선거’와 ‘정당 간 경쟁’이라는 자유민주주의의 골격만 갖췄을 뿐 시민들의 정치적 삶은 권위주의 시대와 다를 바 없는, 말 그대로 ‘선거만 하는 민주주의’라는 얘기다. 지금의 정치 위기를 한국 사회가 겪는 전반적인 경제·사회 위기 속에서 조망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임운택 계명대 교수는 “민주주의 위기는 정치를 왜소화하는 시장만능주의, 극심한 불평등과 정치적 양극화를 초래하는 신자유주의 체제 질서와 떼어놓고 설명하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정치적 토론과 합의를 ‘소모적 비용’으로 간주해 정당과 의회 기능을 무력화하고, 부의 극단적 편중과 양극화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적 저항을 치안·감시기구의 강화를 통해 제압하려는 권위주의적 통치방식이 세계적으로 부활하는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전문가들은 박근혜 정부에서 드러나는 정치적 퇴행을 ‘박정희 시즌2’라거나 ‘유신체제로의 회귀’로 몰아붙여선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고 말한다. 오히려 신흥 민주주의 국가의 ‘결손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나타나는 ‘재권위주의화’가 혼종된 결과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원인이 복잡한 만큼 처방과 대안도 다차원적이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선거에서 획득한 정당성으로 무장한 새로운 권위주의 체제는 선거를 통해 깨뜨리는 수밖에 없다. 야당의 실력을 키우고 체질을 바꾸기 위해 정치인과 지지자들이 노력하는 것 못지않게 ‘정치 참여’에 대해 유권자들이 갖는 ‘사회심리적 장벽’을 무너뜨리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여든 야든 거기서 거기’라는 냉소, ‘투표해도 달라질 게 없다’는 낙담, ‘의사표현 잘못하면 불이익 받는다’는 위축감을 시민들이 떨쳐내도록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한층 분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유엔, 한국 시민·정치적 권리
27개 분야 중 25개 ‘우려·개선 권고’ 지난달 5일 유엔 시민적 정치적 권리규약위원회(ICCPR)는 한국의 시민적·정치적 권리 전반을 심의한 뒤 27개 영역 가운데 25개 영역에서 ‘우려’ 및 ‘(개선)권고’ 판정을 내렸다. 특히 ‘집회 자유’와 관련해 위원회는 ‘실질적 허가제 운영, 과도한 무력 및 차벽 사용 등 평화로운 집회 권리의 심각한 제한’에 우려를 표명하며 “모든 이가 평화로운 집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하지만 권고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지난달 14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1차 민중총궐기 집회’에는 어김없이 차벽이 설치됐고,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 과정에서 직격 물대포를 맞은 60대 농민이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다. 집회의 배후로 지목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에게 수사기관은 30년 가까이 ‘법전상의 죄목’으로만 존재했던 ‘소요죄’ 적용을 검토하고 있다. 퇴행도 이런 퇴행이 없다.
‘아시아 민주주의 모범’서 인권후진국으로 추락 위기 민주주의 성숙도를 나타내는 지표들은 속절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국제 언론감시단체 ‘국경 없는 기자회’(RSF)의 언론자유지수 순위에서 한국은 지난해보다 세 계단 떨어진 60위에 그쳤다. 4년 연속 내리막이다. 국제 인권감시 단체 ‘프리덤하우스’는 한국을 ‘언론자유국’에서 ‘부분적 언론자유국’으로 등급을 낮췄다. 지난해 이 단체의 정치적 권리 수준 평가에서 한국은 9년 만에 2등급으로 주저앉았다. ‘아시아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불리던 한국 민주주의의 위상이 어쩌다 이렇게 추락했을까. 다양한 진단이 나온다. 적잖은 이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 부족과 제왕적 권위주의를 탓한다. 퇴행을 방조하고 심지어 가속화한 ‘야당과 진보세력의 무능’으로 책임을 돌리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총체적 퇴행을 어느 한 요인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가당찮은 일이다. 정치학자인 장은주 영산대 교수는 오늘날의 한국 민주주의를 ‘비자유 민주주의’라고 규정한다. 절차적 민주화는 성취했지만 삼권분립, 공정언론, 성숙한 시민사회라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토대가 취약하다 보니, 집권 세력의 성격에 따라 집회·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요소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한국이 일본의 보수 장기집권 모델을 닮아가고 있다고 걱정하지만 착각이다. 오히려 민주적 절차를 통해 새로운 권위주의 체제를 확립한 러시아, 헝가리, 터키 같은 나라와 가깝다”고 했다. ‘주기적인 선거’와 ‘정당 간 경쟁’이라는 자유민주주의의 골격만 갖췄을 뿐 시민들의 정치적 삶은 권위주의 시대와 다를 바 없는, 말 그대로 ‘선거만 하는 민주주의’라는 얘기다. 지금의 정치 위기를 한국 사회가 겪는 전반적인 경제·사회 위기 속에서 조망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임운택 계명대 교수는 “민주주의 위기는 정치를 왜소화하는 시장만능주의, 극심한 불평등과 정치적 양극화를 초래하는 신자유주의 체제 질서와 떼어놓고 설명하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정치적 토론과 합의를 ‘소모적 비용’으로 간주해 정당과 의회 기능을 무력화하고, 부의 극단적 편중과 양극화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적 저항을 치안·감시기구의 강화를 통해 제압하려는 권위주의적 통치방식이 세계적으로 부활하는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전문가들은 박근혜 정부에서 드러나는 정치적 퇴행을 ‘박정희 시즌2’라거나 ‘유신체제로의 회귀’로 몰아붙여선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고 말한다. 오히려 신흥 민주주의 국가의 ‘결손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나타나는 ‘재권위주의화’가 혼종된 결과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원인이 복잡한 만큼 처방과 대안도 다차원적이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선거에서 획득한 정당성으로 무장한 새로운 권위주의 체제는 선거를 통해 깨뜨리는 수밖에 없다. 야당의 실력을 키우고 체질을 바꾸기 위해 정치인과 지지자들이 노력하는 것 못지않게 ‘정치 참여’에 대해 유권자들이 갖는 ‘사회심리적 장벽’을 무너뜨리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여든 야든 거기서 거기’라는 냉소, ‘투표해도 달라질 게 없다’는 낙담, ‘의사표현 잘못하면 불이익 받는다’는 위축감을 시민들이 떨쳐내도록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한층 분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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