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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모든 것은 기억에서 출발한다

등록 2022-02-28 19:57수정 2022-03-01 02:30

연재ㅣ강원국의 ‘공부하면 뭐 하니’

강원국 |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학창시절엔 세 가지만 좋으면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해력, 요약력, 암기력이다. 선생님 말씀이나 교과서, 참고서에 있는 내용을 잘 이해하고, 중요한 것을 추려내 머릿속에 저장하면 됐다. 선생님은 ‘외우려 하지 마라. 이해하면 된다.’고 하셨지만, 이해만으로는 시험을 잘 볼 수 없었다. 기억해야 했다. 암기력이 중요했다.

직장생활에서도 기억력은 중요했다. 상사가 한 얘기를 잘 기억해야 했다. 깜빡하는 건 용납되지 않았다. 기억력은 성실성과 애사심의 척도였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지식과 정보를 기억하는 것도 필요했다. 검색해볼 데가 자기 머릿속밖에 없었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들은 게 많아도 기억에서 불러내지 못하면 소용없었다. 그래서 전화번호, 노래가사 등을 줄줄 외우고 다녔다.

지금은 어떤가. 나는 아내 휴대전화 말고는 기억하는 번호가 없다. 아들 번호도 ‘연락처’에서 찾아봐야 한다. 이젠 사람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나이 탓도 있겠지만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모든 게 휴대전화 안에 다 있다. 정보가 필요하면 휴대전화를 보면 된다.

이제는 휴대전화 없인 아무 일도 못 하게 됐다. 생업인 강의하는 일도 문제가 생겼다. 파워포인트가 없으면 강의할 내용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보지 않고 말하는 훈련을 했다. 지금은 머릿속 기억만으로 말한다. 간혹 묻는 이가 있다. ‘어떻게 두 시간 동안 아무것도 보지 않고 말할 수 있느냐’고. 그런 분에게 나는 이렇게 기억한다고 말해준다.

이제 기억력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암기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기억하고 있는 게 많을수록 상상력이 풍부하다.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 상상과 유추의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이제 기억력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암기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기억하고 있는 게 많을수록 상상력이 풍부하다.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 상상과 유추의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우선, 기억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요즘 매일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한 사람을 30분 동안 인터뷰하는 프로다. 나는 불과 한 달 전에 인터뷰한 분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도 인터뷰가 끝나면 기억에서 깨끗이 지우나 보다. 아내는 그런 내게 참 청순한 뇌를 가져서 좋겠다고 놀린다. 하지만 아내는 모른다. 내가 강의 분야에 관해서는 얼마나 또렷한 기억력을 갖고 있는지. 나는 기억해야 할 것만 기억한다.

시각화해서 외우려고 노력한다. 나는 흰 용지를 늘 갖고 다닌다. 카페나 열차 안에서 강의할 내용을 써보기 위해서다. 내가 쓴 단어에 동그라미를 치고, 단어와 단어 사이에 화살표도 긋는다. 낙서하듯, 그림 그리듯 끼적거린다. 종이 위에 쓰인 내용은 글자인 동시에 한 장의 그림이다. 나는 그것을 눈으로 외운다. 외워야 할 내용을 도식화해 시각적으로 외우면 기억이 잘난다. 학창시절 시험 시간에 내용은 떠오르지 않지만 그 내용이 있었던 위치는 기억나곤 했다. 오른쪽 위 사진 아래 이렇게. 미국 언론인 조지프 퓰리처가 그랬다. 그림같이 써라. 그러면 기억 속에 머물 것이다.

범주화도 자주 쓰는 방법이다. 강의할 내용을 비슷한 것끼리 묶는 일을 가장 먼저 한다. 이렇게 덩어리가 지어지면 각 덩어리의 키워드를 뽑은 후, 순서를 부여한다. 그러면 강의의 이정표가 만들어진다. 그런 후 세 가지만 외우면 된다. 덩어리 가짓수, 각 덩어리의 키워드, 키워드 순서이다. 강의할 때 키워드를 떠올리면 거기에 달린 내용이 줄줄이 엮여 나온다. 우리 뇌는 내용을 의미 있게 묶는 과정을 통해 기억한다. 이렇게 묶는 과정을 ‘청킹’(Chunking·덩어리 짓기)이라고 한다. 학창시절 공부는 이런 청킹 작업이 아니었나 싶다.

복기 또한 기억을 위한 핵심 도구이다. 복기 방법은 세 가지다. 자주 떠올려보는 게 첫 번째 방법이다. 머릿속으로 상기해보는 것이다. 이는 주로 산책하거나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한다. 잠들기 전에 다음날 강의할 내용을 더듬어보기도 한다. 상기보다 더 좋은 복기 방법은 말해보기이다. 열 번 떠올리는 것보다 한 번 말해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내가 아는 내용을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야기가 된다. 사람은 이야기를 잘 기억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써보면 기억은 더 확고해진다. 그래서 나는 늘 메모한다. 잊었을 때 찾아보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다. 기억하기 위해 한다. 글을 쓰며 메모한 것은 기억이 난다. 직장을 나온 후 지난 8년간 나의 블로그 등에 1만 2000개 정도의 메모를 했다.

내가 학교 다닐 땐 주로 읽기와 듣기를 통해 암기했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들음으로써 기억했다. 말하고 쓰는 게 더 효과적인 암기법인데 말이다. 하기야 공부 잘하는 친구들은 자신이 읽고 들은 것을 말해보는 기회를 가졌다. 짝꿍에게 설명해주기도 하고 앞에 나와 발표하기도 했다. 또 공책에 스스로 써보기도 했다.

이제 기억력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암기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기억하고 있는 게 많을수록 상상력이 풍부하다.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 상상과 유추의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필요한 내용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단서를 준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하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은 기억에서 출발한다. 기억이 빈약하면 막막하고 막연하다. 통찰력 역시 기억에서 비롯된다. 영감은 하늘에서 떨어지지도, 맨땅에서 솟아나지도 않는다.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고 융합되어 만들어진다.

과거에는 기억한 것 자체를 써먹었다. 재가공하지 않아도 기억만 많이 하고 있으면 시험을 잘 볼 수 있었다. 이젠 기억하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노트북만 켜면 누구나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포털사이트만큼 기억력이 좋진 못하다. 기억 내용을 가공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기와 글쓰기가 그 가공 과정이다. 기억 내용을 연결하고 결합해보는 과정이 글쓰기와 말하기이다.

올해 환갑이다. 나이 들수록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추억에 잠기는 시간도 많아졌다. 기억하고 있는 게 많은 것이다. 상상력과 통찰력도 그만큼 커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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