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성 교사의 인문 사회 비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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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가치 판단의 근거를 이성적인 타산성이나 효율성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타산성이나 효율성은 바람직한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진다. 인간의 존엄성, 인간 생명의 가치, 내면 세계의 숭고함, 사랑, 자비, 성실 등의 가치를 생각해 보자. 이성적 타산성이나 효율성은 결코 이러한 가치를 보장해 주지 못한다.-<도덕>(교육인적자원부), 19쪽
사회적 쟁점의 해결은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이익을 극대화하여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사회적 쟁점에는 관련 집단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의 이익이라는 본래의 목적에 맞게 해결되어야 하는데, 이를 합목적성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의약 분업을 둘러싼 갈등의 경우, 문제의 조속한 해결과 의사와 약사의 이익만을 중요시하여, 의약 분업의 본래 취지인 국민 전체의 건강과 생명을 경시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쟁점 해결의 기준으로서 효율성은 합목적성을 전제로 한 효율성이라 할 수 있다.-<사회>(중앙교육진흥연구소), 223쪽
논제 찾아 이해하기
17세기까지 유럽인들은 억압적인 종교와 전통적인 관습의 울타리 안에서 숱한 미신에 얽매여 살았지. 전염병이 돌면 과학적으로 원인을 찾아내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마녀가 저주를 내린 것이라며 마을에서 제일 수상한 여자를 잡아 마녀 재판을 여는 식이었으니까. 사람들은 주로 이 세상에서 사라져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여자를 마녀로 지목했어. 이 끔찍한 마녀 재판은, 왜 중세가 무너져야 하고 근대적 질서가 새롭게 열려야 하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 준 상징적 사건이었지.
17세기 이래로 꾸준히 발전해 온 자연 과학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우주의 개념과 질서를 새롭게 알게 되었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 또한 얻게 되었어. 근대인은 이성의 힘으로 스스로 서 있는 위치를 알게 되면서, 이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이성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지. 이처럼 중세의 무지와 어둠의 장막을 걷어 버리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 바로 ‘이성’이었어. 이성의 빛으로 암흑의 지배를 극복한다는 의미에서 사람들은 유럽의 18세기를 ‘빛의 세기’라고 불렀지.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으로 드디어 신 중심의 중세가 무너지면서 세계의 중심에 인간이 우뚝 서게 되었어. 그리하여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고 이성에 의한 인류의 진보를 확신하는 사상이 19세기까지 이어졌어. 이성은 근대 이후 계몽의 역사에 견인차 역할을 하였지. 이성은 신비적 계시라는 그럴 듯한 이름 아래 안개처럼 휘감아 오던 맹목적 권위와 종교적 강압을 삶의 구석구석에서 걷어 내었어. 무엇보다 인간의 이성을 신뢰했고 이성에 의해 인류 문명이 진보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던 시대였어.
이성의 밝은 빛으로 세계를 비추려던 기획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긴 그림자를 드리우지. 그리하여 19세기 말부터 곳곳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해. 그 얼마 뒤 인류는 두 차례에 걸쳐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전쟁에 휘말리며 처절한 운명을 맞이했어. “세계사는 야만에서 휴머니티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투석기에서 핵폭탄으로 전개해 가는 과정일 뿐이다”라는 아도르노의 말처럼, 사람들은 이성의 역설에 몸서리를 쳐야 했어. 그리하여 근대가 낳은 합리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된 거야.
비록 근대화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서구 사회가 합리성에 토대를 두고 발전해 온 과학 기술의 눈부신 성과에 힘입어 그 어느 때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지만, 그 같은 풍요의 뒤꼍에는 수많은 근대화의 병리가 켜켜이 쌓여 가고 있어. 비인간화한 소외된 삶이 널리 퍼지는 것과 전지구적인 생태계의 위기가 점차 높아지는 것이 단적인 예야. 이성의 이념에 기초한 근대화의 과업은 이처럼 새로운 억압 체계에 인간을 가둠으로써, 진보와 발전이 아닌 역사의 퇴행을 가져왔으며, 자유의 실현 대신에 비인격적인 경제적 힘의 지배, 관료적으로 조직된 행정의 지배를 야기했을 뿐이야.
현대 사회는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추구하는 효율성의 사회야. 이를 두고 나무랄 수는 없어. 문제는 합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합리성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채 왜곡됐다는 데 있어. 그 동안 서구 사회는 과학 기술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도구적 이성(instrumental reason)만이 기형적으로 발달해 왔어. 무엇보다 인간의 이성에서 가치 합리적 측면을 없앰으로써 인간의 이성을, 목적 달성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선택하는 데 계산만을 하는 이성으로 변질시킨 거야. 이성의 또 다른 기능인 목적의 정당성을 검토하는 반성적 차원은 퇴행했다는 말이지. 그리하여 근대 초기 이성주의가 추구하였던 본래의 역사적 목적이 사라지고, 결국 근대의 역사는 목적을 잃어버린 채 맹목의 구렁텅이에 빠져 버린 거야.
원래 이성은 효과적인 수단의 측량과 함께 목표의 정당성도 따지는 포괄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었어. 그런데 ‘어떻게’라는 방법만을 따지는 도구적 합리성만이 발달하면서,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목표 자체가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따지는 비판적 합리성이 사라지게 된 거야.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이성의 원래 이념에 내재해 있는 목표를 이해하는 능력과 그것을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해야 해. “예” 할 때 “예” 하고 “아니요” 할 때 “아니요” 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중세의 어둠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이성의 밝은 빛이었으니까.
박용성 ‘교과서와 함께 구술 논술 뛰어넘기’ 저자,여수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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